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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탈 쟈니(1): 가자~ 코카서스로

신화와 전설의 땅을 찾아 떠난 칠순여행

by 천산산인

2024년 10월말부터 2주간 휴가를 얻었다. 근무중인 키르기스스탄을 출발하여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와 아부다비를 거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오는 17일간의 여정이었다. 이번 여정은 본 저자의 70회 생일을 맞아 아내 그리고 딸과 함께한 가족여행이었다. 다녀와서 쓴 여행기를 올리려고 할 즈음, 한국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이내 탄핵정국으로 돌입하였다. 온 나라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뒤숭숭한 시국에 한가하게 여행기나 올리자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직도 선진 대한민국으로 향하는 길엔 넘어야할 고비가 많겠지만 이제 탄핵이 인용되고 새 희망을 이야기할 시점이 되었기에 그동안 미뤄둔 여행기를 틈틈이 올려보기로 한다.


천산산맥의 설산이 보이는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연구실에서

2025년 4월 14일(월)




아무 생각없이 살았다. 그리고 뒤돌아 본 어느 날, 내 나이 어언 일흔이었다. 70. 숫자만으로도 무거운 나이다. 시성 두보(杜甫, 712-779)는 「곡강(曲江)」이란 시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했다. 어릴 적 시골동네 기준으로는 흰수염에 백발이 휘날리는 산신령 같은 나이요, 병약했던 어린 시절엔 나 스스로 이 나이까지 살거란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까마득한 나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도 일흔은 기로소(耆老所)에 모셔서 국가원로로 대접받던 지엄한 나이였고, 동양의 고전에서도 70의 나이엔 모든 욕심도 사라지고, 모든 부귀영화도 내려놓는 허허로운 나이로 묘사되고 있다. 공자선생께서도 칠십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즉,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 나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수양이 덜된 나는 천산 기슭에 앉아서도 고국의 정치판 소식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고, 세속적 감정과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릴없이 나이만 먹은 그저 완악한 영감탱이로 늙어버린 것 같다.


아무리 속물이지만 그래도 칠순을 그냥 넘길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무언가 의미있는 계획을 세워 보기로 했다. 그래, 이름만 들어도 신비하게 느껴지는 그 곳, 코카서스로 떠나보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대(大) 코카서스와 소(小) 코카서스, 두 설산 산맥 아래 신화와 전설이 깃든 저 머나먼 땅 카프카스, 그 곳으로...


누군가는 여행을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인생살이 한굽이 돌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을 하는 삶은 멋질 것 같다. 그중에서도 일흔에 떠나는 여행은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는 가슴 시린 성찰(省察)의 여행이 되어야 하리라. 그런데 그 나이에 이른 작자가 도무지 허약하지도, 심각하지도 않다. 배낭을 울러 메고, 묵직한 캐리어를 잘도 끌며, 게다가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 철이 안들어도 한참 덜 들었다. 이웃동네 마실 가듯 가볍게 칠순여행을 떠났다. 마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알란 칼손처럼... 그리고 내 생애 가장 화려하고도, 가장 괴로웠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 아둔한 늙은이의 반도 살지 못한 채, 나 태어난 다음 해에 돌아가신 천재시인 박인환의 시린 감상을 가슴에 담고, 우린 저 미지의 땅 코카서스로 향했다.


“...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정다운 것은 죽고,

다리 아래 강은 흐른다...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주말여행? 별 말씀.

그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

아~ 센티멘탈 쟈니, 센티멘탈 쟈니”

--- 박인환 「센티멘탈 쟈니」 (1955)


2024년 10월 25일(금): 제1일차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에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2주 휴가를 얻었다. 당초엔 아내와 단 둘이서만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칠십이 넘으면 렌트카를 빌릴 수 없다고도 하고, 게다가 평생 들어온 그 잔소리와 성화를 칠순여행에서까지 들을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마침 집에서 쉬고 있는 딸 생각이 나기에 맘씨 착한 사위한테 양해를 구하고 경인이를 이번 여행의 총사령관으로 청빙했다. 그러나 이 결정이 여행 내내 큰 기쁨이자 큰 고통이 되었다. 여우굴 피하려다 여우와 호랑이의 협공을 자초한 꼴이 되었다. 시너지 효과는 좋은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획할 때는 살아 온 인생을 회고하는 조용한 칠순기념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두 여인들의 자상한 보호관찰로 위장(?)된, 끊임없는 감시의 눈길과 잔소리를 감수해야만 하는 칠순고문여행이 시작되었다.


출발 전 2주간은 유별나게 바빴다. 내가 근무했던 대통령실 산하 PPP Center에서 주관하는 국제회의에서 주제 발표를 했다. 그리고 공로상패도 받았다. 회의 셋째날에는 세계은행과 국제금융공사(IFC)가 공동주최한 PPP 사업발굴회의에 하루 종일 앉아서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의심되는 시시콜콜한 프로젝트 몇개를 엄정하게 비판하였다. 출발 1주전 주말, 아내와 함께 몇몇 한인들이 모여 김장 담는 행사에 갔다. 동갑의 장군출신 장로님과 둘이서 소금물에 절인 배추 250포기를 씻는 일을 이틀 동안 도맡아 했다. 통에 담겨있는 절인 배추를 한 포기씩 들어내서 깨끗한 물로 씻은 후 물기를 빼내는 일이다. 차마 장군님을 시킬 수 없기에, 쫄병 출신인 내가 맨발 차림으로 통에서 배추를 꺼내서 씻고, 장군님은 남정네들에겐 익숙한 자세로 수도 호스 들고 물만 뿌리시도록 했다. (군기 바짝 든 쫄병은 그저 몇일 뻐근한 정도였는데, 군기 빠진 장군님은 몇일동안 앓아 누워계셨다고 한다.) 출발 3일 전 계약연장을 위한 신체검사를 했다. 초저녁부터 굶고 병원에 갔다. 늘씬한 러시아계 간호사가 들어와서 침대에 누우라고 한다. 올려다보면서 “콧날 참 오똑하게 잘 생겼구나”하고 감탄하고 있는데, 이 미녀 다짜고짜 주사기를 푹 찌르곤 캡슐 가득 웬 4통씩이나 피를 뽑는다. 드라큘라가 따로 없다, 그리고 심야 비행기로 오는 딸 데리러 공항에 다녀왔다. 출발 이틀 전에는 키르기스스탄 경제상무부 창립 100주년 기념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경제기적에 대한 주제 발표를 했다. 또 한번 감동을 자아냈다. 그리고 저녁에는 지구촌나눔운동과 한림대 교수 출장 팀을 만나서 맥주를 한잔씩 나누었다. 출발 하루 전날에는 경제상무부 초청 음악회 및 리셉션에 참석하고, 일찍부터 예약된 한인교회 목사님과 코이카 봉사단원들과 저녁 회식을 했다. 출발 당일도 새벽에 일어나서 최광 교수님의 역저인 『누가 위대한 지도자인가』의 요약본을 읽고 수정의견을 작성하여 보내 드렸다. 이럴 지경이니 여행일정과 예약 준비 일체를 한국에 있는 딸이 할 수밖에 없었고, 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그 녀석의 스트레스도 가중되었다. 그리고 웬일일까? 몇 주 전부터 등판이 뻐근하고, 옆구리와 겨드랑이가 시렸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비슈케크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로 가는 토요일 직항편이 매진되었다. 하루 일찍 금요일 늦은 비행편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로 가서 일박하고 가기로 했다. 오전에 「국가행정아카데미」로 출근해서 동료 두 명과 함께 점심 먹으며 그 중 한 명이 휴대용 술병에 담아 온 ‘차차(Chacha)’ 술을 두 모금씩 나눠먹는 호기까지 부리고 2시 반쯤 집으로 돌아왔다. 안달하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며 필시 남편과 아빠 욕하며 꾸려 놓았을 단단히 챙긴 짐을 울러 메고 마나스공항으로 향했다. 그리 서둘지 않아도 되는데 역시나 내 예상대로 붐비지 않는 변방의 공항이다 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돈다. 카페에서 피자 1판 시켜 놓고 두어시간을 땜질했다. 몸이 시린 증세를 해결할 겸 남은 잔돈으로 공항에 있는 안마의자에 앉아 10분 동안 안마를 받았다. “The Sky Starts with Us.”란 광고판 아래 의자에 축 늘어져서 안마를 받는 늙은 영감의 사진으로 이번 여행이 시작되었다.

18시 50분. 밖은 벌써 어둑하다. 끝없이 펼쳐진 추이(Chuy) 평원을 지나 설산 준령 천산산맥을 넘어서 도달하는 도시, 타슈켄트. 우즈베키스탄은 내 인생 여정의 한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다. 1998년 대통령실 산하 「국가사회건설아카데미」란 거창한 이름의 중앙공무원교육원에 가서 두 달동안 자본주의 거시경제를 가르치느라 애먹었던 나라다. 당시 우즈벡은 소비에트연방에서 분리독립한 지 7년 밖에 안 된 상태였다.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에서 점잖게 일하시던 공산당 고위직 인사들 앞에서 웬 동양에서 온 녀석이 자본주의 경제의 요상한 운영원리와 경제정책을 설명하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나 또한 어떻게 알아듣게 해얄지 몰라서 우왕좌왕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2008년, 다시 한번 「타슈켄트공과대학」에 강의하러 가서 학급 반장인 사팔눈의 자몰라를 만났다. 함께 동행했던 아내와 상의하여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이 여학생를 한국으로 초청해서 사시 수술을 해주기로 했다. 아시아나항공 지사장께서 무료 항공권을 마련해 주시고, 공안과 병원 양교수님의 세심한 돌봄으로 수술을 잘 마무리했고, 우리 집에서 1달을 머물다가 여러 후원인들이 마련해 준 선물 보따리를 안겨서 귀국시켰다. 그 인연으로 2년 후 다시 이화여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오게 된다. 이번에도 지금 총장을 하고 계신 김은미 교수께 특별히 부탁하여 큰 도움을 주었다. 졸업 후 우즈벡 석유회사를 거쳐 지금은 상무성에서 에너지 담당 과장으로 한 몫하고 있다. 그리고 불과 5달 전에 또 한번 강의하러 타슈켄트를 다녀왔다. 이쯤이면 꽤 인연이 깊은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때가 되면 든 정(情)도 떼내야 되는가부다.


잠깐 눈을 붙였을까? 불과 50분 남짓 비행하여 타슈켄트에 도착했다. 1시간 시차라서 현지시간으론 여전히 18시 40분. 그래도 이미 컴컴한 밤이다. 여행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라더니 첫 기착지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그것도 내 오랜 추억이 잠겨있는 그리운 도시 타슈켄트에서... 공항을 나서자 역시 후진국답게 택시기사들의 호객행위가 귀를 멍멍하게 할 정도다. 당초부터 호출 앱인 얀덱스(Yandex)로 택시를 부르리라 마음먹고, 일체 응답을 하지 않은 채 주차장으로 나섰다. 헌데 얀덱스로 불러도 어디로 오도록 할지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그런 판국에 순한(?) 인상의 젊은이가 다가와서 “얀덱스 프라이스”라며 접근한다. 잠깐 눈만 붙일 호텔은 공항에서 직선거리로 2km 남짓 떨어져 있는 곳으로 얀덱스 상 17,500숨이다. 1달러가 12,800숨이니 택시비가 불과 1.5불도 안된다. 헌데 이 친구가 서툰 영어로 “Hundred seventy five Som”이라고 한다. 내가 얀덱스 가격을 보여 주어도, 계속 “Hundred seventy five Som”을 반복한다. “175숨? 영어를 모르는구나”하면서 따라서 주차장을 건너자니, 마주친 다른 기사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싱글벙글하면서 “Hundred seventy five”라고 자랑한다. 공항 진입로 고가도로를 벗어나서 유턴하자마자 호텔이었다. 차에서 내리면서 약간의 팁을 얹어서 20,000숨을 주니, 이 친구 정색하면서 “Hundred Seventy Five Som”라고 외친다. 내가 다시 얀덱스를 보여 주자,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키면서 “You said hundred seventy five.”라고 버럭 화를 낸다. 나도 핸드폰 위에 손가락으로 175를 쓰면서 “It is hundred seventy five. Do you think I am a fool? Look at this. It is seventeen thousand and five hundred Som.”하고 큰 소리로 응수했다. 집사람과 딸이 나를 말린다. 짐 들어주러 온 호텔보이에게 “네 생각엔 누구 말이 맞냐?”라고 하자, 이 친구도 비겁하게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약간의 싱갱이 끝에 내가 더 줄 생각이 없자 이 친구 20,000숨 지폐를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 화를 내면서 차를 몰고 가버린다.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녀석이다. 아마도 10배 바가지 씌워서 175,000숨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내 비록 개도국 체류하면서 웬만한 바가지 쓰는 것을 보시(普施)거니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입장이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길에서 주은 20,000숨은 짐 들어다 준 호텔보이에게 팁으로 줬다.


방으로 들어가자 아내와 딸의 잔소리가 양 방향에서 쌍폭(雙瀑)처럼 진동한다. 어쩌려고 큰 소리로 맞받아 싸우느냐. 그 친구가 더 난폭해서 해꼬지했더라면 어쩔 뻔 했느냐. 당신이 힘으로 젊은 애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냐. 외국에서 소란 피우면 누가 우릴 편들어 주겠느냐... 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버릇없는 녀석 혼내준 것 같아 통쾌한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한 편으론 “얼마나 돈이 궁했으면 이슬람 국가에서 저런 바가지 씌우기를 할까?” 싶은 측은지심도 들었다. 다른 한 편으론 “이제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려가면서 순박했던 우즈베키스탄의 인심도 사라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웠다.


여행 첫 기착지부터 이 지경이니 남은 여정이 얼마나 험난할까 싶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보다 훨씬 책임감이 크고, 훨씬 소심한 총사령관은 연신 한숨을 몰아쉰다. 다음부터는 어떤 경우에도 공식 호출앱만을 이용하기로 다짐하고 여행 첫날을 타슈켄트 공항 근처 작은 호텔 3인실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우즈벡항공 비행기 프로펠러에 앉아 쉬고있는 근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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