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쟈니(6): 조지아

흑해로 가는 길

by 천산산인

2024년 10월 30일(수): 제6일차

(조지아 고리에서 바투미까지)


여섯째 날. 이 호텔은 거의 무인호텔처럼 운영되고 있다. 아침을 먹으러 가니 작은 방에 다양한 음식이 제법 잘 차려져 있다. 알아서 먹을 만큼 떠먹고, 사용한 식기는 스스로 가져다 놓는 시스템이다. 손님들의 성숙함을 신뢰하는 호텔이다. 체크아웃도 셀프다. 그래서 그렇게 평판이 높은가부다. 9시쯤 호텔을 나섰다. 내가 스탈린기념관을 잠시 둘러보고 싶으니 30분만 할애하자고 요청했다. 시내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스탈린기념관이 있었다. 길가에 잠시 정차시키고 10분후에 만나자고 하곤 길을 건넜다. 이른 시각이라서 관람객 하나도 없는 기념관은 거의 대학교 캠퍼스를 방불케 넓었다. 스탈린은 이 곳에서 태어나서 4년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제화공이었다. 아직도 이 장소에 보전되어 있는 자그마한 집 지하에서 구두를 만들어서 생계를 유지했던 분이다. 그러나 사업이 기울자 술주정뱅이가 되어 아내와 하나 남은 아이인 아들 스탈린에게 가정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고,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가출한다. 후일 스탈린은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수업을 받다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심취되어 무신론자가 되고, 열정적으로 계급투쟁에 참여하게 된다.


서방세계의 시각으로는 스탈린(Iosif Stalin, 1878-1953)은 악마다. 수천만명의 국민들을 사회주의 혁명이란 이름으로 숙청했고, 그만큼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특히 1937년 18만명의 연해주 거주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고, 우리나라의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불구대천지 원수다. 적어도 우리 반공교육 세대는 그렇게 교육 받았다. 그런데 궁굼한 게 있다. 첫째, “러시아 변방의 소수민족 출신이 어떻게 소비에트연방의 최고권력자가 되어 거의 30년동안 세계의 절반을 다스렸는지?” 둘째, “그 악랄한 공포정치의 독재자를 왜 아직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이다. 내가 중앙아시아에 와서 놀란 것 중 한가지가 이것이었다. 상당한 지성인인 키르기스스탄 국가행정아카데미의 동료마저도 “스탈린이 상당수의 부르주아 숙청을 했지만 역사상 그렇지 않았던 혁명이 어디 있느냐? 17세기 중반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의 집권기, 1789년 프랑스혁명 때는 더 많이 죽였다. 그러나 스탈인은 당시 문맹률 90%의 소련사회를 집권기 동안 10%로 낮추고, 엄청난 복지혜택을 마련하여 사회주의를 완성시킨 분이다”라고 스탈린을 옹호하고 있었다. 상당 부분 공산주의 선동선전에 세뇌된 시각이지만, 스탈린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그는 스탈린을 호칭할 때마다 “우리 스탈린”이라고 부른다. 스탈린은 한때는 자신의 우상이었던 트로츠키를 비롯한 수많은 정적들을 숙청했고, 심지어는 사회주의권에서는 거의 신격화된 레닌의 죽음에도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다. 그러나 조지아인들의 입장에서는 과정을 무시한다면 그의 결과는 찬란하다.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절대권력을 행사할 조지아인을 다시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조지아의 숨겨진 영웅임에 틀림없다.

전시실은 2층이었다. 건물 내부도 궁전처럼 화려했다. 전시실 입구에서 티켓을 사오라고 한다. 약간 망설였다. 그러다가 결단했다. 한편 궁굼하지만, 시간도 없는데 내가 이런 괴물을 우상화시키고 있는 전시관에 한 푼이라도 쓴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냥 밖으로 나왔다. 기념관 이곳저곳에 다른 버전의 스탈린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어디 으슥한데 있는 동상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가야되나 생각하면서 어슬렁거리다가 잔디밭 건너편에 있는 큰 현판을 들여다보곤 웃음을 터트렸다. 스탈린기념관 터에 있던 오래된 교회를 발굴하는 사업 안내판이다. 그런데 이 발굴사업의 주 후원기관이 미국국제개발처(USAID)다. 그 터 건너편 주차장 매점 광고판에는 반라의 여인들이 코카콜라를 들고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를 그토록 싫어했고, 전세계를 사회주의 동맹국으로 통일할 꿈을 꾸었던 호전적인 사나이의 기념관을 사후 70년만에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미 자본주의의 돈줄과 양키문화가 휘감고 있는 것을 보니 새삼 인간사 무상함을 느끼겠다. 내가 나서서 만용을 부릴 필요도 없다. 역사는 심판한다. 그것도 준열하게... 아내와 딸은 저 영감이 기념관에 들어가서 10분만에 나올 리가 없으니 우리끼리 구경이나 가자하곤 고리 시내 외곽의 오래된 성채엘 다녀왔다고 했다. 연락할 방법도 없이 서늘한 아침공기 속에 꼼짝 못하고 길 위에서 25분을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이 길도 스탈린가(Stalin Street)다. 스탈린의 고향이라서인지 작은 도시치곤 도로 인프라가 매우 잘되어 있는 것 같다. 격자형 도시에 가로수도 많고, 공원도 넓고 푸른 쾌적한 도시다.


사령관 동지의 안내로 고리시 동쪽 15km 외곽에 있는 우플리스트시케(Uplistsikhe) 동굴유적지를 찾아갔다. 우플리스트시케는 조지아 말로 ‘주의 요새’란 뜻이라고 한다. 므츠헤타를 관통하던 강인 쿠라(Kura) 강줄기를 따라 들어가니 강가에 포도농사를 짓는 농가들과 과수원의 평화로운 풍광이 펼쳐진다. 동굴도시는 강가 옆 붉은 석회암 산에 건설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발견한 인간정주 흔적은 기원전 2,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위를 자르고 파내서 지은 각종 동굴주거지가 있고,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 건설된 교회터도 있다. 8세기에서 10세기에 걸친 이슬람세력의 조지아 침공 시에는 기독교인들의 저항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대상(隊商) 무역이 한창일 때는 실크로드 거점도시의 하나로 한 때 20,000명이 거주하던 중계무역도시로 융성했다고도 한다. 그러다가 14세기의 몽골침략 이후에는 거의 황폐화되어 버려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면적은 8ha(약 25,000평)로 전성기 때의 절반 이하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곳은 아나톨리아, 이란, 로마 등 여러 양식의 동굴주거지와 희미하게나마 벽면 장식과 벽화도 남아 있기에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어 있었다. 로마식 천정 문양이 뚜렷이 남아 있기에 로마황제의 이름을 빌려 명명된 카라굴라 동굴도 있고, 조지아통일왕조를 달성했던 바그라 3세가 즉위식을 했다는 전설이 있는 남쪽으로 넓게 티인 타마르여왕의 동굴도 있다. 여러 동굴 거주지를 어슬렁거리며 구경하였다. 위치가 절묘했다. 정남향 사면으로 강가에 위치해서 물을 구하기 쉬운 곳이었고, 강 건너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서 곡식과 과일을 재배할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바위산에는 손가락 크기의 얇은 도마뱀이 유독 많았다. 후대에 건설한 것이겠지만 언덕배기에 주황색 기와를 얹은 자그마한 예배당이 서있다. 교회 안에는 아무 것도 없고 나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과 조지아 국가 이름의 연원이 된 성 조지가 사악한 용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성화만 걸려 있다. 동쪽 사면 언덕엔 포도밭이 조성되어 있고 전통방식으로 포도주를 담그는 와이너리가 있었다. 술을 마실 형편이 아니기에 그냥 구경만하고 천천히 걸어서 내려왔다. 사령관 동지는 또 엊저녁부터 오전 내내 심기가 불편하다. 울화통의 원인 제공자인 사오정 아빠는 왜 그런지도 모른 채 마냥 즐겁기만 하니 더욱 화가 치미는 모양이다. 휴게소 근처 식당 의자에 앉아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힘을 내서 다음 목적지인 쿠타이시(Kutaisi)로 향했다.

서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E60은 멋진 길이다. 건설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표가 역력한 왕복 4차선 고속도로지만 중앙분리대도 널찍하여 제법 안전설계가 잘되어 있는 길이다. 아직은 그렇게 교통량이 많지 않아서 붐비지도 않는다. 압권은 우측으로 펼쳐지는 대코카서스산맥의 장관이다. 물론 원경이긴하지만 웅장한 설산 봉우리를 보면서 달리는 기분이 그지없이 상쾌하다. 좌측으로도 소코카서스산맥 줄기가 나란히 뻗쳐 있지만 고도 차이가 나서 설봉은 이따금 씩만 눈에 띨 뿐이다. 사실상 섬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도로 표지판에 국내 도시뿐 아니고 앙카라, 이스탄불, 소치 같은 이웃 나라 도시이름도 표시되어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휴식없이 약 2시간을 달려서 쿠타이시로 진입하였다. 조지아는 산악국가다. 국토의 대부분이 높은 산악지대이고, 동쪽 끝과 서쪽 끝에만 평야지대가 있다. 쿠타이시는 조지아 서쪽의 흑해변을 끼고 있는 세모꼴 평지의 가장 내륙 안쪽 꼭지점에 위치한 도시다. 이메레티(Imereti)주의 주도로 리오니(Rioni)강 유역에 인구 약 20만명이 살고 있는 조지아에서 세 번째로 큰, 유서 깊은 도시다. 선사시대 이래 현재까지 한자리에서 번성하는 세상에 몇개 안되는 도시 중 하나이자, 그리스 고전 서사시에서도 주인공들의 여행 최종 정착지로 언급될 만큼 고대시대부터 유명했던 도시다. 이미 기원전 5-6세기경에 콜키스(Colchis) 왕국의 수도였고, 한 때는 압하지아 왕국, 조지아 왕국의 수도였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는 이메레티(Imereti) 왕국의 수도로 오토만제국의 침공에 대항해서 싸운 거점도시였다. 러시아가 코카서스 지역을 병합한 1810년까지 쿠타이시는 2,000년 넘게 왕국의 수도였던 셈이다.

사령관이 인터넷 평판을 보고 점지한 맛집 식당을 찾아갔다. 시내 중심부를 관통하여 유럽식 자갈포장이 되어있는 좁은 도로를 우당탕탕 한참 지나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오래된 도시답게 길은 좁고 차량은 많아서 주차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길가에 한 자리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낑겨서 주차한 후 약간 걸어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벌써 15:30. 다행히 아직도 꽤 많은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Story식당은 도시를 관통하는 리오니강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평범한 주택들 사이에 있는 식당이지만 이름처럼 음식에 스토리를 담기 위해 노력하는 파인 다이닝(fine dining) 식당인 것 같다. 식당 안 인테리어도 예술적 감각이 엿보였지만, 무엇보다 주문한 음식들이 정말 예술적으로 차려서 나온다. 시장도 했지만 음식을 보는 순간 분위기가 활짝 피어오르게 만드는 정성과 멋이 담긴 차림새다. 푸시킨이 “조지아의 모든 음식은 시(詩)다”라고 읊었는데, 이 집 같으면 그런 칭찬을 들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음식도 맛있어서 남김없이 마이 무겄다. 이게 내가 평할 수 있는 맛 품평의 전부다. 천천히 식사한 후 오후 햇살이 반짝이는 강가를 기웃거리다가 다시 출발했다.

쿠타이시를 지나고 얼마되지 않아 E60 고속도로는 미개통 공사구간으로 연결되어 좁은 산길 국도를 따라 여러 마을을 관통하여 지나간다. 길가 가판대에서 조지아식 간식과 빵을 수북이 쌓아놓고 팔고 있다. 궁굼해서 사먹고 싶은데 뒷 차들이 바짝 따라 붙어서 편하게 벗어나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1시간 이상을 밀려서 달리고 나니 이제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다. 특히 차량 진행방향인 서쪽은 불빛 한 점 없이 캄캄하다. 흑해변 가까이에 다다른 것 같다.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서서 좌회전하여 남쪽으로 향하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오른쪽 차창으로 수평선과 나란히 희미한 저녁놀이 길게 비껴 줄지어 있다. 붉은 색이 아닌 분홍색, 마지막 저녁놀이다. 해안선이 만처럼 휘어져 바라다 보이는 대안에 도시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법 큰 도시의 윤곽이다. 가까이 갈수록 도시의 찬란함이 드러난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빌딩 숲을 만났다. 바투미(Batumi). 조지아 제2의 도시다. 그래봐야 인구 20만 남짓한 도시인데 고층건물의 높이와 디자인이 수려한 풍요로운 도시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잠시 영국이 바투미를 지배하는 동안 홍콩이나 싱가폴같은 자유항구를 건설하려고 했다더니 아직도 그 흔적이 배어있는 도시인가 부다. 바투미를 포함한 아자라(Adjara)지역은 가장 늦게 조지아에 편입된 지역이다. 소련 붕괴 이후 이 지역을 사실상 개인의 봉토처럼 지배하고 있던 독재자 아슬란 아바시드제(Aslan Abashidze)가 2004년 러시아로 탈출하면서 이 땅이 조지아의 영토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자치권이 가장 강한 지역이라고 한다. 물론 아직도 러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두 지역(압하지아와 오스티아)이 남아 있지만...

바닷가 근처의 구도심으로 들어서니 야자수 가로수가 도열한 자갈(cobble stone)길, Rustaveli Avenue가 레저타운의 운치를 더한다. 나는 무슨 호텔을 예약했는지도 모르고 따라가는 길이다. “여기다!”하고 차를 돌리는데 보니 엄청 높은 힐튼호텔이다. “무얼 이렇게 비싼 데를..”하는 생각을 하다가 “아빠 칠순을 맞는 호텔이라고 일부러 좋은 데를 마련했구나” 싶어 내심 기특하다. 결국 돈은 부모들이 내지만 그래도 딸의 효심을 무시하면 섭섭해 하리라. 주차장이 옆 건물에 있어서 한참을 올라가서 로타리에서 돌고 또 돌아서야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우리 렌트카 옆에는 탱크같이 생긴 롤스로이스 빈티지 모델이 주차되어 있다. 나중에 보니 슈퍼카도 여러 대 주차되어 있다. 보통 잘사는 동네가 아니다 싶더니, 역시 바투미시의 별칭이 ‘흑해의 라스베가스’란다. 문득 정선 카지노에서 들었던 얘기가 떠오르며, “혹시 저 차들도 노름빚으로 저당 잡힌 차?”하는 생각이 든다. 방으로 올라가니 여기도 Happy Birthday라고 쓴 조각케익이 하나 준비되어 있다. 게다가 호텔 내 부설식당 아무 곳에서나 와인 3잔을 마실 수 있는 쿠폰도 준비되어 있다. “오~ 역시 힐튼이다!” 우리 딸의 재치로 아빠 칠순생일 팔아서 알뜰하게 혜택을 찾아 먹고 있는 중이다. 호텔방 창문 너머로 구시가지의 늘씬한 건물들이 야간 조명을 받아서 더욱 멋져 보인다. 저녁식사는 늦게 먹은 점심으로 가름하기로 하고, 조각케익으로 두 번째 생일축하 인사 나누고 조금씩 갈라 먹었다. 역시나 힐튼의 이름답게, 방도 욕실도 호사스럽고 넓다. 침대 3개를 놓고도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다. 바쿠에서 바투미까지, 카스피해에서 출발한 여정이 드디어 흑해에 이르렀다. 문득 김광섭(1904-1977) 시인의 옥중일기 구절이 떠올랐다. “자~ 자자. 거침없이 떨어진 자처럼...”. 그렇게 여행 엿새째 날이 지나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