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쟈니(9): 조지아

트빌리시, 위대한 신앙의 도시 그 역사 속으로

by 천산산인

2024년 11월 2일(토): 제9일차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오늘은 여행 중 두 번째 맞는 ‘어슬렁데이’다. 아침 8시쯤 식사하러 내려갔다.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도 르네상스식 궁정 스타일이다. 좋은 호텔의 조식뷔페는 차림새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와인의 나라라서인지 와인은 물론, 얼음통 안에 조지아산 코냑과 ‘차차’ 술병이 담겨져 있다. (‘차차’는 아무 색소도 넣지 않고, 순수 와인만을 증류해서 만든 40도의 투명한 조지아 술이다.) 가운데 자리는 홍콩인들이지 싶은 나이 많은 단체관광객들이 차지하여 왁자지껄하다. 거리공원이 내다보이는 한적한 구석자리에 앉아서 또 한번 풍성한 아침식사를 즐겼다. 물론 와인과 차차 술잔을 부딪치며 “Happy Birthday, Happy Journey!”를 외쳤다. 아침부터 약간 알딸딸해졌다. 너무 외진 자리에서, 너무 많이 먹으니 서빙하는 직원들에게 민망하다. 내일은 좀더 가까운데로 가서 앉아야겠다.

차량 주인이 예정보다 늦게 12시 반경에야 차를 가지러 오기로 했단다. 오전 중 약 3시간정도 우리가 차를 쓸 여유가 생겼다. 서둘러 차를 몰고 트빌리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뒷산 솔로라키 언덕(Sololaki Hill)으로 올라갔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트빌리시는 여기저기 붉은 지붕 위로 교회의 뾰쪽탑이 솟아 있고, 도시 한가운데로 강물이 흐르는 멋진 풍광이다. 어딘가 기시감이 든다. 그렇다. 바로 프라하다. 언덕 위 성비투스(St. Vitus) 대성당에서 내려다보았던 붉은 지붕과 블타바강. 그래 트빌리시가 코카서스의 프라하로구나... 도시 건축의 생김새는 프라하보단 빈약하지만, 제법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과 쿠라 강변의 절벽들은 평탄지형인 프라하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자연적 매력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니 큰 동상이 앞을 가로 막는다. 트빌리시의 랜드마크가 된 Kartlis Deda, 즉 ‘조지아의 어머니’란 조각상이다. 20미터 높이의 은빛 알루미늄으로 만든 조각상으로 전통의상에 모자를 쓰고 왼손은 어깨 높이로 와인 주발을 들고 있고, 오른 손은 팔을 내려서 몸과 직각으로 날을 뉘인 칼을 잡고 서있는 강인한 여인의 모습이다.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당했던 조지아인들의 수난과 저항정신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란다. 왼손의 와인잔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따뜻하게 대접하는 환대의 표시고, 오른 손의 검은 침략자들에게 대항해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투쟁의지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란다. 이 조각은 조지아 조각가인 엘구자 아마슈켈리(Elguja Amashukeli)의 작품으로 1958년 설립 당초에는 트빌리시 정도(定都) 1,500년을 기념하는 나무로 만든 임시 전시물이었으나, 시민들의 반응이 좋아서 1963년에 알루미늄으로 다시 만들었고, 현재의 조각상은 1997년에 새로 교체하여 서있는 것이라고 한다.

조각상을 지나 능선길을 따라 케이블카 종점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바라보는 사방의 경치가 매우 수려했다. 눈 아래 트빌리시 구도심에는 20세기 초반에 지은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 건물들의 붉은 지붕이 군데군데 퍼져있고, 그 사이로 조지아 양식의 원추형 교회첨탑들이 삐죽삐죽 솟아있다. 북쪽 방향으로 펼쳐진 먼 도심에는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다. 그 중 한 건물은 서울 삼성역에 있는 무역센터 건물을 옮겨 왔나 싶게 생김새가 거의 유사하다. 강 건너 맞은 편 언덕으로는 황금빛 돔을 가진 대성당이 웅자를 자랑하고 있고, 그 아래로 대영박물관 건물같이 생긴 돔을 가진 웅장한 건물이 강가에 있다. 더 아래 강줄기가 휘어져 가는 절벽 위에는 고색창연한 교회도 서있다. 도시 중간으론 쿠라강이 뚜렷한 S자를 그리며 흐르고 있다. 그 근처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가 축 늘어진 포물선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산 위 아래를 숨가쁘게 오르내리고 있다. 오른쪽 더 높은 산 위론 일부는 이미 허물어졌지만 남아 있는 구조물만으로도 거대한 성채가 있다. 나리칼라(Narikala)성이다. 그 위로도 날렵한 교회건물, St. Nicholas 성당이 보인다. 성채로 올라가면 더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하던데, 보수공사중이라서 관광객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지 않으니 아쉬웠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숲으로 뒤덮인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그 아래로 검은 색조를 띈 깊고 가파른 계곡이 펼쳐져 있다. 이정표의 화살표가 ‘트빌리시 식물원’ 가는 방향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경인이 저 건너편 황금빛 돔을 가진 큰 교회를 가리키며, 이제 우리가 저 대성당을 찾아갈 것이라고 한다.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서 산 아래로 내려온 후 다리를 건너 도심 동쪽 아르메니아인들의 집단거주 지역이었던 엘리아힐(Elia Hill) 언덕으로 꼬불꼬불 가파른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동네 한복판 저자거리 같아 보이는 허름한 구역에 갑자기 큰 성문이 나타난다. 그 앞에 주차를 하고 철문을 통과하자 눈앞이 확 트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수십개의 계단 위 언덕에 호박색의 웅장한 교회가 우뚝하다. 조지아 말로 ‘사메바(Sameba)’라고 부르는 ‘성삼위일체 대성당(Holy Trinity Cathedral)’은 현재 조지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조지아정교회의 대주교 성당이다. 그러나 그 역사는 불과 20년에 불과한 새 성당이다. 성당 터는 원래 아르메니아 교회와 공동묘지가 있던 땅인데, 독립국 조지아의 정신적 지주가 될 큰 성당을 짓자는 취지하에 1995년에서 2004년 사이에 기업인들과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사메바 성당은 여러 가지 면에서 지난 1,500년동안 조지아정교회의 중심성당이었던 스베티츠코벨리 성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스베티츠코벨리 성당처럼 입구에서 보면 오각형 건물이 세겹으로 겹쳐 보이고, 그 위로 원추형 돔이 솟아 있는 십자가 형태의 전형적인 조지아 양식의 건물이다. 길이 70.4m, 넓이 64.7m로 스베티츠코벨리 성당(57.7m x 27m x 49m)에 비해 훨씬 더 큰 성당이다. 특히 황금빛 돔의 높이가 87.1m로 멀리서 보면 수직형 건물처럼 보인다. 내부(56m x 44m)는 동시에 10,000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큰 규모다. 대성당은 9개의 예배당(chapel)을 갖고 있고, 그 중 5개는 지하 예배당이다. 지하 예배당도 층고가 13.1m로 4층 건물 높이의 트인 공간이기에 지하예배당의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게 설계되었다. 이 성당의 건축학적 특이점은 십자구조의 건물의 교차점에 8개의 높은 기둥으로 떠받쳐진 원형 돔이다. 원형돔은 두쌍의 기둥이 형성하는 4개의 애프스(apse, 파인 공간)와는 구분되어 완벽한 원형으로 올려다 보이고, 12개의 창문 안으로도 또 하나의 동심원이 형성되어 전체적으로 완벽한 대칭미를 보여주고 있다. 높이 솟은 원형돔을 올려다보면 마치 바르셀로나 ‘성가족(Sagrada Familia) 성당’ 내부의 기둥을 올려다 볼 때처럼 신비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성가족성당의 기둥들이 약간씩 기울어서 서로 지탱하면서 묘한 불균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성삼위일체성당의 중앙돔은 완벽한 수직대칭 구조로 안정적인 균형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중앙 제단의 그림도 스베티츠코벨리 성당의 예수상처럼 맨발의 전신좌상이다. 그러나 오른손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위로 펼친 채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제단 앞에는 다채로운 여러 성상들의 성장(聖障, iconostasis)이 병풍처럼 앞을 막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웃어넘길 수 없는 촌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성당이 완공된 후 누군가(애국당의 소행이라고 한다)가 성상 중 하나에 스탈린의 얼굴을 그려서 성장 한가운데에 배치해 놓은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결국 스탈린 성화 위에 푸른 칠을 하여 가려 두었다곤 하지만 이 일은 조지아인들의 잠재의식이 발현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우(杞憂)겠지만 혹시 100년쯤 후 이 성당엔, 조지아의 영웅으로 우상화된 스탈린의 성화가 뭇 성인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혹시 200년 후엔 성당 이름이 ‘성스탈린성당’으로?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인간 역사는 그렇게 수없이 왜곡되고, 변질되고, 재창조되어 왔으니, 도무지 이 놈의 인간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성전 중앙에는 신도들이 가져온 각종 과일, 과자를 담은 비닐봉투를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쌓아 두고 사제가 예배의식을 진행중이다. 웅장한 성당 안에 쓰레기를 쌓아 놓은 것 같이 어색한데도, 촛불을 든 성도들의 표정은 자못 심각하다. 밖으로 나와서 성전 뒤뜰과 부속건물들을 구경하였다. 성삼위일체 대성당은 본당 건물 외에도 별도의 종탑 건물, 교구청, 수도원, 신학교 등이 집적된 넓은 공간이었다. 정원도 정성스레 잘 가꾸어 놓았고, 과일나무처럼 디자인된 가로등도 성당의 분위기와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도 트빌리시 구시가지가 다른 각도에서 훤히 내려다보였다.


시간이 좀 남기에 시내의 까르푸(Carrefour) 슈퍼에 가서 즉석 피자 1판과 간단한 쇼핑을 해서 호텔로 돌아왔다. 지난 6일동안 우리와 동행하며 높은 산과 거친 들판을 힘차게 달리고, 한 구역을 통과할 때마다 “〇〇〇 쿠차(kucha, 거리)”라는 이상한 주문을 외던 네비게이터를 장착한 파란색 마쓰다 SUV(EP-620-PE)를 반납하고 나니 섭섭하다. 차주는 벌써 우리가 범한 교통규칙 및 주차 범칙금 정보를 다 파악해서 왔다. 어딜 가도 부처님 손바닥 같은 세상이다.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차를 넘겼다. 방안에서 방금 사온 피자와 음료수로 요기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시내 구경을 나섰다. 이젠 뚜벅이 관광이다.

호텔에서 나와서 조지아 낭만파 시인 니콜로즈 베라타쉬빌리(Nikoloz Beratashvili, 1817-1845)의 이름을 붙인 다리로 가는 지하통로로 들어섰다. 길거리 벽화(graffiti)가 현란하다. 정면 그림은 고민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해골 모습으로 그리고 위에 “TAKE IT EASY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라는 슬로건을 써놓았다. 길거리 화가의 작품이지만 자본주의 경쟁사회 속에서 피폐해진 현대인들에게 날카로운 철학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트빌리시 거리 예술인들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쿠라(Kura)강을 동쪽으로 건너갔다. 쿠라강은 터키의 소코카서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카스피해로 들어가는 1,515km에 이르는 국제하천이다. 조지아인들은 자기 나라를 흐르는 쿠라강을 음크바리(Mtkvari)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리의 상판은 자동차 전용도로고, 아래 쪽에 보행자 전용도로가 설치되어 있다. 건너는 내내 안쪽 벽엔 그래피타이가 현란하고, 다리 난간에는 ‘청춘’이라는 주제의 연작 조각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조각가 Giorgi Japaridze의 작품으로 키스하는 연인들, 사진사, 자살하는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소녀 등의 청동 조각 작품들이다. 요즘은 저 아래쪽에 새로 지은 ‘평화의 다리’에게 그 낭만적 이미지를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다리는 여전히 ‘사랑의 다리’란 별칭을 갖고 있다. 쿠라강의 강폭은 대략 파리 센강이 생각나게 할 정도다. 한강 폭의 약 1/4정도라고 보면 대략 맞을 것 같다. 그래도 강폭 가득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그 위로 관광객을 태운 보트들이 연신 오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다리가 바로 트빌리시판 ‘미라보 다리’로구나. 15년전 쯤 파리 에펠탑 근처에서 1달 이상 장기 체류한 적이 있었다. 난 저녁마다 센 강변을 따라 산책하면서 특별히 미라보다리를 자주 건너곤 했다. 고등학교 2학년 우리 학급 교실에 붙어있던 프랑스 낭만파 시인 기욤 아뽈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의 시 「미라보다리」를 읊으면서...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제법 낭만적이지 아니한가? 그러나 내가 마주친 어느 파리지앵도 미라보다리만 기억할 뿐 시인도 그의 싯귀도 기억하지 못해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차량 소음 요란하고, 먼지 날리는 쿠라강을 건너던 추억을 떠올리며 27살에 요절한 천재 시인 베르타쉬빌리의 시 「음크바리 강변에서의 사색」의 한 구절을 읊는다.

“슬픔에 휩싸여

강물이 칭얼거리고, 투덜거리는 곳을 따라 거닐었다.

홀로 휴식하며

내 모든 걱정을 잊고 싶었다.

저기 흐르는 물결 옆에서 온전히 근심에 싸여..

그리고 부드러운 잔디에 털썩 주저 앉아

난 쓰라리게 울었다...“

강 전면 언덕 위에 유리 돔과 그리스 신전같은 열주를 가진 웅장한 큰 건물이 있다. 찾아보니 한 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현재는 ‘영빈관(State Palace of Ceremonies)’으로 사용하는 건물인 것 같다. 그냥 대통령 관저로 써도 충분히 호사스러워 보이는데, 새 건물을 마련해서 나갔단 말인데 이게 말이 되는 처산가 싶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통령 관저는 좀 자그마한 옛 시인의 집으로 옮기고, 현재 영빈관은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조성된 Rhike 공원도 엄청난 돈을 들여 트빌리시의 새로운 명소로 조성되었다. 들인 돈만큼 조경은 아름다웠다. 완만한 경사지형을 따라 2016년에 완공된 큰 나팔관같이 생긴 현대식 유리건물 두 동이 건설되어 있다. Rhike 음악당 및 전시관이다. 저명한 이태리 건축가인 Massimiliano와 Doriana Fuksas 부부가 디자인한 초현대식 건물이다. 그러나 완공한지 10년이 다 되어 가도록 거의 활용되고 있지 않아서 예산낭비의 전형적인 사례로 비판받고 있다고 한다. 건축학적으로는 초현대식 작품이고, 너무 멋진 외양의 건물들인데 이제는 관광객들이 먼 발치에서 사진 찍는 포토존으로만 활용되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도 문이 닫겨 있었고, 군데군데 녹슨 자국이 역력하여 버려진 건물 같은 황량함이 느껴졌다. 2016년에 가 본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 인구 40만명이 채 안되는 빌바오에 있는 거창한 구겐하임미술관은 잘만 운영되고 있던데, 도시인구 125만명의 수도에 있는 문화공간이 어떻게 이렇게 버려진 건물이 되었을까 의아했다. 인구 400만명, 1인당 경상소득 8,800불(2024년) 정도의 약소국이 감당할 수 있는 예산 범위를 넘어서는 전형적인 ‘하얀 코끼리(white elephant)’ 사업, 정치인들의 허영이 빚어 낸 과시행정의 산물인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그런데 참 고약하다. 관광하러 온 작자가 “예쁘다!”하고 사진만 찍고 가면 될 것이지, 현장에서 웬 남의 나라 살림 걱정까지 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다. 나이 들어도 배운 도둑질은 속이지 못하는가부다. 언덕과 맞닿은 넓은 터에는 큰 분수대(Faggton Fountain)가 연신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밤이면 조명과 음악이 어울려 무지개빛 세상을 연출한다고 한다.


분수대에서 서쪽으로 난 일직선 길 끝에 매끄러운 유선형 유리덮개를 한 다리가 보인다. 2010년 개통 이래 트빌리시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평화의 다리’다. 길이 150m의 보행자 전용다리로 철근골조 다리 위에 알루미늄과 푸른색 유리로 덮개가 설치되어 멀리서 보면 푸른 용이 쿠라강 위에서 요동치는 것 같아 보인다. 이 다리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여 두 지구의 단결과 조화, 과거와 미래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평화의 다리’라고 명명되었다. 다리는 강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훨씬 넓은 각도를 확보하도록 쿠라강의 곡류 지점에 건설되었다. 남서쪽으로는 트빌리시의 전통적 상징물들인 메테키(Metekhi) 교회와 나리칼라(Narikala) 요새 그리고 그 뒷 배경인 솔라라키(Solalaki) 언덕과 산이 보이고, 북동 쪽으로는 방금 건너 온 Baratashvili 다리와 영빈관 그리고 꽃잎 모양의 빌딩인 ‘정의의 집(House of Justice)’이 바라다 보인다. 평화의 다리는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예술작품이다. 그 건설과 운영도 국제적이다. 이태리 건축가인 Michele de Lucchi가 설계/시공했는데 다리 구조물을 이태리에서 만들어서 바투미 항구로 들여 온 후, 200대의 트럭으로 트빌리시까지 옮겼다고 한다. 조명도 프랑스의 전문가에 의해 설계되어, 수천개의 LED 전광판을 수입하여 현장에서 조립했고 아직까지도 프랑스 기업이 운영한다고 한다. 해질 무렵부터 동 틀 때까지 4개의 다른 프로그램이 다리를 조명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인기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구도심의 분위기와 너무 상이한 건축물이라서 도시의 고즈넉한 경관을 해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다리는 밤뿐 아니라 낮에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도 폭 5m의 다리에 가득한 사람들 틈새에서 겨우 몇장의 사진을 찍고 다리를 벗어났다. 밤에 오면 훨씬 더 멋있다고 하던데, 낮동안에 녹초가 되는 늙은이들에겐 야간관광은 언감생심이다. 결국 가장 화려하다는 야간조명 포인트는 바쿠, 바투미에 이어 이 곳 트빌리시에서도 또 못보고 말았다.

‘평화의 다리’를 건너 다시 구도심으로 들어섰다. 멋진 벽화와 니노의 십자가의 유적으로 유명한 ‘트빌리시 시온성모영면교회(Sioni/Zion Cathedral of the Dormition of Tbilisi)’는 불과 5분 이내 거리에 있었다. 이 교회는 5세기 트빌리시가 수도로 건설되면서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으나, 그동안 외적들의 침입 및 지진에 의해서 여러 번 파괴되고 재건축하는 과정이 되풀이 되었다. 현재의 성당은 13세기의 건물을 바탕으로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보강된 것이라고 한다. 성당의 모습은 전형적인 조지아 양식으로 원추형 돔(cupola)를 갖고 있지만 둥근 돔을 받치는 하부구조(tholobate)가 유달리 길고 16개의 정교한 장식으로 치장된 긴 창문을 갖고 있어서 외형적으로도 늘씬해 보일 뿐 아니라, 실내의 채광도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이 성당은 2004년 ‘성삼위일체대성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조지아정교회의 중심성당이었다고 한다. 토요일 저녁 미사시간이라서인지 자그마한 교회에는 예배를 드리러 온 신자들로 가득했다. 여성들은 스카프로 머리칼을 숨기고 손을 모으고, 모두들 경건한 표정이라서 호기심 어린 동양인 관광객이 헤집고 다니며 구경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무슨 특별한 축일인지 카톨릭 추기경처럼 진홍색 복장(soutane) 차림의 사제들 10여명이 미사에 참석하여 기도송을 선창하고, 청중이 따라하니 그 분위기가 더욱 엄숙하였다. 그동안 가 본 조지아의 어느 교회보다 살아 있는 성당인 것 같다. 회중들 틈새로 기웃거리며 바라 본 성당은 소문대로 금빛 바탕 위에 중세풍의 특이한 그림이 벽면, 그리고 천정까지도 가득했다. 성당의 그림들은 중세시대의 그림과 1850년대 러시아의 장군이자 화가인 Knyaz Grigory Gagarin이 그린 연작 성화, 1980년대 조지아 화가인 Levan Tsutskiridze가 그린 벽화까지 뒤섞여 있는 일종의 성화 박물관이었다. 살짝 카메라를 켜고 동영상으로 실내를 촬영하다가 스스로 무안하여 10여초만에 중단하였다. 사람들 틈새에 끼어 부대끼는 것을 질색하는 사령관 동지는 진작부터 밖으로 나와서 벤치에 호젓하게 앉아 있었다.

다시 남동쪽으로 강변길을 향해 걸어갔다. 바라만보아도 관광명소일 것 같은 넓은 광장이 나온다. 트빌리시 최초 설립자의 이름을 붙인 ‘바크탕 고르가살리 광장(Vakhtang Gorgasali Square)’이다. 멋진 장식을 한 중세풍의 마차들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 언덕 위 아르누보 양식의 빨강 지붕 집들엔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고, 그 바로 뒷산이 나리칼라요새다. 이 곳이 트빌리시에서 제일 오래된 동네다. 광장 뒤편이 트빌리시의 연원이 된 Chreli Abano 유황온천이 있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베리아(Iberia)왕국의 32대왕인 Vakhtang Gorgasali(재위 447/49-502/22) 왕이 꿩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도망치던 꿩과 추격하던 매가 둘 다 유황온천에 빠져 죽자 왕이 므츠헤타에서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이 도시를 ‘따뜻한 장소’, 즉 ‘트플르시’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곳의 유황온천은 역사상 많은 유명인사들이 찾아 온 곳이다. 19세기 초에는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이 머물고 갔기에 그의 이름을 딴 욕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촉박한 일정상 그 유명한 트빌리시의 유황온천도 체험하지 못했다.


광장을 건너가자 지하도 입구에 “Meidan Bazaar, Historical Shopping Center”란 현판이 걸려 있다. 오래된 지하상가로 들어가니 제법 긴 지하통로에 각종 기념품과 그림, 골동품, 와인 등을 전시해 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위해 그저 허접한 소품 기념품만 파는 곳이 아니다. 상당히 수준 있는 예술작품과 오래된 골동품들이 바닥에서 천정 위에까지 대롱대롱 진열되어 있었다. 박물관을 걷듯이 천천히 걸어가면서 감상할만한 물건들이고, 와이너리(포도주 저장고) 같이 둥근 지붕을 가진 분위기 있는 지하통로다. 이 일대는 중세시대부터 코카서스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시장으로 실크로드를 거쳐 온 동방의 상인들과 인도-페르시아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머물고 거래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1672년 이 곳을 여행했던 프랑스 여행가 겸 보석상인 장 샤르댕(Jean Chardin, 1643-1713)은 그의 여행기에서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여기처럼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당신은 여기서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유태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타타르인, 모스크바인 그리고 유럽인들을 만날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문득 강릉 월화거리의 남대천 철교와 이제 사용하지 않는 동해선 철도터널을 트빌리시의 평화의 다리와 메이단 지하상가를 결합시킨 개념으로 조성하면 국제적인 명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하상가를 지나서 지상으로 나오자 바로 앞에 쿠라강이 흐른다. 뒷 산 너머로 숨어버린 햇님 덕에 일대의 풍광이 순한 색조를 띄었다. 마치 원색의 파스텔톤에서 담채색의 수채화로 변질된 것처럼... 쿠라강은 이 부분에서 가장 뚜렷하게 굴곡을 그리며 흘러가고 있다. 장구한 세월동안 거세진 물살에 깎인 강 건너 대안이 가파른 단애를 형성하고 있고, 한 뼘의 강변 경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절벽 끝 지점까지 집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곡류의 꼭지점 언덕 위에 오래된 교회, 메테키(Metekhi) 성당이 우뚝하다. 내륙도시인데도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날개깃이 짧은 갈매기들이 강 위를 선회하고 있다. 벌써 해질 녘이 가까워졌다. 다리 위는 사진을 찍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우리도 찍어 주고, 찍히고 하면서 관광지의 즐거운 분위기에 동참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다리는 결코 희희낙락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처참한 순교 현장, 거룩한 성소다. 조지아는 1008년 국왕 바그라티 3세(960-1014)에 의해 통일왕조가 수립되면서 소위 ‘조지아 황금기’의 서장을 연다. 특히 데이비드 4세(재위, 1089-1125) 재위 중 막강한 셀주크터키의 침공을 물리치고, 이후 몇 대에 걸친 왕들의 시기에 문화적 중흥기를 맞게 된다. 조지아의 황금기는 최초의 여왕인 타마르(Tamar, 재위 1184-1213)대에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1223년 타마르여왕의 딸인 루수단(Rusudan, 재위 1223-1245)이 집권하면서 황금기는 막을 내리고, 고난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엄마와 달리 여왕은 무능하고 방탕했다. 사치를 즐기고, 이웃 동맹국 출신 왕자인 남편을 유폐 시킨 후 문란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궁정질서 및 국가기강을 흐려놓기 시작하였다. 한 여인이 저지른 국정농단의 대가는 컸다. 1225년 가을 당시 중앙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대제국 호라즘(Khwarazm) 왕국의 패잔병들이 징기스칸의 몽골군에 쫓겨 조지아를 침공한다. 새롭게 호라즘 샤(Shah, 황제)로 등극한 Jalal al-Din Mingburnu(재위 1220-1231)는 조지아의 주력 부대를 대파하고, 이듬해 수도 트빌리시를 봉쇄한다. 조지아군은 성채에서 옹성작전을 펼치지만 성안에 거주하던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이 밤에 성문을 열어주면서 트빌리시는 쉽게 함락된다. 루수단여왕은 이미 쿠타이시로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극단적 이슬람주의자인 잘랄 알딘은 징기스칸에게 당한 패배를 조지아 국민들에게 분풀이한다. 모든 트빌리시 시민들을 메테키 다리로 소집한 후 ‘시온성모영면교회’에서 떼어 온 성상을 다리 바닥에 깔아놓고, 이것을 밟고 지나가는 자는 살려주고, 밟지 않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학살하여 쿠라강으로 던진다. 실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다리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가 학살당한 순교자만 자그마치 10만명이다. 후일 기록된 『조지아 100년 연대기』는 “문자는 적군이 저지른 파괴행위를 전달하기엔 힘이 없다(Words are powerless to convey the destruction...)”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참혹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고, 수만개의 잘린 머리가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고, 거기서 나온 피로 인해 쿠라강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227년 호라즘 군대가 아르메니아 침공에 실패한 틈에 조지아는 트빌리시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지만, 호라즘군대가 돌아오자 이번에는 스스로 트빌리시를 불질러 버리고 도망친다. 1228년 루수단은 셀주크터키와 손잡고 호라즘군과 맞서나, 동맹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대패 당한다. 1235년 몽골군이 조지아에 도달하자 루수단은 무조건 항복하고, 이후 100년 이상 조지아는 몽골제국 및 후속제국인 일칸국-킵차크칸국의 속국으로 과중한 공물을 바쳐야 했고, 몽골의 페르시아-중동 원정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징발되어 전장터에서 산화되는 압제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조지아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다시는 통일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그리스-동로마제국 등 서유럽 문명과의 접촉이 단절된 채 주변 강대국(오스만터키, 페르시아, 러시아)의 침공 속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는 약소국으로 남게 된다. 매년 11월 13일, 이 다리 위에서 ‘10만명의 성인’을 애도하는 거국적 추모미사를 거행한다. 불과 열흘 후면 그 가슴 아팠던 역사적 아픔을 회고하면서 온 조지아가 다시 한 번 슬픔에 잠길지니, 오늘 이 자리에서는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할 수 없다.


다리를 건너 가파른 계단을 올라 교회로 향했다. 저녁 미사에 참석하는 성도들,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는 관광객들이 마주치면서 안 그래도 좁은 계단은 거의 서울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처럼 혼잡하다. ‘메테키 성모 탄생교회(Metekhi Church of the Nativity of the Mother of God)’는 천년동안 강가 언덕 위 비바람에 노출되어선지 유달리 검게 퇴색된 교회다. 전설에 따르면 이 교회는 트빌리시로 천도한 Vakhtang Gorgasali왕 시절 궁전 부속교회로 건립되었다고 하나, 역사적 기록이나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건축학적 특색으로 볼 때 10세기 이전 양식이 남아 있고, 역사책에 1195년 이란 북동부의 이슬람군대를 정벌하기 위한 샴코르(Shamkor) 전투에 자기 남편을 사령관으로 떠나보낸 타마르(Tamar) 여왕(재위가간, 1184-1213)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교회다. 요즘 남아 있는 건물 대부분은 몽골 침입기 이후인 1278년부터 1289년 사이에 건립되었고, 남쪽 문에 새겨진 글씨에는 1748년 에레클(Erekle, 혹은 헤라클레스) 2세(재위 1762-1798)가 터키의 침입을 물리치고 교회를 중건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트빌리시 구도시를 굽어보는 강언덕에 놓여 있는 범상치 않은 입지로 볼 때 메테키성당은 훨씬 오래 전부터 트빌리시와 역사를 함께 한 상징적인 교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만큼 시련도 많았던 교회다. 이슬람 세력이 침공할 때마다 메테키성당은 어김없이 파괴되었다. 1658년에는 수도원이 폐쇄되고 화약고로 사용되었고, 러시아제국 시절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소비에트 시절인 1921년에는 소 연방 비밀경찰국(NKVD) 소속 시설로 정치범 처형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는 국립박물관 수장고로 사용되고, 일부 공간은 극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에야 예배장소로 복구되었단다. 성당은 밤 미사 시간이라선지 스카프를 쓰고 촛불을 들고 계신 예배객들로 내부 공기가 매캐하고, 그만큼 경건함이 가득하였다. 내부조명이 어두컴컴하여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교회 구경을 하기도 민망한 분위기였다. 많은 성화(icon)가 있지만 ‘10만명의 순교자’ 성화가 가장 유명하다고 하던데 어디쯤 있는지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밖으로 나왔다. 교회 아래 조성된 공터에 말 위에 올라탄 늠름한 장군상이 보인다. 트빌리시의 창건자, Vakhtang Gorgasali왕의 조각상이다. 아직 달도 떠오르지 않아서 이제 사위는 어두컴컴하다. 도시의 조명만이 주위를 밝히고 있다. 이 시간 트빌리시는 온통 검은 색 바탕의 황토 빛으로 물들어 있다. 오래된 교회들, 다리, 산위 성채까지 나트륨등의 간접조명이 비추면서 아래는 붉고 위는 자연스럽게 어둠 속으로 합류해 들어가는 모습이 천년고도의 애잔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검고 푸른 밤. 신도시 고층건물의 불빛을 외면하고, 구도심 넘어 솔로라키 언덕과 허물어진 나리칼라성. 슬픈 역사의 현장을 내려다보고 계신 바크탕 고르가살리 대왕이 새삼 늠름하다기 보다 처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로등 불빛 반짝이는 쿠라강은 조지아의 슬픈 역사를 담고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다. 성전 아래 강가에 지어진 부속 건물 정원에서 집전을 마친 수도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담을 나누는 모습이 너무 화평스러워서 슬그머니 부아가 치올랐다.

성에서 내려와서 다시 ‘메테키 다리’와 ‘메이단 바자’를 지나서 오던 방향을 그대로 되짚어 구도심으로 향했다. 이제 석양도 사라지고 달도 뜨기 전의 검푸른 하늘 아래로 주변 산들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늘빛이 가장 깊고 검푸르게 찍힌다는 골든 아워(golden hour)다, 나리칼라성의 네모반듯한 윤곽이 앞산 능선의 부드러운 곡선에 얹혀서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구도심으로 가는 길은 낮에 지나올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언제 이렇게 은은한 조명 속에 우아한 레스토랑, 카페가 있었나 싶다. 바닥도 자갈로 포장한 길이라서 고전적 분위기가 훨씬 살아난다. 가로공원 길, 마름모꼴 좌대 위에 목이 긴 여인의 흉상이 서있다. 간접 조명을 받아 납량(納涼) 특집의 여자귀신처럼 음산하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소비에트 연방 시절 사회주의권에서 유명했던 여배우 Sofiko Chiaureli(1937-2008)의 조각상이었다. 머리에 화관을 쓴, 이목구비가 수려한 여인은 오늘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생전에 출연했던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을 표현한 조각상에 둘러싸여, 그녀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새삼 조지아의 예술적 감각과 수준 높은 조각작품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고대부터 그리스-로마와 접촉했던 그 문화적 유전자가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것 같단 생각을 해보았다.

이제 골목길로 들어서서 숙소 방향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천사시계탑’이 보인다. 좁은 골목에 수백명의 관광객들이 손에손에 사진기를 꺼내들고 어두컴컴한 시계탑을 바라보고 있다. 8시까진 시간이 약간 남기에 벽화가 뚜렷한 옆 교회 (Anchiskhati Basilica) 건물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와~하는 함성이 들린다. 천사가 정시에 나오는게 아니고, 미리 나와서 정시에 들어가는 시계였다. 서둘러 계단을 올라오니 길거리엔 벌써 관광객들이 가득해서 시계탑은 아련하고, 천사는 다시 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래 엎드리면 코 닿는 곳이니, 우린 내일 환한 낮에 다시 와서 보면 된다. 화려한 조명의 로비에서 사진을 찍고, 호텔방으로 돌아와서 남겨둔 조각 음식으로 간단히 요기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시내 구경이지만 녹초가 될 만큼 천년고도 트빌리시를 휘젓고 다닌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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