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십자가의 수도원
2024년 10월 29일(화): 제5일차
(조지아 카즈베기에서 고리까지)
여행 닷새째. 아침 식사하러 8시쯤 식당으로 갔다. 창가 자리는 벌써 일찍 출발하는 단체관광객들이 차지해서 왁자지껄하다. 새벽같이 출발하는 단체 관광객의 대명사는 역시나 한국인 들이다. 허겁지겁 밥을 떠먹곤, 말타고 다니는 유목민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린 천천히 여러 가지 음식을 즐겼다. 역시 좋은 호텔이라서 조식 뷔페 차림새도 만만치 않다. 가난한 나라 키르기스스탄에서 맛보지 못한 음식과 차려진 과일, 과자와 빵까지 아내는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식당 안에도 큰 개 한 마리가 들어와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투숙객들도, 호텔 직원들도 애써 쫓아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워낙 순한 녀석이다. 1시간 이상 앉아서 통 창에 가득 담긴 설산 경치를 감상하며 키르기스스탄에서 맛보기 힘든 스페셜티 커피까지 우아하게, 그리고 충분히 아침식사를 즐겼다. 식사 후에 호텔 앞 베란다와 도서관처럼 꾸며진 벽난로 있는 휴게실, 당구대 등을 살펴보며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하룻밤 잠만 자고 떠남을 아쉬워했다. 카즈베기산은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다. 푸른 가을하늘에 솟아오른 삼각형 봉우리가 황혼녘과는 또 다른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위대한 장군의 기상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다. 체크아웃하고 차로 가보니 앞 유리창에 서리가 두껍게 껴있다. 역시 산속 마을이라서 기온이 무척 낮았다. 컨디션을 회복한 사령관이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후 모든 여정에서 사령관이 운전을 도맡아 했다.
진입로를 못찾아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약 10여분간 산길을 꼬불꼬불 빙글빙글 돌아서 앞산을 올라갔다. 걸어서 오르면 2시간 이상 걸리는 길이라고 한다. 문득 광활한 고원지대가 펼쳐졌다. 교회는 고원평지 넘어 절벽을 굽어보는 위치에 있었다. 제르게티 성삼위일체(Gergeti Trinity)교회. 깎아지를 듯 웅장한 설산을 배경으로 2,170m의 독립된 봉우리 위에 고고하게 서있는 조지아 정교회의 신앙의 표상이자 조지아 민족정신의 상징물이다. 왼쪽으로 푸른 하늘을 향해 홀로 우뚝 선 준수한 삼각형 설산 카즈베기(5,054m)와 오른 쪽으로 험준한 봉우리 곳곳에 악마의 손가락으로 할퀸 자국처럼 깊게 파인 산자락이 흘러내리는 또 다른 설산 샤니(4,451m)를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절묘한 위치다. 눈 아래로는 스테판츠민다 마을이 장난감처럼 옹기종기하다. 마을 가장 뒷부분, 우리가 묵었던 룸스호텔이 작은 분교(分校)처럼 호젓하다. 속세와는 완전 절연된 험산유곡에서 설산을 바라보며 홀로 서있는 수도원의 위치만으로도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함이 느껴졌다. 과연 세속에 지친 영혼들이 허덕이며 기어 올라와서 십자가를 붙들고 한바탕 통곡할만한 영험한 장소다. 수도승들은 무엇을 찾아 이 궁벽한 고산지대 천길 낭떠러지 위에 교회를 짓고 살았을까? 모든 것을 다 버린 절대고독의 현장에서 오로지 창조주의 섭리와 마주하고자 절규했을 구도자의 절대귀의(絶對歸依) 앞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제르게티 성삼위일체교회는 14세기에 건립되었다고 할 뿐, 누가, 어떻게 세운 것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조지아식 뾰쪽 지붕의 건물 두 동만 나란히 서있는 자그마한 교회다. 그러나 이 작은 교회는 조지아 정교회의 최후의 도피처였다. 나라에 전란이 있을 때마다 조지아 정교회의 가장 소중한 성물들이 이곳으로 옮겨져서 보관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은 조지아 정교회 교인들이 찾아가는 필수 성지순례 코스가 되었다. 낡은 교회 외벽과는 달리 예배당 안에는 반짝이는 성화와 성물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오래된 성단도 제법 잘 보전되어 있고, 간간이 오래된 벽화들도 찾아 볼 수 있었다. 아내와 딸이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제단에 촛불을 밝혔다. 제법 진지한 모습이다. 밖에선 지붕패널을 금박으로 교체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내년 봄쯤이면 황금빛 지붕이 제르게티 초원 위에서 반짝일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동록(銅綠)이 뒤덮여 이끼 낀 돌 건물과 어울리려면 수삼년이 지나얄 것 같다. 수많은 코카서스 여행객들이 찾아가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장면, 그 위치. 달력 사진 속에 지금 우리가 서있다. 주변 언덕 위로 올라가서 바라보고, 초원길 너머에서 다시 사진을 찍으며 떠남을 아쉬워했다.
아랫마을까지 차를 몰고 내려와서 약국을 찾아 갔다. 엊저녁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피부병 약을 요청했다. 약사 두분이 한참 상의를 하더니 더 나이 드신 여자 분께서 처방을 내린다. 대상포진이 아니고 진균성 피부병이라면서 몇가지 약을 건넨다. 이후, 우리 여정의 중요한 의식이 아침-저녁으로 소독하고, 약을 짜서 바르고, 알약을 먹은 후, 웃통 벗고 말리는 과정이 추가되었다. 촉박한 여정에 유쾌하지 않은 의식이니 매번 치료할 때마다 쏟아지는 잔소리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상해 보라. 매번 웃통 벗고, 오른 손 들고 폭풍 잔소리에 노출된, 한 때는 고명(?)하신 학자였으나 이젠 삐쩍 마른 가련한 늙은이의 모습, 이것이 내 칠순 여행의 상징적 장면이 되었다. 오~ 센티멘탈 쟈니...
어제 오후에 왔던 길을 그대로 달렸다. 즈바리협곡은 내리막길에서 보다, 오르막길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훨씬 웅장했다. 청명한 날씨지만 고산 폭풍에 하얀 구름이 흩어져서 협곡 너머 설산 봉우리를 스쳐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차안에서 연신 사진을 찍고, 동영상으로 연도의 경치를 찍었다. 어제처럼 2,379m 산마루를 넘어서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이제 도로는 좌우로 요동치면서 빙빙 돌기 시작한다. 잠시 후 계곡 건너편에 구다우리 전망대가 보였다. U자로 깊이 꺾이는 길모퉁이에 차량 몇 대가 주차되어 있기에 잠시 서서 구경하고 가자고 우연히 들어간 곳이 대박이었다. “Oh, My God!”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천하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어제 보았던 ‘악마의 계곡’, 무시무시한 단애가 우리가 서있는 언덕과 앞산을 깊이 갈라놓았고, 높은 산 뒤로 숨은 태양에서 발산되는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져 내린다. 우측으로는 한점의 얼룩도 허용치 않고 서 있는 단아한 이등변 삼각형 설산을 중심으로 여러 높은 산들이 겹겹이 도열해 있다. 뒷산 방향으로는 S자 모양 도로가 예닐곱 줄 겹쳐서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끊임없이 대형 컨테이너 트럭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왼쪽 아래로는 어제 들렀던 구다우리 전망대의 말굽형 조형물과 계곡 위를 날아다니는 패러글라이더들이 바라다 보인다. 까마득한 계곡 저 아래로는 동그란 호수가 거울처럼 가을하늘을 담고 있다. 늦가을의 언덕엔 한여름의 태양에 누렇게 타버린 잔디가 깔려있고, 중간에 있는 작은 둔덕에 흰 바탕에 5개의 붉은 십자가가 새겨진 조지아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사방 봉우리는 다 설산이니, 어디를 둘러봐도 감탄을 금치 못할 명승(名勝)이다, 문득 강릉 경포대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읊던 송강 정철의 가사가 생각난다. “이도곤 가잔데 또 어듸 잇단 말가?” 그래 바로 이 곳이로다. 계곡풍과 고산풍이 마주치는 장소이기에 필시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십상일텐데 오늘따라 바람도 잔잔하고, 날도 맑고 온화하다. 아내와 딸도 영화 『Sound of Music』의 Julie Andrews처럼 자유를 만끽하는 자세로 빙빙 돌며 사진을 찍었다. 나는 마치 십자군 전사인 양, 조지아 국기봉을 한 손으로 잡고 무릎을 꿇은 엄숙한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내 생애 최고의 절경중 하나를 칠순여행에서 마주쳤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훨씬 더 주의를 요한다. 사령관이 운전대를 굳세게 잡고 왕복 2차선 도로에서 눈치껏 컨테이너 트럭들을 추월한다. 나보다 훨씬 부드럽고 용감하게 운전을 잘한다. 어찌 보면 드라이빙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 아빠에게서 배운 운전인데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다. 남행길에서 족히 100대는 넘을 컨테이너 트럭을 추월한 것 같다. 아직도 볼 것도 많고, 갈 길도 먼 하루니 중간에 밥 사먹으면서 노닥거릴 틈이 없다. 내친 김에 어제 지나온 길을 냅다 달려서 다음 목적지인 즈바리(Jvari)수도원으로 향했다. 수도원은 트빌리시 외곽도시인 무츠헤타(Mtskheta)를 내려다 보는 656m 높이의 즈바리(Jvari)산 돌산 정상에 세워져 있었다. 진입로를 찾기가 어려워서 외곽도로에서 벗어나서 빙글빙글 돌며 불법 U턴을 하고서야 수도원으로 가는 산길도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 차량도 인적도 없는 길을 한참을 올라갔는데 웬 중년남성이 물병을 하나 들고 씩씩한 걸음으로 산길을 오르고 있다. 태워드릴까 하다가 워낙 씩씩하게 걷기에 어디 운동하러 가겠거니하고 그냥 지나쳐 갔다. 산정에 시커멓게 퇴색된 교회 건물이 보였다. 별도의 주차장이랄 것도 아닌 들판에 차를 세우고, 다 붕괴되고 일부 구간만 남은 높은 담장을 끼고 수도원으로 들어섰다. 여기도 개판이다. 큰 개들이 여기저기서 움푹 패인 구덩이를 골라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얘들도 모두 순한 개들이다. 수도원은 일대를 관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저 산 아래로 두 강(Kura강과 Aragvi강)이 합류하여 흐르는 지점이 한 때 조지아왕국의 수도였다는 므츠헤타(Mtskheta)다. 강변 비옥한 땅에 여러 개의 큰 교회와 수도원이 산재하여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도시다.
즈바리(Jvari) 수도원은 조지아정교회뿐 아니라 조지아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AD 3세기까지 조지아 왕국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믿는 왕국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 니노(Nino, 280-332)란 여인이 선교여행을 와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급기야 온 나라를 국교로 개종시키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후일 성인으로 추대되는 니노는 오늘날의 터키 갑바도키아 출신으로 어릴 적 들판에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를 주면서 이베리아왕국(조지아왕국의 별칭)으로 가서 전도하라는 환상을 본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가슴에 십자가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머리에 묶고 마을로 내려온다. 14살에는 아르메니아의 왕인 티리다테스(Tiridates) 3세의 궁녀로 끌려가게 되는데 301년 다른 35명의 여인들과 궁정에서 집단탈출을 감행하였으나. 모두들 붙잡혀 학살된다. 오직 니노만 장미덤불에 숨어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조지아로 도망쳐서 들어온 니노는 성경 말씀을 전도하면서 여러 가지 치유의 이적을 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조지아왕국의 왕비 나나(Nana)를 개종시키지만, 그녀의 남편인 미리안(Mirian) III세는 이를 거부하고 왕비를 쫓아낼 생각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길을 잃고 눈까지 멀게 되는데 절망 속에서 ‘Nino의 신’께 기도를 드리고 치유 받아서 궁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일 이후 미리안 3세는 326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이적이 성인 니노가 즈바리산에 있는 조로아스터 성전에 포도나무 십자가를 꽂은 이후 시작되었다고 하여 545년 구아람(Guaram) 1세가 작은 교회를 건립한 것이 즈바리수도원의 시작이다. 이후 그의 아들인 Stephen 1세가 증축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교회건물은 4개의 애프스(apse, 반원형 벽면)와 4개의 니치(niche, 벽감)를 가진 돔형 건물로 초기형태가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 이런 형태의 수도원은 ‘즈바리 양식’이라고 불리며 카프카스지방 수도원 건축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성니노는 죽을 때까지 전도를 계속하다가 조지아 동쪽 끝의 카케티(Kakheti)에 있는 보드베(Bodbe)수도원에 묻힌다. 이후 성니노의 포도나무 십자가는 조지아성교회의 상징이 되었다. 성당 안에는 성니노의 십자가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고, 이를 상징하듯 중앙제단에 나무십자가가 서있다. 경배 드리러 온 신도들이 바친 꽃이 십자가 제단 주위에 수북이 쌓여 있다. 1,500여년의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색창연함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아내와 딸도 나란히 서서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다. 밖으로 나와서 교회 외곽을 빙 둘러 살펴본 후, 산 아래 흐르는 세갈래 강줄기와 므츠헤타 도심, 그리고 아득한 산 너머로 옅은 노을빛이 비끼기 시작하는 초저녁 하늘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이제 낮동안 푸른 가을하늘을 유영했던 태양도 뉘엿뉘엿 서쪽 산맥 아래로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다. 강물 위로 태양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 더 늦기 전에 저 아래 보이는 성당도 둘러봐야 한다. 서둘러야겠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아까 올라갈 때 봤던 중년남성이 조금은 지친 모습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벌써 교회에서 마주친 것 같다. 차를 세우고 탑승을 권유하자 흔쾌히 뒷자리로 올라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인데, 한 직장에서 근무하는 조지아 출신 여직원으로부터 이 곳 수도원 얘기를 많이 들었기에 휴가를 내서 탐방 중이라고 한다. 우리가 저 강가의 수도원으로 가는 길인데 거기에 내려드리면 어떻겠냐니 매우 감사해 한다. 오늘밤 숙소가 트빌리시라고 하던데 대중교통으로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씩씩한 사내다.
스베티츠코벨리(Svetitskhoveli) 성당은 조지아 최초의 교회이자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라는 별칭으로 불릴만큼 지난 천년동안 조지아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성당이다. 이 곳을 교회 터로 잡은 사람이 바로 성니노라고 한다. 기독교로 개종한 미리안 3세는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틴(Constantine) 1세에게 주교와 사제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조지아 최초의 교회를 건립했다고 한다. 교회의 이름은 조지아어로 Sveti(기둥)이란 단어와 tskhoveli(생명을 주는/살아있는)이란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을 주는 기둥’이란 뜻을 가진 교회다. 이 이름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서 기인한다. 성경에는 예수가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로마 병정들이 예수가 걸쳤던 옷(tunic)을 제비뽑기하여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유태인 랍비인 엘리아스(Elias)가 성의(聖衣)를 사서 그의 고향인 므츠헤타로 가지고 온다. 그런데 이를 본 그의 여동생 시도니아(Sidonia)가 호기심으로 이 옷을 입자 불가촉 성물(聖物)의 기운으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게다가 시도니아에게서 이 옷을 벗겨낼 수도 없어서 할 수없이 그녀의 시신과 함께 옷도 매장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큰 삼나무가 자라났고, 300여년이 지난 후, 성니노가 성전을 짓기 위해 그 나무를 베서 7개의 기둥을 만들었는데 7번째 기둥이 스스로 공중에 떠있게 된다. 그 기둥은 성니노가 밤새 기도하고 나서야 땅바닥으로 내려왔고, 신주(神柱)에서 흐르는 성수로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쳤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매년 10월 1일에 축제를 벌인단다.
자~ 이쯤에서 얘기가 끝나면 이 성당의 독보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텐데, 문제는 전 세계 여러 유명 성당들도 저마다 자기들이 진짜 성의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독일 버전은 훨씬 유명한 인물이 등장하여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바로 동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Helena) 황후가 327년경 예루살렘에서 진짜 십자가와 이 옷을 발견하여 성의를 자기 고향인 트리에(Trier) 성당에 기증했다고 한다. 둘째, 프랑스 버전은 동로마제국의 실권자였던 아이레네(Irene, 750-803) 황후가 800년경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 748-814) 대제에게 성의를 선물하였고, 샤를마뉴는 자기 딸 테오드라다(Theodrada)가 머무는 파리 근교 아르장트(Argenteuil)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기증했다는 설이다. 세 번째는 러시아 버전이다. 스베티츠코벨리 성당에 보관 중이던 성의의 일부가 17세기에 조지아를 침공한 이란의 지배자인 샤 아바스(Shah Abbas) 1세에 의해 탈취되고, 러시아황제가 이를 항의하자 1625년 성의를 러시아 황제에게 헌사하였다. 그후 성의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생뻬제르부르그, 모스크바, 키에프 등의 교회에서 분산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요한복음 19장 23절)에서도 로마 군병들이 예수의 옷을 네 깃으로 나눠 가졌다고 하였으니 그 중 한 깃이 조지아로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비기독교도들이 들으면 뭔 허무맹랑한 얘기냐고 되묻겠지만, 아무튼 조지아인들은 이 전설을 매우 진지하게 믿고 있다. 특히 다른 전설과 달리 조지아 성의는 십자가 처형 직후,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하여 왔다는 현장성, 즉시성이 있으니 조지아인들의 믿음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허긴 성경에서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장 1절)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믿음이 적은 자들이 독실한 믿음을 두고 왈가왈부함은 신성모독행위다. 각자의 믿음대로 받아드리도록 하자.
무츠헤타 마을 안쪽까지 차를 몰고 와서 성당 외벽에 주차하고 경내로 들어갔다. 강아지 대신 양을 목줄 매서 교회 잔디밭에서 풀을 먹이는 분들이 눈에 띈다. 조지아를 대표하는 성당답게 성당 구내도 건물 내부도 넓고, 높았다. 어두침침한 본당 안에는 참배객들과 집전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예배 인파들로 붐볐다. 세월을 반영하듯 한 때는 화려했을 벽화들도 많이 탈색되고 벗겨진 것들이 많다. 그러나 새로 단장한 성전보다 차라리 이런 고풍스러움이 신앙의 깊이를 보여주는 듯 경건하게 느껴진다. 이 성당의 벽화들은 성경 다니엘서 7장 9절에서 묘사되고 있는 “옛적부터 계시던 분”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성전 정면, 세겹으로 파인 제단(sanctuary)에는 초기 기독교 화풍처럼 동그란 눈을 가진, 성경을 펼쳐 들고 앉아 있는 예수님의 엄청나게 큰 전신 좌상 그림이 성전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예수님 위의 천정 그림은 날개달린 아기 천사들이 불길 속에 앉아서 예수님을 옹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른 그림들처럼 이 성화들도 오랜 세월 향초의 그을림에 찌들어서 전체적으로 시커먼 색조가 배어 있었다. 통나무집 모양으로 만들어진 성당 안 기둥에는 성니노와 삼나무 공중부양 장면이 성화로 그려져 있고, 푸른색 그림으로 장식된 작은 제단 아래에 그 옷이 묻혀 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이곳을 영면장소로 택했는지, 바닥에는 역대 조지아왕들의 무덤이 빼곡하게 안장되어 있었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다. 살아생전에는 어디 감히 얼굴이라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었으랴만, 오늘은 송구스럽지만 당신들의 몸을 밟지 않고는 건널 수가 없군요. 한쪽 애프스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이 설치되어 있었고, 괴기스럽게도 예수의 12제자 중 한명인 안드류의 잘린 발이 금동모형으로 보관/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조지아인 참배객들은 그윽한 표정으로 성물을 바라보고,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영문 모르는 나는 감동이 없다. 성화, 성물보다 그런 참배객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더 신기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데까지 신경 쓰지 않던데, 내가 가 본 어느 성당보다 촛불제단들의 조형장식이 아름다웠다. 아내와 딸은 또 한번 진지하게 기도를 드린다. 밖으로 나와서 벤치에 앉아서 성당건물을 원경으로 관찰하였다. 어둑해 지는 저녁하늘에 우뚝 솟은 황색 사암으로 만든 고색창연한 성당은 화려하진 않지만 조지아양식의 절제된 균형미가 느껴졌다. 입구에서 바라볼 때 우유곽같은 오각형 건물이 세겹으로 겹치게 건축되었고, 그 위로 원추형 돔이 정중앙에 우뚝 선 구조다. 역사를 읽어보니 수난도 많았다. 티무르대제의 침공으로 부서진 것을 14세기 말에 재건축하였고, 18세기에는 외적을 막기 위해 방벽을 설치했다. 1830년대에는 러시아 짜르(황제)의 방문을 기해 북, 서, 남쪽에 있던 낡은 갤러리를 철거하고 오래된 벽화 위로 흰색 페인트를 도색하였다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처사다. 현재의 벽화들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흰 페인트를 벗겨내고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성당 너머 산꼭대기에 방금 다녀온 즈바리수도원이 석양빛을 받아서 자그맣고 빨간 장난감 집같이 얹혀져있다. 경내를 벗어나자 벌써 어둠이 깔려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고도(古都) 므츠헤타의 길거리에, 또 지붕 위에 석양빛이 감도는 초저녁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교회뿐 아니라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장소다. 생각해 보니 카즈베기에서의 아침 식사 이후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다. 분위기 좋은 이 마을에서 식사를 하면 멋지겠지만, 여행 사령관은 단호했다. 오늘밤 숙소가 1시간 거리의 고리(Gori)란 곳이니 더 늦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아쉽지만 그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 대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노점상 여주인에게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므츠헤타의 달콤한 맛을 음미하며 마을을 떠났다.
조그만 성읍마을을 벗어나자 금방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편도 2차선 고속도로는 예상보다 훌륭했다. 마지막 저녁놀이 수채화 물감처럼 붉은 띠를 그리고 있다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윽고 온 천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늙어서 바라보는 석양은 스스로를 보는 듯 서글프다. 그리고 나지막이 기원해 본다. 우리네 남은 인생도 저 노을처럼 붉게붉게 타오를 수 있길... 서쪽 산들의 윤곽이 마지막 석양햇살의 뒷조명을 받아서 더욱 또렷해지나 싶더니, 이젠 완전한 밤이다. 하루 중 이 때쯤이 가장 어둡다. 깜깜해 진 벌판을 약 1시간 질주하여 고리(Gori)로 들어갔다. 고리는 조지아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한 도시이자, 독재자 스탈린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경인이 예약한 호텔은 자그마한 부띠끄호텔이란다. 그런데 이용객 평이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칭찬 일색이라서 어떤지 궁굼해서 예약했다고 한다. 인구 5만명 소도시의 밤은 차라리 적막하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대로 컴컴한 시내를 천천히 주행하여 주택가 한복판에 있음직한 2층짜리 호텔로 찾아갔다. 후덕하게 생긴 웬 중년여성이 집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차안내를 해주고는 자신이 엠마라고 소개한다. 집주인이다. 밤에 본 Hestia호텔 외관은 차라리 초라했다. 그러나 문을 열자 2층으로 가는 계단 아래에 화려한 인형들과 소품 장식들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다. 방이 5개밖에 없는 가정식 호텔이지만 거실에는 앤티크 가구와 에디슨 확성기같이 생긴 턴테이블도 있다. 엠마가 LP판을 얹어서 노래를 틀어준다. 처음 듣는 노래지만 LP판 특유의 부드러운 음정, 감미로운 음악이 거실에 울려 퍼졌다. 탁자 위에는 집에서 담근 하우스 와인 붉은 포도주가 디칸터에 담겨져 있다. 맘껏 드시란다. 역시 와인의 나라 조지아답다. 방에도 싱글베드 3개가 단아하게 놓여있고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앙징맞게 장식되어 있다.
이젠 배가 고파서 다른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우선 밥부터 먹고 오기로 했다. 차를 몰고 집주인에게서 소개 받은 식당으로 갔다. 큰 길 가 빈 주차구역에 차를 세우고 길 건너 3층짜리 통창 유리건물로 들어갔다. 생뚱맞게 웅장한 샹들리에가 드리운 대리석 곡선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2층에 휑하고 엉성한 식당이 있다. 그럼에도 손님들로 제법 붐비고 시끄런 음악이 뿡작거려서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골 동네의 나름 인기있는 모임장소인 것 같다. 경인이 잽싸게 조사한대로 조지아식 만두(Khinkali)와 라와시(Khachapuri)에 샐러드를 주문하고 치킨조각튀김도 시켰다. 낑깔리는 홍콩식 만두인 소룡포와 비슷하게 육즙이 풍성하지만 만두피가 두껍고 만두 꼭지도 두툼하다. 만두꼭지를 손으로 집어서. 고개를 젖히고 육즙과 고기 소를 만두피와 함께 먹은 후, 꼭지는 버리는 식사법이다. 조지아식 핫차뿌리는 모두 배 모양의 큰 라와시(빵)인줄만 알았는데 이 집의 핫차뿌리는 손가락빵처럼 길쭉하고 치즈맛이 엄청 짜다. 시장기에 비해서는 맛있게 먹지 못했다. 나오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거의 모든 테이블들이 낑깔리를 수북히 쌓아놓고 먹고 있었다. 만두 전문점인 것 같다. 낮에 지나가면서 보니 시청 바로 뒤에 있는 식당이었다. 그 밤에 빈 자리에 주차하였음에도 그 새 주차위반 벌금이 부과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거실에서 유럽인 가족들이 와인을 마시고 있다가 우리와 마주치니 얼른 1잔씩 마시고는 자기들 방으로 들어간다. 우리도 나와서 한잔씩 마셨다. 하우스 와인은 신선하지만 맛있다곤 할 수 없었다. 엠마로부터 문자가 왔다. 그리고 아들인 초등학교 저학년 같아 보이는 은발의 서양 애가 쪼르르 올라와서 외출한 엄마 대신 방값을 받아 간다. 해리 포터같이 똘똘하게 생긴 꼬마녀석이 영어도 따박따박 제법 잘한다. 하는 짓이 귀여워서 하릴없이 영어로 몇마디 대화를 나눴다. 나부터 먼저 샤워하고 처음으로 상처 치료를 했다. 벌겋게 부풀어 오른 겨드랑이 물집에 알콜성 스프레이를 뿌리니 순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온다. 무슨 남자가 엄살이 이리 심하냐고 또 엄청 구박 받았다. 진짜 아프니 아프다고 하지 안 아픈걸 아프다고 하겠냐? 남자 노릇하기 진짜 힘든 세상이다. 아내와 딸은 몇일 밀린 빨래를 세탁기와 건조기에 돌리느라 늦게 잤다. 아프고 피곤하다고 먼저 늘어져 자는 영감이 얼마나 징그러웠을까? 그렇게 여행 다섯째날의 기나긴 하루가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