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피해의 진주, 바쿠
2024년 10월 26일(토): 제2일차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새벽 5시에 기상했다. 07시 35분 바쿠행 비행기를 타야한다. 얀덱스앱으로 호출 받아서 온 택시기사는 털보에 덩치가 큰, 약간은 인상이 험한 분이지만 군말 한마디 없이 정해진 가격대로 공항 터미널에 내려준다. 역시 사람 나름이다. 출입국 검사대를 통과하여 출국장으로 들어서자 나이 든 아주머님이 즉석에서 전통식 빵을 만들어 주는 화덕이 있다. 출출한 배도 채울 겸 두 장을 시켰다. 주문할 줄 몰라서인지 기대했던 맛있는 화덕빵이 아닌 아무 것도 얹어져 있지 않은 밀가루 부침개 비슷한 것을 준다. 가격만 비싸고 여기 저기 새카맣게 탄 밀가루 누룽지가 덕지덕지 붙은, 어떤 의미로도 맛있다고 할 수 없는 음식이다. 바로 옆 상점에서 커피를 시켜서 들고 오는 사령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나온다. 가격표도 없이 시킨 맛없는 커피가 한잔에 10,000원꼴로 받는단다. 아무래도 또 바가지 쓴 것 같다고, 공항에서 소매치기 당한 씁쓸한 경험이 있는 폴란드와 더불어 우즈벡도 자기 인생 최악의 나라라고 한숨 섞어 불평한다. 한 때 내가 가슴에 담고 있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안타까웠다. 이젠 정말 잊어야 할 때인가?
셋이 나란히 앉아서 2시간을 비행했다. 차가운 식사지만 우즈벡항공에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마련해 주어서 아침식사로 요기할 수 있었다. 식사를 나눠주는 스튜어디스가 차라리 우락부락하게 생긴 인상의 동양인 여성이어서 의아했다. 서쪽으로 2시간을 비행했지만 또 다시 1시간 시차가 있어서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 착륙하니 아침 08시 35분. 아침 안개가 공항 주변에 가득찬 잔뜩 흐린 날씨다. 경인이 한국에서 e-visa를 미리 신청해 놓았기에 입국에 전혀 지장이 없다. 헤이다르 알리예브(Heydar Aliyev) 바쿠국제공항은 유리벽 외관이 유선형으로 흘러내리는 현대식 건물이다. 아침이라서인지 공항은 차라리 한산했다. 환전을 위해 기웃거리다 보니 은행마다 환율이 제법 차이가 난다. 살림꾼이 다 된 경인이 요리저리 비교하여 환율이 가장 높은 환전소로 가서 줄서서 우선 200불을 환전한 후 코카서스 지역에서 사용하는 호출앱 볼트(Volt)로 택시를 호출했다. 공항 뿐 아니라 공항 접속도로도 중앙아시아 수준이 아니다. 선진국에 온 느낌이 확 든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시내로 점점 가까워지면서 도시고속도로 연도에 서있는 늘씬한 빌딩들의 위용이 한국의 건물들을 능가한다. 높이도 그러려니와 건물 디자인이 한국에서 보는 단순뭉툭한 건물이 아니다. 아파트는 서구 유럽식 건물처럼 고전적이고, 고층건물은 배배 꼬여 올라가는 전위적(前衛的)인 모습이 초현대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미래도시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다. 역시 산유국 oil money의 위용이 엿보인다. 촌놈 서울 구경 온 듯 택시 앞창 너머로 현대식 고층건물군을 올려다보며 동영상을 찍고, 시내를 지나쳐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숙소로 향했다.
Mercure호텔. 15층쯤 높이의 단단하나 예술적 디자인이 가미된 멋진 건물이다. 로비에서 우선 예약을 확인한 후 짐을 보관시키고, 다시 택시로 구불구불 언덕을 내려가서 구시가지 입구의 바쿠시청에서 하차하였다. 1904년 완공했다는 시청은 바로크식 연갈색 3층 석조건물로 유럽의 어느 도시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우아했다. 정문에 정교한 조각작품이 새겨진 별도의 시계탑과 그 위로 둥근 지붕(쿠폴라)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위에 청홍록 삼색 바탕에 이슬람의 초승달과 새벽별이 새겨진 아제르바이잔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이 건물도 구경하고 싶었으나 관광객에게 개방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건물 주위를 기웃거리며 시청 뒤쪽의 제법 가파른 성벽 계단을 따라 구시가지로 올라갔다. 저 멀리 잔잔한 카스피해가 보이고, 맞은 편 언덕 위로 바쿠의 상징인 푸른색 유리벽의 불꽃타워 빌딩(Alov Tower) 3채가 한 눈에 들어왔다. 꽤 풍요롭고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지도를 찾아보니 바쿠시는 카스피해 중서부의 압쉐론(Absheron)반도와 그 남쪽 해안선을 따라 길게 펼쳐진 지형이다. 바쿠의 구 시가지는 그 중에서도 반도 남쪽 해안의 활처럼 굽은 해변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구 시가지로 들어서자 방송차량들이 좁은 길을 가로 막고 있고, 전통의상을 입은 이슬람식 둥근 칼을 찬 무사들이 한데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사극(史劇)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면이었다. 우리 식구들에게 손을 흔들기도 하고, 카메라를 들이대자 손가락으로 V자를 지으며 웃어주기도 한다. 갑자기 이슬람 왕조 시대로 시간이동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구 시가지 관광의 핵심은 시르반샤(Shirvanshahs) 궁전이다. 시르반 왕조의 지배자(Shah)란 의미다. 시르반 왕조(861-1538)는 861년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로부터 독립한 이래 1538년 이란의 사파비드왕조에게 멸망될 때까지 카스피해 서쪽 해안 대코카서스산맥과 소코카서스산맥 사이 평원에서 700여년 동안 번성했던 왕조다. 코카서스 산맥이 자연 방벽이 되고, 약소국의 굴종외교를 적극 활용한 덕분에, 시르반 왕조는 유라시아를 휩쓸었던 징기스칸의 몽골과 티무르 제국의 침공을 피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온다. 1394년 티무르가 코카서스에 도달하였을 때 당시 시르반 왕 이브라힘 1세(재위: 1382-1417)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노예 8명을 티무르대제에게 바쳤다. 티무르가 “왜 겨우 8명이냐?”라고 호통치자, 이브라힘 1세가 즉석에서 “9번째 노예는 바로 접니다”라고 재치있게 답변하여 티무르의 폭소를 자아냈고, 그 덕에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르반 왕조는 당초 내륙도시인 사마키(Shamakhy)에 정도(定都)했었으나 15세기 지진으로 수도가 파괴되자 현재의 바쿠로 수도를 이전하고 축성(築城)하였다. 이체리쉐헤르(Icherisheher)라고 불리는 구시가지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구릉을 따라 성벽으로 둘러쌓인 21.5ha (약 65,000평)의 공간으로 여기에 왕궁, 모스크, 영묘는 물론 시장, 목욕탕, 대상(隊商, 카라반)들의 숙소와 일반인들의 주거지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밀집공간이다. 이 성곽도시는 역사·문화·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0년 도시 전체가 UNESCO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매표소에서 구시가지의 5군데 명소를 둘러 볼 수 있는 티켓을 구입했다. 우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덕 맨 꼭대기의 시르반샤 궁전으로 향했다. UNESCO는 이 궁전을 “아제르바이잔 건축의 진주”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보단 덜 아름답지만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완벽한 균형미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었다. 궁전 안에는 옛날 그림과 장신구, 옷 등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을 뿐 대작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수백년 역사가 녹아있는 궁전 안에서 한때 화려했던 이슬람 왕국 영화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운치있는 관광거리였다. 얼마 전 TV에서 본 적이 있는 콧수염 보호대 실물이 전시된 것을 발견하였다.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궁전 근처에는 왕족들의 전용 기도처였던 자그마한 모스크와 단아한 첨탑(미나렛)이 남아 있었다. 수백년 세월을 홀로 견디며 도시의 영고성쇠를 목격했을 첨탑이 웬지 고적해 보였지만, 저 언덕 너머로 펼쳐진 현대 도시의 늘씬한 건물 배경과 신구의 조화가 잘 어울러져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인기 있는 촬영장소다. 마당에는 궁전과 모스크를 장식했던 이슬람 문자를 상형화한 벽돌장식 수백점이 발굴되어 노천에 진열되어 있었다. 이슬람 문화에선 금기사항이지만 문양 중간중간에 사람들의 웃는 얼굴과 동물들의 형상들이 담겨져 있어서 마냥 엄숙하지만은 않은, 해학이 담긴 유물들이다. 신성한 건축물을 짓는 고된 일과 속에서 자기를 새겨놓은 것인지, 그리운 님을 그린 것인지, 혹은 “여기 한 민초의 땀이 배었노라”라고 선언하는 듯 인물상은 우리의 하회탈같이 탈속한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궁전 아래 언덕에 폐허가 된 목욕탕 터가 발굴된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로마의 카라칼라황제의 욕장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제법 높은 언덕까지 물을 끌어 올려서 큰 목욕장을 만든 기술이 대단하다. 이 곳은 왕족들이 이용했던 욕장이지만, 구 시가지 안에는 일반 대중들이 이용했던 훨씬 큰 지하 욕장들이 몇군데 더 있었다. 지하욕장은 온기유출을 방지하여 실내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에너지 효율이 좋은 설계 방식이었다, 그 대신 어둡고 환기가 안되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천정에 구멍이 뚫린 둥근 돔을 지상에 만들어서 환기도 시키고 빛도 들어오게 만든 과학적인 구조였다. 17세기에 건설된 Yelalti Hamam 지하욕장은 성문 입구 가까이에 건설되어 성안으로 들어오는 여행객들, 대상(隊商)들이 몸을 씻고 들어오게 하였다. 화려한 내부 장식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고, 물을 덥히던 시설, 목욕하던 공간 등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었다. 이 곳은 남탕-여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요일별로 구분하여 이용했다고 한다.
약간 이른 시간이지만 날씨도 으스스하여 상가건물들이 들어 선 궁전 입구의 식당들을 둘러보다가 목조 발코니가 옛스런 장소를 선택해서 들어갔다. 식당 이름이 Kurban Said였다. 실내는 훨씬 더 크고 멋있는 2층집이었다. 잘 차려입은 멋쟁이 젊은 여성들이 알록달록 차려진 요리를 즐기며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제법 고급스런 식당이다. 상냥한 식당 여주인이 실내 장식이 멋스런 2층의 전통식 탁자로 안내한다. 특히 내 자리는 술탄의 자리인 양 크고 높다. 주문도 하기 전에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작가인 Kurban Said에 관한 팜플렛을 가져다준다. 아제르바이잔 귀족청년 알리(Ali)와 조지아 왕국의 공주인 니노(Nino)가 19세기 후반 코카서스 지방을 덮쳤던 국제정세의 격랑을 헤쳐 나가며 서로 사랑하고, 가정을 이루고, 끝내 전쟁터에서 산화되는 순정소설 『알리와 니노』의 작가다. 그가 시르반샤궁전 근처 마을에서 자랐다고 한다. 집사람과 딸이 식당 여주인의 조언을 받아 몇가지 요리를 주문하였다. 멋있게 차려서 내오는 아제르바이잔 전통요리다. 나란 인간은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만 구별할 줄 알 뿐, 도무지 요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벽창호지만, 뭔가 멋진 요리를 맛있게 잘 먹었다. (현역 시절 후배 교수는 내가 세상에 두 종류 요리만 알고 있다고 놀렸다. 맛있는 요리와 더 맛있는 요리!!)
배가 든든해지니 힘이 솟구친다. 다시 구시가지 구경을 나섰다. 소소한 볼거리가 많다. 미니책자 박물관도 있고, 건물 벽에 넝쿨식물과 이끼를 활용하여 인물화를 만들어 놓았고, 심지어는 오래된 나무 등걸에도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이 곳은 고양이 천국이었다. 귀엽게 생긴 회갈색 고양이들이 곳곳에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을 따라 다녔다. 아래쪽으로 내려오자 작은 공터에 높이가 2미터가 넘는 이지적인 얼굴의 청동 두상이 있다. 중남미 올멕(Olmec) 문화의 거인 두상처럼 큰 흉상이 광장 땅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보니 아무렇지 않은 조각이 아니다.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인 Aliaga Vahid(1894-1965)의 흉상이다. 몸통과 머리칼이 온통 과일나무와 그 사이에 서있는 사람들로 뒤덮여 있는 독특한 조각품이다. 아마도 그의 첫 시집인 『탐욕의 과실(Fruits of Greed)』을 형상화한 것 같다. 밑에 있는 동판 해설문에 그의 필명인 Vahid(아제르바이잔어로 ‘유일’)처럼 이 조각도 ‘유일(unique)한 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의 시는 아랍-인도계의 전통 시 형식으로 운율을 강조하는 15행 이하의 짧은 시인 가잘(Ghazal) 양식으로 작시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음조인 무감(Mugham)의 가사로 널리 불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Ghazalkhan(가잘의 왕)’ 혹은 ‘최초의 랩퍼“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시는 소비에트 시절 아제르바이잔 사회의 부조리, 무지, 미신 등을 통렬하게 비평하고 있다. 다음에 인용한 그의 시 「만약 누가 처음부터 미리 말해 주었더라면」에서도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평의식과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이 발현되고 있다.
"만약 누가 처음부터 미리 말해주었더라면
무지가 우릴 이 험한 산과 바위들로 이끌지 않았을텐데...
만약 우리가 한 세기를 앞서는 약간의 지식이 있었다면
우리는 이웃들과 동지들에게 맹세하진 않았을텐데...
우리는 재능도, 지혜도, 나라도 없다
당신이 그것들을 개에게 던지더라도
개들도 그것을 먹지 않고
개들도 우리를 시체처럼 취급하지 않을텐데...
누가 우리의 얼굴을 신께 보여준다면
신께선 틀림없이 우리의 추악한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다
매춘부와 뚜쟁이들마저 우릴 필요로 하게 만드는
이 우라질 놈의 독이든 빵이여... "
골목길을 연신 기웃거리며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높은 성벽이 시야를 가로 막는다. 이 곳이 아제르바이잔 화폐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랜드마크인 Maiden Tower(처녀탑)이다. 여러 가지 학술적 설명이 있지만 사실보다는 스토리를 탐닉하는 관광객들에겐 전설이 더 재미있고, 여러 버전의 전설 중에서도 비극적 사랑으로 끝을 맺는 전설이 가장 어필한다. 가장 간단한 줄거리에 따르면, 왕이 공주에게 그녀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시집갈 것을 명령하고, 공주는 만약 높은 탑을 지어주면 결혼을 허락하겠노라고 약속한 후 탑이 완공된 날 꼭대기에서 스스로 몸을 날려 자살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탑 이름이 처녀탑이란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을 대표하는 발레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Maiden Tower』의 줄거리는 좀더 복잡하다. 왕이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 보니 왕비가 딸을 출산하였다. 화가 치민 왕이 아이를 버리라고 명령하나 유모가 이 아이를 비밀리에 키운다. 17살이 되자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한 공주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왕이 우연히 이 아름다운 처녀를 목격하고 미모에 반해서 탑에 감금한다. 공주의 애인은 왕을 살해하고 애인을 구하려 탑으로 올라가는데, 황급히 올라오는 발소리를 왕으로 착각한 공주가 몸을 날려 죽는다는 줄거리다. 아제르바이잔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Maiden Tower는 기원전 7-8세기에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사원으로 건설되었다는 설부터,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지어졌다고도 주장되고 있으나, 현재의 탑은 12세기에 완공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도 거의 1,000년 전에 지은 건물이다. 높이가 30미터에 이르고, 땅 밑 기초도 지하 15미터까지 파고 내려간 거대한 건축물이다. 성곽 외곽도 물결같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다듬은 건축공학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의 역사유물이다. 탑 안으로 들어가서 좁고 가파른 계단을 통해 꼭대기에 다다르니 바쿠 시내와 탁 트인 바쿠만의 풍광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안전펜스로 쳐놓은 유리방벽에 안개 낀 바쿠 시내의 그림자가 투영되어 사막의 신기루인양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곳은 멀리서 다가오는 적군을 탐지하기에 최적의 장소이자,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하늘에 제물을 드리는 불의 제단으로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 옛날 아제르바이잔의 선조들은 이 탑 위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비스럽고 두려웠을까... 메이든 타워 인근에는 이슬람에 의해 파괴된 아르메니아 교회의 유적도 있었다. 유적지의 크기로 볼 때 꽤 큰 교회의 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성벽을 따라서 구시가지를 빙그르 한 바퀴 돌면서 여러 유적지와 오래된 건물, 유명한 호텔 등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5군데 명소 중 하나 남은, 유명화가의 갤러리를 찾지 못해서 언덕 위 궁전 입구에서 다시 골목길을 더듬어 언덕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Tahir Salahov(1928-2021) 미술관은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있었다. 그는 소련연방 시절에 이미 소비에트 전역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던 작가로, 1973년에 최고 화가에게만 주어지는 인민화가로 추대되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강렬한 터치로 그렸고, 아제르바이잔 독립 이후에는 민족적 정서를 담은 부드러운 그림을 그렸다. 미술관이라기 보다는 그림 가게에 진열된 것처럼 수백점의 그림이 닥지닥지 전시되어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을 대표하는 화가지만 관람객은 거의 없다. 꼬불꼬불한 계단을 지나 3층 방방을 꽉 채운 그림을 지켜보는 관리인도 없다. 덕분에 우린 그림 가까이에 눈을 붙이고 살펴보기도 하였다. 소비에트 시절의 그림이 주를 이루다 보니 이념에 식상한 신세대들에겐 크게 어필하지 못하는 그림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미술관을 나오니 벌써 늦은 오후다. 택시를 타고 Mercure호텔로 돌아와서 14층에 있는 주니어 스위트룸을 배정 받았다. 호텔방의 카페트도, 벽에 걸린 그림도 모디리아니의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간명한 선과 원색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화려한 느낌이 가득하다. 창문 밖으론 바쿠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다. 그러나 이 멋진 방을 즐길 틈도 없다. 아제르바이잔의 양고기 요리가 세계 제일이라고 소개된 관광책자를 읽고, 다시 택시를 불러서 추천된 식당을 찾아 나섰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어둠이 도시를 뒤덮었다. 퇴근길 교통에 막혀 생각보다 시간이 무척 소요되었다. Qadim Qabala 식당은 시내를 관통하여 공항 방면으로 나가는 중간 지점의 해변가 매립지에 있었다. 이제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우중이라선지 식당은 차라리 한적했다. 주문하고 30여분 기다리자 과연 먹음직스럽게 잘 구운 양갈비를 통째로 들고 왔다. 나무 십자가처럼 생긴 거치대에 양갈비와 큼지막한 감자 몇알이 주렁주렁 꿰어져 있는 모습이 수금(手琴)을 연상시켰다. 사진을 찍고 나니, 그 자리에서 양갈비와 감자를 해체하여 접시 위에 쌓아 준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식감인 ‘겉바속촉(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바비큐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오이로 소문난 딱딱 부러지는 자그만 아제르바이잔 오이를 샐러드로 시켜서 함께 먹었다. 자칭 세계 제일이라는 두가지 음식이 나열된 식탁이니 먹는 음식, 보는 음식으로 나무랄데 없는 식당이다. 빗길 10km를 달려와서 먹은 보람이 있었다. 손님이 없어서 난방을 하지 않아선지 방은 약간 서늘했지만,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이제 밖은 빗줄기가 제법 거세다. 다시 택시를 불러서 돌아오는 길에 비에 젖은 도심 풍광을 살펴보았다. 20세기 초 오일 머니가 아제르바이잔을 흥청망청하게 하던 시절에 지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멋진 건물들이 택시 유리창 빗물에 어려, 이 곳이 파리인지, 바쿠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우리나라에서도 보지 못했던 명품 브랜드 상점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국제 통계상 1인당 소득은 아직도 7,145불 (2023년 경상가격)에 불과하니 우리나라의 1/4 이하인데 웬 비까번쩍한 명품숍들이 이렇게 번성하고 있는지... 최고급 사치품을 구매하는 계층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소득 불평등이 만연한 국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깔끔한 숙소, Mercure Hotel로 돌아와서 잘 씻고 푹 잠들었다. 새벽 5시부터 두 나라를 이동하면서 쉬지 않고 구경 다닌 힘든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