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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탈 쟈니(4): 조지아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찾아서

by 천산산인

2024년 10월 28일(월): 제4일차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조지아 카즈베기까지)


아침 9시 출발하는 아제르바이잔항공편에 탑승해야 된다. 6시 기상에 6시 30분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택시를 불러서 공항으로 향했다. 행복한 아침 뷔페를 즐길 시간이 없어서 안타깝다. 바쿠에서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까지는 항공편으로 불과 1시간 남짓한 거리다. 높이 뜨지 않은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아제르바이잔 국토는 대체로 낮은 평원이고, 좀체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저 아래로 안개처럼 낮게 옅은 구름이 깔려 있다. 조지아에 가까워지면서 오른쪽 창 넘어 웅장한 설산산맥이 보이기 시작한다. 코카서스산맥이다. 비행기는 좌로 크게 선회하여 트빌리시 공항에 착륙하였다. 그루지아, 영어로 조지아에 왔다. 고유 언어로는 스스로를 사카르트벨로(Sakartvelo)라고 부른다고 한다.


트빌리시공항은 바쿠공항에 비하면 초라하였다. 그러나 일부러 그렇게 뽑아서 배치했나 싶게 공항 출입국관리 담당 직원들이 대부분 미모의 여성들이다. 제복을 입은 모습이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단호했다. 내 앞에 선 나이 든 말레이시아 여성에게 출국 비행편을 보여달라고 하고, 관광버스로 아르메니아로 갈 예정이라고 하자 뒤로 빠져서 기다리라고 매몰차게 명령한다. “어? 대단히 엄격한데”하고 나도 지레 움츠러들어서 쭈빗쭈빗 여권을 제시하니 출국 비행편 따위는 묻지도 않고, “Tourism?”하고 한마디 묻고는 입국도장을 쾅 찍어주곤 “Have a nice trip!”하고 웃으며 영어로 인사까지 한다. 한국 여권의 파워가 세계 2등이라더니 새삼 나라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서양인들 앞에서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 있는 나라라고 일일이 설명할 정도였는데, 어언 한국이 세계인들이 선망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대한민국 정말 마~이 컸다.

사령관이 한국에서 준비해 온 심카드로 바꿔끼고 예약해 둔 렌트카의 주인에게 전화해서 만날 장소를 확인한 후 공항을 나섰다. 렌트회사가 아니고 개인차를 예약했단다. 이제 현지에 와서 준비하는 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온라인으로 사전 예약/준비 다 해놓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나도 꽤 숙달된 해외여행자라고 자부하고 살아 왔지만, 요즘 젊은이들에 비하면 한참 구식이다. 난 아날로그 여행자일 뿐이고, 우리 딸 세대는 디지털 여행자들이다. 차 주인도 젊은 남자다. 이렇게 세계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인터넷 상에서 개인 렌트카를 직접 운영하고 있는 작은 사업가다. 빌린 차는 경인이 미리 낙점한 마츠다 626 SUV 푸른 색 차량이다. 확인절차와 주의사항, 반납장소를 확인하고 차를 몰고 나섰다. 공항 주변을 벗어나자 이내 거친 도로다. 아제르바이잔과는 천양지차의 도로 인프라다. 우선 가까운 슈퍼에 들러 차에 싣고 다닐 물, 식품 등을 구입하기로 했다. 차 안에서 먹을 아점 간식거리를 사고 사과와 오이 몇 개를 샀다. 보기는 시원찮은데 사과의 아삭상큼한 맛이 두고두고 생각날 정도였다. 주유소에 들러 휘발유도 만땅 채웠다.


조지아에서의 첫날을 코카서스 산맥 아래 러시아 국경근처 마을인 스테판츠민다(Stephantsminda)에 예약을 했기에 늦기 전에 먼길을 서둘러 가야 된단다. 수도인 트빌리시(Tbilisi)에서 거리상으로는 157km 떨어져 있으니 아주 먼 길은 아닌데 산길이 높고 험해서 혹시 눈이라도 쌓여 있으면 못 갈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면서 경인이 서둘러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트빌리시 외곽도로는 포장이 매우 불량했다. 여기저기 아스팔트 함몰된 구멍이 뻥뻥 뚫려서 곡예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E117번 지방국도로 진입하자 길이 좀 나아졌다. 주변 경관은 우리나라 청평호수나 강원도의 가을산과 방불했다. 그다지 높지 않은 둥근 산에 물길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모습이 한국에 온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1시간쯤 천천히 달리자 남청색 에메랄드빛 호수가 도로 저 아래로 보이기 시작한다. 설산의 석회수 녹은 물을 가둬놓은 인공담수호인 진발리(Zhinvali)호수다. 아라그비(Aragvi)강의 두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전망대가 있고 토산품, 간단한 먹거리 등을 파는 자그마한 상점이 20여개 있다. 집집마다 호두를 실에 꿰어 포도주 진액에 넣어 말린 조지아의 대표 간식인 추르츠헬라(Churchukhela)가 주렁주렁 걸려있다. 차를 세우고 남청색 호수를 뒷 배경으로, 중세 십자군 깃발인 5개의 붉은 십자가를 형상화한 조지아 국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하지 않아서 참 편하게 둘러 볼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온 도시가 고양이 천국이더니, 이 곳에 오니 강아지 천국이다. 그것도 큰 개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땅바닥에 여기저기 누워서 햇볕을 쬐고 있다. 이런 광경은 조지아 전역과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는 동안 거듭거듭 마주쳤다. 다행히 개들은 사람들을 잘 따르고 공격성이 없었다. 도로변에 제법 그럴 듯하게 지은 커피하우스가 있어서 들어갔다. 언제 손님들이 왔다갔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단지 썰렁할 뿐, 커피맛도 수준 이하다.

간단히 한잔 마시고 차로 10여분쯤 더 가자, 호숫가 끝부분 절벽 위에 고색창연한 멋진 성채가 보인다. 소위 조지아양식이라고 하는 후추통처럼 생긴 원추형 지붕을 가진 Ananuri 성채다. 남청색 Aragvi강을 굽어보는 전략적 위치에 건립된 요새다. 이 요새는 13세기부터 Aragvi 지역을 지배하던 공작(duke)의 성채였다. 이 성채는 인근의 다른 공작과의 전쟁으로 여러 차례 공격당했으나 험준한 지형지세 때문에 포위는 해도 함락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여러 달을 포위해도 성안의 주민들이 굶어 죽는 기색이 없었다. 성안에서 물가에 이르는 지하 비밀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적군이 누리(Nuri)지역 출신의 아나(Ana)라는 여인을 생포했다. 그러나 그녀는 극심한 고문에도 비밀통로를 밝히는 대신 죽음을 택했다. 그 이후 이 성채는 그녀의 충절을 기려 Ananuri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성채는 19세기 초까지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폐허로 남겨지게 되었다. 성안에는 지붕 양식이 다른 2개의 요새와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2개의 교회가 있었다. 교회 외벽에 조지아정교회의 상징인 대형 십자가와 그 양옆으로 새겨진 포도나무 장식이 두 개의 둥근 창과 어울러져 멋진 예술작품으로 남아 있었다. 폐허로 남은지 오래된 성채지만 군데군데 아름다운 벽장식이 눈에 띈다. 현재 UNESCO 문화유산 예비 리스트 목록에 올라서 보전/복구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몇일 후 바투미에 있는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1865년 영국인이 촬영한 성채 사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위용이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었다.

총사령관이 무척 피곤해 하기에 내가 대신 운전대를 잡았다. 몇일동안 여정관리에 신경 쓰고, 둔감한 아빠와 다니는 스트레스로 많이 힘들었던가부다. 뒷좌석에 가서 눕자마자 곯아 떨어진다. 측은하고 미안한 맘이 든다. 이제 산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가파르고 굽은 길을 따라 끊임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러시아 국경으로 가는 물류통로라서 엄청나게 큰 컨테이너 트럭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다. 거의 180도로 휘는 왕복 2차선 길을 그 큰 트럭들이 커브를 꺾는 모습이 신기하다. 그나저나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기에 그 사이를 뚫고 추월해 가면서 길을 서둘렀다. 막상 급경사 회전지점에서는 기다리거나, 심지어는 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에게 각도를 확보하게 해주느라 후진하기도 했다. 운전은 힘들지만 산 위로 오를수록 점점 경치가 좋아진다. 그래 이 길이 일찍이 1914년 독일에서 발간된 세계여행잡지인 『Baedeker』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악도로”라고 칭송 받은 길이다. 이렇게 꼬불꼬불 산길을 오르다 보니 산 중턱에 갑자기 현대식 숙박업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코카서스 산맥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구다우리(Gudauri) 스키장이다.


약 10분쯤 더 올라가자 큰 주차장이 있고, 그 위로 울긋불긋 그림이 그려진 콘크리트 구조물이 병풍처럼 서있다. ‘악마의 계곡(Devil’s Valley)’이라는 까마득한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해발 2,200미터의 언덕 위에 1983년에 러시아-조지아간 ‘게오르기에프스크(Georgievsk)조약’ 체결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반원형 우정의 탑 기념물이다. 러시아는 1783년 이란의 속국으로 있던 조지아 동부지역의 카르틀리-카케티(Kartli-Kakheti) 왕국을 겁박하여 외교권을 박탈한 후 러시아의 속국으로 만든다. 그러나 1795년 정작 이란 콰자르(Qajar)왕조 아가 칸(Aga Khan)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트빌리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조지아 전역을 약탈할 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1801년 러시아는 조지아왕국을 합병시켜 버린다. 따라서 1783년의 조약은 조지아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재앙이었다. 이를 200년이 지나서 다시 소비에트연방의 일원으로 속국화된 상태에서 두 나라 간 우정의 상징으로 미화하여 기념건축물을 제작하였으니, 의식있는 조지아인들이 보기엔 단지 역겨운 기념물일 것이다. 기념물 안의 벽화는 색색의 타일로 러시아와 조지아의 역사를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정치적 해석을 도외시한다면 예술적 가치로는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거대한 벽화로 기억될만한 작품이리라. 주변경관이 매우 수려했다. 아래로 굽어보니 산등성이 너머 오후 햇살이 화살처럼 흩어지고, 까마득한 그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운 계곡이 시커멓게 잠겨 있다. 오른쪽 위로는 뾰쪽뾰쪽 준수한 설산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협곡 사이로 빨강, 노랑 원색의 패러글라이더들이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니고 있다.

언덕길을 10분쯤 더 오르자 2,379미터의 마루턱에 이르고,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다. 이 길은 러시아 국경 너머까지 양옆으로 높은 산이 솟아있는 사이로 난 즈바리(Jvari) 협곡길로 ‘군대고속도로(military highway)’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세시대부터 러시아제국 군대의 코카서스 침투경로였다. 터널 옆길로 내려가니 높은 산 위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얼어서 산 전체가 큰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색깔이 주황색이다. 깎아지른 단층 전체가 유황 노천광이다. 차를 세우고 신기한 광경을 사진 찍고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얼음물이라서 잠시만 담가도 손이 시려서 견딜 수 없을 정도다. 즈바리협곡을 따라 10여분을 내려오자 이번엔 제법 탁 트인 평야지대가 한동안 펼쳐져 있다. 물론 이곳도 사방으로 높은 산들이 울타리를 치고 있는 분지지형이다.

스테판츠민다(Stephantsminda)는 카즈베기 군(郡)에 속한 해발고도 1,740미터의 자그마한 마을로 인구 1,500명 미만의 관광도시다. 높은 산 속에 둘러쌓여 새장처럼 포근히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서쪽으로 일대에서 가장 높은 5,054미터 높이의 카즈베기(Kazbegi)산이 있고, 동쪽으로 4,451미터의 샤니(Shani)산 사이에 끼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12km만 가면 러시아 국경인 변경 마을이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이 마을 꼭대기에 있는,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호텔이란다. 그런데 이름이 촌스럽기 짝이없다. 룸스(Rooms)호텔. 빵빵베이커리, 밥밥레스토랑처럼 방방호텔인 셈이다. 멀리서 바라다 보이는 호텔건물도 어디 시골분교같이 시커멓고 긴 사각건물이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이 호텔이 보통이 아니다. 코카서스산맥 관광의 랜드마크인 수도원과 카즈베기산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자연친화적으로 지어진 명품호텔이다. 리셉션부터 유럽 도서관에 들어온 것처럼 품격이 넘친다. 리셉션에서 근무하는 중년여성은 아예 파티에 참석한 백작부인처럼 빨간색 성장에 머리를 높이 올리고 고상한 몸짓과 세련된 영어로 손님을 맞고 있다. 카즈베기산 전망이 좋은 2층의 조용한 방을 배정 받았다. 경인이 얘기로는 할인을 많이 받은 방이라서 십중팔구 반대편 전망이 없는 방을 받았을텐데, 예약하면서 아빠의 70세 생일 기념여행이라고 쓴 특기사항 땜에 업그레이드된 방을 준비해 주었다고 좋아한다. 방에 들어서자 탁자 위에 멋진 필기체로 Happy Birthday 라고 쓴 조각케익이 준비되어 있다. 베란다 창 넘어 렌즈같이 매끈한 구름이 걸친 설산, 카즈베기의 준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짐 가방을 바닥에 던지고 모두들 베란다로 나가서 앞산의 절경을 보면서 감탄하고 사진을 찍었다. 아~ 저 곳이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산이로구나.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일로 제우스신의 분노를 사서 카프카스(코카서스)산 중턱 바위에 묶여 3만년동안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당했다는 신화의 고장. 그리고 그 독수리를 죽이고 프로메테우스를 구출한 헤라클레스의 전설과 기개가 배어 있는 바로 그 산이다. 이걸 본 것만으로도 험한 산길을 넘어 온 보람이 있다. 화들짝 감탄하는 우리 가족을 보고, 베란다에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놀던 옆 객실의 두 금발 어린이가 깜짝 놀라서 쪼르르 방으로 들어간다. 절경은 독점할 수 없는 공공재다. 공유의 미덕을 지켜야겠다.

우뚝 솟은 삼각형 봉우리가 미국 달러화의 조지 워싱턴이나 벤자민 프랭클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에게 물어보니 집사람은 귀가 큰 허시퍼피 강아지같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카즈베기 앞 산 봉우리 능선 위에 자그마한 교회 건물이 보인다. 저 곳이 코카서스 설산산맥을 뒷배경으로 서있는 그 유명한 ‘제르게티 성삼위일체(Gergeti Trinity)교회’다. 이 곳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나사못같이 생긴 산길을 따라 올라가서 저 하늘 중턱에 높이 떠 있는 것 같다. 1829년 이곳을 찾은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Aleksandr Pushkin, 1799-1837)은 「카즈베기의 수도원」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세메뉴 산맥 위로 높이 솟은 카즈베기,

너의 장막은 영원한 광선으로 빛나고 있도다.

구름 속에 쌓인 너의 수도원은

하늘 위에서 방주가 떠오르는 것처럼

저 산 너머로 솟아올라

겨우 보일 듯, 말 듯...“

내일 저 산꼭대기 교회를 가보고, 또 험산 준령을 넘어 온 길을 다시 가얄텐데 제발 눈이 내리지 않기를 빌었다. 하루종일 변변히 먹은 음식이 없다. 그러나 우선 몸이 시려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아빠가 먼저 사우나를 하고 와서 식당엘 가기로 했다. 나 혼자 사우나를 찾아서 들어갔다. 수영장까지 있어서 즐길만한 멋진 시설이다. 그러나 건식사우나는 남녀 공용이었다. 이용객이 많아서 좁은 사우나실에 서서 기다리다가 누가 일어서면 얼른 앉을 정도라서 전혀 쾌적하지 않았다. 땀을 좀 흘리고 더운 물로 샤워하면서 시린 겨드랑이 옆구리를 손으로 북북 문질러서 마사지를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오른쪽 겨드랑이에 물집이 붉게 크게 번져 있었다. 방으로 올라가서 사우나 시설이 불편하니 가지마라고 하고,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아내와 딸이 깜짝 놀란다. 그리고 몇주 전부터 등판도 뻐근하던데 봐달라고 하니 더욱 기겁을 한다. 겨드랑이보다 등판이 척추를 따라 더 크게 깊이 부스럼이 나있는 상태란다. 무슨 인간이 자기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깨닫지도 못하고, 가만있을 수 있냐고 다시 한번 성토 분위기가 되었다. 그 때부터 다들 달라붙어서 이게 뭘까 싶어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임파선암인가? 대상포진인가? 단순한 물집인가?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2주전 국제회의가 열린 산중 리조트에서 키르기즈식 사우나를 하면서 나를 특별히 예우하느라 눕혀놓고 약효가 있다는 자작나무 이파리 총채로 앞뒤 몸통, 겨드랑이 등을 휙휙 쓸어주던 기억이 난다. 그 날 이후 몸이 시린 증상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그때문인 것 같다. 사진을 찍어 놓고 걱정법석을 떨다보니 밥 먹을 시간도 지나버렸다. 피곤함에 걱정까지 겹쳐서 지친 아내는 벌써 침대에 누워 곯아 떨어졌다. 그래도 일단 먹어야겠기에 룸서비스로 햄버거 세트와 조지아식 샐러드를 시켰다. 역시 좋은 호텔이라서 룸서비스도 제대로다. 금빛도장한 카트에 흰색 천을 깔고, 은빛 뚜껑을 씌운 음식을 방안까지 밀어서 배달해 주었다. 침울한 분위기였지만, “오~ 예!”하는 기분으로 딸과 둘이서 맛있게 갈라 먹었다.

이제 밖은 캄캄해졌다. 푸시킨이 「조지아의 산」이란 시에서 “조지아의 산들이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였구나”라고 읊은 그대로, 5,000m가 넘는 카즈베기산 봉우리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잠겨 사라져버렸다. 조명을 받은 성삼위일체교회만 희미한 등대처럼 산 중턱에서 빛나고 있다. 저 아래 마을과는 상당한 고도격차를 두고 공중에 떠있는 등불이 낮에 본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솟아있다. 청정한 하늘에 유달리 별이 초롱초롱 빛난다. 코카서스 산맥에서 맞이한, 별이 빛나는 고요한 밤, 감사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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