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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탈 쟈니(3): 아제르바이잔

불의 나라, 바람의 도시

by 천산산인

2024년 10월 27일(일): 제3일차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영 컨디션이 좋지 않다. 옆 구리와 가슴, 등판이 계속 시리다. 몇일동안 운동을 안해서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아침 일찍 일어난 김에 호텔 아래쪽 언덕에 보이던 Huseyn Cavid공원으로 산보를 나섰다. 바쿠의 별칭이 ‘바람의 도시’라더니 과연 바람이 세다. 5분 정도 걸어 내려가자 제법 가파른 구릉을 따라 녹지대와 휴식공간이 잘 조성되어 있다. 늦가을, 세찬 바람이 부는 아침이니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앞으로 바쿠 시내와 카스피해가 펼쳐져 있고, 공원 뒤 언덕으로 현대식 멋진 빌딩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서 운동과 산책하기엔 더할 나위없는 명당이다. 일출을 바라볼 수 있는 마치 맞은 시간. 좋은 위치지만 날이 흐려서 핸드폰 사진기를 켠 채로 한참을 꼬나보아도 붉은 해는 보이지 않는다. “헛둘 헛둘” 하릴없이 국군도수체조에 맞춰 한바탕 팔다리를 휘두른 후 호텔로 돌아왔다. 내 칠십 평생 큰 병없이 비교적 건강하게 지낸 비결의 팔 할은 입대해서 배운 이래 거의 50년동안 매일 아침 실시하는 국군도수체조 덕이다. 여행 3일차만에 처음으로 먹는 제대로 된 호텔 조식뷔페다. 외국여행할 때는 걸핏하면 식사를 건너 뛸 수밖에 없기에 아침을 든든히 먹는 것이 좋다. 우리 식구들은 이미 그 요령을 터득하여 접시 치워주는 종업원들 보기 민망할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여러 종류의 음식을 즐긴다. 사실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호텔비에 이미 포함된 가격임에도 아침 뷔페는 늘 공짜음식처럼 반갑다.

오늘 하루도 먼 길을 가야되니 출근시간 이전에 도심을 벗어날 수 있도록 서둘러야 된다는 여행 사령관의 명령대로 배낭을 울러메고 호텔을 나섰다. 이번은 제법 교외로 가는 길이다. 택시를 불러서 출근차량행렬과 반대방향, 즉 도시 외곽 북쪽 방향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 곳곳에 작은 기중기가 기름을 길어 올리는 장면이 목도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동부지역은 사실상 기름밭 위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세계 최초의 유전도 이 근처에 있다. 목적지인 Yanar Dag은 압쉐론(Absheron)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천연가스 매장지역이다. 오래 전부터 이곳은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성지로 신성시되었던 곳이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는 옛 선조들은 그 설명할 수 없는 대자연의 신비를 초자연적 신성함으로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조로아스터교의 발원지가 아제르바이잔이라고 한다. 지금도 언덕 아래 단층에서 불꽃이 타고 있다. 1950년대 이 지역에 사는 목동이 실수로 불을 붙인 것이 현재까지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는 설명이지만, 우리는 그저 수천년 전부터 타오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살아있는 곳으로 믿고 싶다. 폭 20미터 정도의 언덕배기 단층에서 사암 구멍을 통해 천천히 배출되는 천연가스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에 가까이 가려고 하니 경비원이 질겁하고 물러서라고 고함을 지른다.

꺼지지 않는 불, Eternal flame

Yanar Dag이란 이름이 ‘타오르는 산(burning mountain)’이란 의미라고 한다. 하긴 아제르바이잔이 페르시아어로 불에 해당하는 ‘아제르’와 터키어로 나라를 뜻하는 ‘바이잔’이 합성된 단어라고 한다. 여기도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과연 우리가 ‘불의 나라’, ‘바람의 도시’에 왔음을 실감나게 하는 신비한 장소다. 박물관 안에는 불꽃을 주제로 한 체험형 레이저 영상이 방영되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화면 앞에서 지은 동작이 벽면에 불꽃의 형태로 나타나는 VR 화면이다. 내가 팔을 쭉쭉 뻗으니 훨씬 큰 불꽃귀신이 되어 화면에 비치는 모습이 재미있다. 한 평생 불꽃처럼 화끈한 삶을 살지 못한 밋밋한 사내에겐 불꽃으로 화한 자신의 모습이 더욱 신비롭기만 하다. 박물관 자리는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신전(Ateshgah)’이 서 있던 자리라고 한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등의 작가인 알렉산더 듀마(Alexandre Dumas, 1802-1870)는 1858년 9개월에 걸친 코카서스 지역 여행 중 바쿠 인근의 ‘Ateshgah’를 방문하여 받은 강력한 느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바쿠판 베수비우스 화산을 방문했다. 그러나 아테슈가는 나폴리의 베수비우스 화산보다 더 위대하다. 왜냐면 그 곳에는 영원히 불꽃이 타오르고 있으니...” 불꽃 언덕 위로 YANARDAG이란 흰색 큰 글자 간판이 세워져 있고, 그 입간판을 배경으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는 그 언덕 너머로 좀더 걸어 보았다. 계곡 아래로 과거 이란 사파비드왕조의 군대가 침략해 왔을 때 양군이 대치했던 전선을 따라 흰 돌과 폐타이어로 주둔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더 가보고 싶어도 신발 바닥에 진흙이 덕지덕지 들러붙어서 발걸음을 띄기가 힘들었다. 이 곳 진흙은 기름을 머금어서인지 유난히 찐득했다. Yanar Dag의 신비한 불꽃은 일찍이 중국으로 향하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도 목도하여 『동방견문록』에 “신비한 불꽃과 한꺼번에 100척의 배에라도 실을 수 있는 기름이 뿜어 나오는 불타는 땅”으로 기록하고 있다. 남미대륙의 끝자락을 ‘불의 땅 (Tierra del Fuego)’이라고 일컫고 있지만, 진정한 ‘Tierra del Fuego’는 바로 이 곳이다. 대자연의 경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신기한 장소를 방문하였다. 다시 택시를 호출하여 혹시 가까이에 진흙 분화구가 있는지 기웃거리다가, 그냥 시내로 향했다.

시내로 들어서니 큰길가의 모든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아제르바이잔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독재국가라서인지 아직도 국민통합(?)이 절실한 나라인가부다. 정부에서 권장한 것이겠으나 삼색의 아제르바이잔 국기가 예뻐서인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아파트 앞면의 장식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 곳곳에 “COP29, Baku, Azerbaijan”이란 간판이 서있다.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가 약 3주후인 11월 11일 이곳 바쿠에서 개최된단다. 이 번 방문지는 헤이다르(Heydar) 모스크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다 싶더니 바쿠 국제공항에도 사용되고 있는 바로 그 이름이다. 현대 아제르바이잔의 역사는 이 사람의 개인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헤이다르 알리예브(Heydar Aliyev, 1923-2003)의 그림자는 아직도 아제르바이잔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소비에트 유니온(USSR) 시절 비밀경찰(KGB) 출신인 그는 1969년부터 13년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고, 1982년부터 1987년까지는 모스크바 중앙정치무대에서 수석부수상으로 일했다. 1990년부터는 아제르바이잔의 역외 영토인 낙치반(Nakhcjivan)의 지배자로 사실상 독립국 수장역할을 하다가 1993년 일어난 군부 쿠데타의 주모자로 당시 민주정치를 지향하던 대통령이었던 엘치베이(Elchibey)를 축출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그는 1인 독재체재를 구축하여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여론을 조작하여 99%의 지지율로 재선에 당선되는 등 2003년 죽을 때까지 10년동안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그의 권력은 아들인 일함 알리예브(Ilham Aliyev)에게 승계되어, 현재 20년 이상 대통령으로 재위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구조로 보면 북한의 김씨왕조나 중동의 토후국 정치와 다를 바 없는 나라다. 헤이다르 모스크는 아들 대통령의 지시와 재정지원으로 2012년 9월에 착공하여 공사기간 2년 3개월만인 2014년 12월에 완공된 모스크다. 그렇다고 허접하고 쬐그만 모스크가 아니다. 그 크기와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웅장한 건축물이다. 한번에 75,0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중앙 돔의 지름이 30미터, 높이 55미터에 첨탑(미나렛)의 높이가 9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모스크다. 두 개의 돔에 4개의 미나렛을 가진 시리반샤-압쉐론 양식으로 지었노라고 설명되어 있다. 모스크의 외장재는 연갈색 응회암 석재로 푸른 가을하늘에 투영되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내부는 화려한 대리석, 엄청난 샹들리에가 장식되어 있다는데 문이 잠겨있어서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웠다. 유리창 사이로 안을 기웃거리고, 웅장한 출입문 장식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모스크 앞 넓은 뜰을 가로지르며 한적한 벤치에 앉아서 푸른 하늘에 드리운 연갈색 모스크를 실컷 구경하고, 저 언덕 아래 바쿠 시내와 카스피해의 원경(遠景)도 즐겼다. 그러나 많은 관광안내 책자에서 이구동성으로 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헤이다르모스크의 야경을 끝내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근처에서 적당한 식당 물색이 안되기에 일단 ‘헤이다르 알리예브 문화센터’를 구경하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가만 있자~ 여기도 또 그 독재자의 이름이다. 독재자 영웅숭배를 위해 바쿠 도시 전체를 헌정한 것 같아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택시는 바쿠 방문객들의 필수 사진촬영장소가 된 “I ♡AKU” 현판 앞에 세워준다. 다른 도시들과 달리 바쿠는 러브마크 ♡를 약간 돌려서 B자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I ♡ BAKU”를 축약해서 “I ♡AKU”를 사용하고 있었다. 멋진 아이디어다. 우리나라 부산에 적용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인도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알파벳 사이사이를 옮겨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기다렸다가 얼른 몇장 사진을 찍고 넒은 잔디 언덕 위에 하얀색 웨이브가 아름다운 문화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건물은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디자인한 이라크 출신의 영국 여류 건축디자이너인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가 설계한 건물이다. 이 건물 또한 “곡선의 여왕”이란 그녀의 별명답게 물결모양의 지붕 곡선이 하얀색 건물 위로 넘실거리는 구조다. DDP와 HA문화센터는 동일한 기간(2007-2013) 동안에 지어진 자하 하디드 말년의 역작이다. DDP가 인근 도로와 같은 높이에 건설되느라 주변 고층건물에 둘러쌓여 그 아름다움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는 반면, HA문화센터는 언덕 위에 짓고, 건물 주위로 넒은 잔디 공간이 확보되어 건물의 미려함이 더욱 돋보였다. DDP도 조금 도두어서 지었더라면 수천개의 은빛 패널이 만들어 내는 신비감이 HA문화센터를 능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물결치고 있는 HA문화센터는 바쿠를 상징하는 부인할 수 없는 랜드마크가 되어 있었다. 건물 주변 잔디밭엔 여러 모양의 분수와 조각품이 어울어져 멋진 도심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아내와 딸더러 천천히 걸어 올라오라고 하고 나 혼자 잽싼 걸음으로 건물 전체를 한바퀴 돌며 외관을 꼼꼼히 관찰했다. DDP처럼 과연 어느 각도에서 바라봐도 같은 모양이 전혀 나오지 않는 부드러운 유선형 구조의 멋진 건물이었다. 아무래도 돌고래의 집단유영 장면을 건축물에서 구현하려고 시도한 것 같다. HA문화센터에서도 한가지 아쉬움은 있었다. 큰 길 너머이긴 하지만 언덕 위 동네에 있는 소비엣 스타일의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가 문화센터를 굽어보고 있는 점이었다. 건물 외곽을 한바퀴 돌고 오니 저 아래 집사람과 딸이 전시실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 웬 소년이 혼자서 잔디밭에서 축구공을 차고 있다. 내가 손짓하여 거리를 두고 몇 번 공차기를 하였다. 60년쯤 나이 차이가 나는 동양 노인과 서양 소년의 공차기. 자하 하디드가 저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미소를 지을 것 같지 아니한가? 앱으로 택시를 불러도 오지 않기에, 길 가에 서있는 런던 블랙캡 모양의 파란색 택시를 탔다. 이젠 런던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롤스로이스 구식모델이다. 아까 같이 공놀이했던 소년이 얼른 달려와서 축구공을 안고 움푹 내려간 운전수 옆좌석에 앉는다.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다. 해변가의 쇼핑센터까지 갔다. 별 싱갱이 없이 내리기에 그런가부다했더니 상당히 바가지를 씌웠단다. 일반택시 요금의 10배를 지불한 모양이다. 좀 비싼 차라고 듣기는 했지만 생기긴 점잖게 생긴 노기사가 외국인이라고 덤터기를 씌운 모양이다. 사령관이 무척 기분이 나빠서 쇼핑몰로 들어갔다.

Park Bulvar 쇼핑센터는 도시 남쪽의 카스피해변을 따라 조성된 ‘바쿠대로’ (아제르바이잔어로 Denizkenar Milli Park)라고 불리는 해변공원에 있다. 2010년에 완공한 복합쇼핑공간이다. 화창한 가을날씨의 주말 오후,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는 쇼핑센터라서인지 건물 안은 인파로 가득했다. 우선 요기를 하기로 하고 기웃 거리다가 제법 멋진 전통식당을 발견하여 창가 좌석에 앉아서 언덕 위의 불꽃타워를 구경하면서 음식을 주문했다. 헌데 식당 안에 울려 퍼지는 음악이 너무 커서 소음에 가깝다. 가져온 음식도 성의가 없어 보인다. 세팅도, 맛도 별로다. 내가 약간 투덜거리니 안그래도 여러 가지로 마음이 상했던 사령관이 마구 다구친다. 식당이 맘에 안들면 다른데로 옮기자고 하던지, 맛이 없으면 먹지를 말던지, 먹으면서 투덜거린단다. 지난 몇일동안의 스트레스까지 더해서 임계점을 넘어선 모양이다. 아둔한 내가 무얼 그런 걸 갖고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대충대충 받아 넘기니 더욱 화를 낸다. 아빠는 안다. 맘 여린 딸은 오로지 아빠에게만 큰소리칠 뿐 어디 가서 목소리 한번 높이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눈치 백치인 아빠가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딸이 지르는 고함에는 별로 기분 나빠하지도 않으니 (헌데 마누라가 고함을 지르면 왜 엄청 화가 날까?) 더욱 화가 나고, 그리곤 스스로 무안해서 한참동안 자신을 책망하곤 한다. 겅숭겅숭 떠먹고 식당에서 나오면서 보니 밤에 열릴 할로윈파티를 리허설하느라 늦은 오후 손님은 안중에도 없이 스피커 볼륨을 확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입구는 같지만 우리가 가려던 우아한 식당은 그 옆에 있었다. 잘못 들어간 것이다. 별로 유쾌하지 않게 쇼핑센터를 둘러보았다. 이슬람 국가지만 푸드코트엔 온통 KFC, 햄버거, 피자집 등 서구식 프랜차이즈 레스토랑들이 즐비했다. 아이들 데리고 주말 외식하러 온 가족들로 그 큰 홀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슬람의 금욕적 생활의 가르침도 양키 소비문화 앞에서는 맥을 못추는 장면이다. 베란다에서 해변가를 따라 줄지어 서있는 초현대식 건물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40층 높이는 될 법한 거대한 회전관망차(ferris wheel)를 연상 시키는 둥근 원형건물이 특별히 시선을 끈다. 뚫린 공간 사이로 푸른색 유리창이 반짝이는 늘씬한 건물들이 삼지창처럼 솟아있다. 언뜻 바라볼 때 원형으로 보였던 건물은 둥근 건물이 아니라 거대한 초승달을 뒤집어 놓은 모습으로 지어진 Crescent Hotel이다. 쇼핑센터에서 나와서 바쿠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걸어갔다. 20세기 초 석유부호들의 대저택 정원이 있던 지역으로 바다를 매입하여 조성한 곳이란다. 그동안 100년 넘게 공들여 가꾼 공원이니 이제는 바쿠시민들의 더할 나위없이 좋은 휴식공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선 찾아 볼 수 없는 멋진 해변공간이기에 더욱 부러웠다. 한낮에 바라보는 카스피해의 수면이 기름으로 덮인 듯 매끈하게 느껴졌다. 얼른 울타리 건너 이끼 낀 방파제 암석 위를 조심조심 걸어 내려가서 카스피해에 손을 담갔다. 바람이 없는 날이라선지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수초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도시 구간의 오염된 해수면이라선지 녹조가 많이 끼어 있다. 카스피해는 세계에서 제일 넓은 내륙형 바다다. 크기는 일본 땅 덩어리만한데 수면의 높이는 해발고도 마이너스 28미터다. 따라서 바쿠시내의 해안가 높이도 해발 –28미터로 세계의 수도중 해발 고도가 가장 낮은 도시다. 아침에 간 야나르닥에서 Altimeter 앱으로 재본 고도는 해발 –195미터까지 찍었었다. 해발고도 3,600m로 세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았던 아찔한 도시 볼리비아의 라파즈를 방문한 후 10년만에 세상에서 가장 낮은 수도를 방문한 셈이다.

마음 상한 사령관 동지는 뒤쳐져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온다. 자기가 화내고 자기가 맘 상해하니 둔감한 늙은 아빠는 딸의 민감한 마음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다행히 우리 사위는 딸의 좋은 배필이다. 딸의 마음을 잘 보살펴 준다. 지금도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벽창호 아빠와 다니는 불편함과 고집불통에 센스라곤 전혀 없는 아빠를 흉보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너그러운 맘가짐의 사위가 고맙다. 해변공원을 따라 2km 정도를 걸었다. 바닷가에 멋진 공공건물들이 건설되어 있었다. 활짝 핀 연꽃모양의 컨벤션 센터, 말려 있는 카펫을 형상화한 카펫박물관, London Eye같은 회전유람차가 보이고, 그 너머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191m에 이르는 국기봉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수로를 만들어서 카누를 타는 ‘리틀 베니스’라고 불리는 수상도시도 조성되어 있다. 해변공간 개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도시다.


일몰시간에 맞춰 언덕 위 하이랜드공원에 가서 바쿠항구를 관망하기로 했다. 후니쿨라 타는 줄이 길어서 예상보다 약 30분 정도 더 소요되었다. 서둘러 일몰 조망 포인트로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전망대 위에서 큰 함성이 들리고 박수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일몰을 구경하던 인도 단체관광객들이다. 일몰을 보면서 박수치는 장면은 태어나서 한번도 본 적이 없고, 게다가 마구 고함까지 지르는 정서가 무엇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세계 어디서나 일몰을 바라보는 관광객들은 거스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면서 숙연해 지는 분위기인데... 전망대는 천 평은 됨직하게 평평한 돌판으로 잘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일몰 뒤의 은은한 낙조의 잔영이 아직도 남아 있고, 언덕 아래로 하나 둘씩 점등되고 있는 바쿠시내의 불빛이 아롱아롱했다. 활처럼 굽은 바쿠만을 따라 즐비한 멋진 건물들이 조명을 받아 색다른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선 하이랜드 전망대에 있는 멋진 식당 Manzara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런 레스토랑이다. 깔끔한 식당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으니 사령관의 마음도 한결 풀리는 눈치다. 멋스런 도자기 접시에 담겨온 스테이크와 파스타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전통요리를 로컬맥주 시르달란(Xirdalan)과 더불어 맛있게 먹고, 천천히 우아한 분위기를 즐기고 밖으로 나왔다. 산 아래 항구도시 바쿠가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빛나고 있다. 고층빌딩의 조명이 바다 위 물결 위에 아롱거려 대칭구조를 만들면서 도시가 확 커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맑은 날씨 덕분에 아득히 저 멀리 해변가까지 불빛이 길게 늘어진 도시의 모습이 밤바다에 영롱하게 담겨서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꽃 타워 쇼였다. 밥을 먹고 나오니 불꽃타워의 움직이는 조명이 본격 시작되었다. 오늘의 주제는 애국심이다. 3동의 건물이 청홍록 삼색의 아제르바이잔 국기 빛깔로 물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삼색기가 되어 펄럭이고, 애국시민들이 국기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연출되다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타올랐다.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의 꺼지지 않는 불길이 애국심으로 승화되는 장면을 상징하고 있다. 불꽃타워 바로 앞의 흰색 모스크와 대조되어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불꽃타워 건너로는 보도를 따라 애국지사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다. 처음엔 별도의 국립묘지 공간을 조성하지 않고, 공원 한구석을 활용하는 것이 옹색해 보였다. 그러나 바쿠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최고의 전망을 애국지사들에게 헌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도시설계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묻힌 순국선열들이 밤마다 불꽃타워에서 연출되는 애국적인 레이저 쇼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이 한 몸을 바친 보람이 있구나”라고 하면서 뿌듯해 할 것 같단 생각도 했다. 후손들 또한 불꽃쇼를 보면서 국가를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들의 고결한 행적을 벅찬 가슴으로 추모할 수 있으니 어쩌면 최적의 장소란 생각도 들었다.

타워를 바라보며 길가 쪽으로 나서니 예상과 달리 이 높은 산위에 큰 광장과 넓은 대로가 있고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택시를 불러서 구시가지로 갔다. 천천히 걸으며 구시가지의 야간 풍광을 감상하고, 그 분위기를 즐겼다. 성곽도시의 밤은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연출했다. 메이든타워도 조명을 받아서 검은 하늘로 더욱 높이 솟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은 돈으로 Flying Carpet 상점에서 손바닥만한 그릇 받침용 카페트를 샀다. 헤이다르 모스크의 야경을 보러가야 하나 상의하다가 너무 피곤하니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일 아침 이른 비행기를 탑승해야 되는 일정이다. 택시 안에서 정교한 장식을 한 서유럽 스타일의 웅장한 건물들의 조명을 다시 한번 감상하면서, 또 다시 빙글빙글 돌아서 언덕 위 우리들의 숙소로 돌아왔다. 여행 3일차, 오늘 하루도 아침 8시부터 나서서, 쉴 새없이 돌아다니다가 밤 9시 넘어 숙소로 돌아 온 힘든 일정이었다. 사령관 딸 덕분에 이틀동안 짧지만 집약적으로 바쿠 구경을 잘한 것 같다. 해발고도 마이너스 28m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 영원한 불길이 타오르는 도시, 부산과 비슷한 지형지세지만 훨씬 도시계획이 잘되어 있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항구도시였다. 불의 나라, 바람의 도시를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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