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쟈니(10): 조지아

트빌리시, 그 격동의 현대사 속으로

by 천산산인

2024년 11월 3일(일): 제10일차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 예레반으로)

오늘은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이동하는 날이다. 저녁 7시 비행 편. 낮 동안 트빌리시 시내를 어슬렁거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걸핏하면 건너뛰고, 하루 1끼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여정이니, 우리 일행에게 아침식사는 매우 소중한 의식이다. 게걸스레 너무 많이 먹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오늘은 식당 중앙 자리로 갔다. 다행히 창문 너머 길거리 조각작품들이 보이는 오목히 파인 공간의 창가자리가 비어 있었다. 프로 여행자답게 천천히 여러 음식으로 충분히 포식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다지 않는다고 했는데 조지아는 술 인심이 후하다. 오늘도 ‘차차’를 한잔씩 들이켰다. 아침부터 알딸딸하다. 아내가 식사 중에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빙글빙글 웃으며 비밀공간을 다녀왔노라고 한다. 이 호텔의 로비 화장실은 달리 표시가 없이 한쪽면 벽을 열고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호텔직원의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는 구조다. 나도 재미삼아 다녀왔다. 벽 안쪽으로 화려한 대리석 화장실이 감쪽같이 숨겨져 있었다. 해리포터 소설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가는 가상공간, 킹스 크로스역 ‘9와 3/4 승강장’을 연상시키는 신비주의적 발상이다. 여러모로 대단한 호텔이다. 방으로 올라와서 침대에 누워 한숨 더 잤다. 호텔 수영장엘 다녀오라고 채근하는데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다. 11시에 일어나서 호텔 체크아웃하고, 짐을 보관시켰다. 홀가분해진 나들이 차림으로 밖으로 나섰다.

하늘은 푸르나 바람이 서늘한 전형적인 늦가을 날씨다. 12시 타종하는 천사시계를 보러가기 위해선 시간을 땜질해야 했다. 서늘한 일요일 오전이라선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베라카시빌리 다리를 어슬렁거리며 구도심의 먼 경관들과 남산 중턱의 유적들을 올려다보고, 쿠라 강의 푸른 물결을 굽어보았다. 갑자기 지하도 안에 고음의 바이올린 연주곡이 정적을 깨뜨렸다. 자그만 체구의 젊은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곡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의 연주가 이랬을까 싶게 빠른 템포에 음계를 뛰어넘는 현란한 테크닉이 바이올린 위에서 춤추고 있다. 내 비록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저 분이야말로 진정한 명장, 비르투오소(virtuoso)로다. 트빌리시 지하도에서 예림(藝林)의 숨은 고수를 만났다는 흥분감에 진짜로 저 분이 연주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푼돈이라도 드리고 가야지 않을까하고 뒤돌아보는데 아내가 지긋이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호텔 옆 골목길에 진열된 조각상들을 찬찬히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슬람 전사, 화승총을 든 군인, 우체부, 중세 기사, 코메디언 등 실물 크기의 청동 조각상들이 생생한 표정으로 서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조지아의 빈센트 반 고흐라고 부를 수 있는 국민화가 Niko Pirosmani (1862-1918)가 1909년에 그린 그림 ‘수위(Janitor)’를 조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퇴역군인 차림의 제복을 입은 턱수염 가득한 노인이 지긋히 눈을 감은 채 지팡이에 의지하여 서 있는 조각상이다. 원본 그림에는 괴팍스럽게 보이는 형형한 눈빛의 노인이었는데, 조각상은 훨씬 순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온갖 세상 풍파를 다 겪고 이젠 기쁨도 사랑도, 분노마저도 사라진 무표정한 노인의 얼굴. 오래된 산사의 바위에 새겨진 암하노불(岩下老佛) 같은 표정이다. 작품 속에서 문득 늙어가는 나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다.

이제 12시가 가까워진다. 어디서들 왔는지 골목골목에서 나타난 관광객들이 손에손에 핸드폰을 꺼내들고 벌써 ‘천사시계’ 앞에 꽤 많이 모여 있다. 호기심어린 온 세상의 말소리들이 재잘재잘 골목길을 가득 메웠다. 우리도 오래된 음수대 앞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이윽고, 시계탑 맨 상단 문이 조용히 열렸다. 순간 골목에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의 휴대폰 카메라가 시계탑을 향하고 있다. 날개달린 천사가 미끌어지듯 스르르 앞으로 나와서 아주 천천히 오른쪽으로 90도를 틀어서 종을 마주했다. 그리곤 손에 든 자그만 망치를 들어 올려 약 4초 간격으로 느리게 타종을 한다. 쨍그렁~ 쨍그렁~ 쇠 부딪치는 소리가 짧게 열두번 울렸다. 이어서 차임벨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더니 시계 아래쪽 포도밭 농가에서 일하는 농부가 그려진 창문이 열리고, 행복한 조지아인들의 모습을 구현한 인형들이 천천히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약 2분 후, 아래쪽 창문이 닫기자 천사가 다시 오른쪽으로 90도 돌아서 날개달린 우아한 뒷모습을 보이며 창문 안으로 미끌어져 들어간다. 누군가가 박수를 치자, 수백명으로 늘어난 관광객 모두가 따라서 박수를 친다. 골목길이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그리고 모두들 천사의 축복을 받은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흩어졌다. 천사시계탑은 불균형의 미학이다. 5단으로 된 종탑은 각 단이 모두 다른 형태로 제멋대로 얹어 놓아서 삐걱삐걱 비틀어진 모양새다. 한쪽으로 미끌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듯 철근 빔이 비스듬히 기우는 면을 지탱하고 있다. 지붕엔 쑥대처럼 자란 잡초가 삐죽삐죽 솟아있고, 심지어 낡은 시계판에도 굵은 금이 가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일부러 연출된 작품이다. 시계탑은 오래되지도 않았고, 쉽게 허물어지지도 않을 건물이다. 조지아의 저명한 예술가인 Rezo Gabriadze(1936-2021)가 설립한 인형극 극장의 부속건물로 2010년에 ‘새로 지은 오래된’ 건축물이다. 만들자마자 천사시계탑은 트빌리시의 명물이 되었다. 600년 된 프라하 광장의 정교한 천문시계탑과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천사시계탑은 행복한 추억을 담아가려는 전세계 관광객들의 로망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예술작품을 담고 있는 골목길은 트빌리시의 낭만가도다. 그래서 그 이름도 조지아가 자랑하는 12세기말 시인 ‘요한 샤브텔리(Ioane Shavteli)의 길’로 명명되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구도심을 거닐었다. 보전지역이라서인지 오래된 낡은 건물들엔 노인과 고양이만 사는 것 같다. 여기도 붉은 벽돌 위로, 담쟁이넝쿨 사이로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공공기관에서 그려준 생뚱맞은 벽화와는 다르게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고 주변 풍광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우리나라 근대유산 골목벽화가 덕지덕지 화장한 늙은 퇴기(退妓)의 얼굴이라면, 트빌리시 골목의 벽화는 주름진 시골마을의 할머니 얼굴을 보듯 훨씬 자연스럽다. 기웃거리며 골목길을 지나오자 큰 길, 알렉산더 푸시킨 도로가 나오고,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건립된 5개의 망루가 있는 110미터 길이의 성벽이 발굴된 성터가 보행자 통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성벽이 땅 밑으로 꺼져 버리는지, 문득 홍난파 작곡의 가곡 『옛 동산에 올라』 속의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다”란 노산 이은상 시인의 가사가 떠오른다. 새삼 트빌리시의 유구한 역사를 느껴본다.

언덕길 위로 6개의 도로가 합류하는 큰 광장이 있다. 흔히 트빌리시의 중심으로 지칭되는 ‘자유광장(Liberty Square)’이다. 광장 남쪽으로 뾰쪽탑을 가진 무어양식의 기품있는 3층 벽돌건물이 있다. 한 때 시청이었으나 요즘은 시 의회청사로 쓰고 있는 건물이다. 광장의 중심에는 40m 높이의 탑 위에 성 조지가 말 위에서 사악한 용을 긴 창으로 찌르는 성화 속의 유명한 장면이 금빛 조각상으로 건립되어 있다. 이 광장도 조지아의 근대 역사를 방증하듯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다. 처음 조성되었을 때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당시 이름 Erivan)을 정복한 제정 러시아 장군의 이름을 붙여서 ‘Paskevich-Erivan 광장’으로 불렸었다. 그 후 조지아 출신으로 스탈린 수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베리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Beria 광장’으로 개명되었다. 1953년 베리아가 숙청된 후에는 ‘레닌광장’으로 개명되고 1956년 레닌의 동상을 건립하였다가, 1991년 독립 전야에 레닌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자유광장’으로 명명하였다. 현재의 ‘성조지 기념탑’은 2006년 건립된 것이란다. 반면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의 흉상은 아직도 광장 한 구석 분수대 앞에 보전되어 있다. 여기서도 히포크라테스의 “Vita brevis est, ars linga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란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트빌리시엔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자취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푸시킨광장, 푸시킨로, 그리고 유황온천에 가면 ‘푸시킨의 방’도 남아 있단다. 그가 조지아에서 오래 체류했던 것도 아니다. 잠시 딱 두 번 방문했을 뿐이다. 그는 「러시아-터키 전쟁(1828-1829)」 중 러시아가 정복한 조지아, 아르메니아와 동부 터키의 Arzrum(오늘날의 Erzurum)를 방문한 직후인 1829년 『아즈룸으로의 여행(Trip to Arzrum)』이란 수필집에서 약 2주간 체류했던 조지아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와 말은 러시아 지배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이들을 도닥이는 위로의 말로 아직까지도 조지아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 또한 사대주의, 식민주의적 발상이지만 워낙 유명한 대문호의 호평(好評)이다 보니 조지아인들은 이를 대단한 영광으로 여긴다. 마치 1929년 한국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한번 다녀가지도 않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Ravindranath Tagore, 1861-1941)가 도쿄에 머무는 동안 그를 찾아 온 동아일보 기자에게 “한국은 동방의 등불”이라고 써준 4줄 메모가 일본 식민지배 기간 내내, 그리고 해방 이후의 곤경을 겪는 우리 민족에게 큰 위로가 되었듯이... 그리고 보니 나도 암울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책 한 귀퉁이에 써놓고 읊던 푸시킨의 시 「왜 슬퍼하는가?」가 생각난다. 그리고 오늘 이 곳 트빌리시의 푸시킨로에 서서 그 시를 읊조리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서러워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나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마음은 미래를 꿈꾸나니

모든 슬픔은 하염없이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


광장을 건너 북서쪽 방향으로 난 큰 길 Shota Rustaveli Avenue를 따라 걸었다. 트빌리시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거리, 트빌리시판 샹젤리제 거리다. 어느새 낙엽이 보도를 덮고 있다. 벌써 바삭해진 낙엽을 밟으며 걷노라니 가을 기분이 물씬 느껴진다. 갑자기 서늘해진 날씨에 두터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행인들이 으스스한 모습으로 가로길을 걷고 있다. 대로변에 현대식 유리 건물인 Galleria 백화점이 있다. 뻥 뚫린 내부엔 에스컬레이터가 부지런히 위아래로 고객들을 실어 나르고, 샹들리에가 휘황찬란한, 세계 어느 도시에 내놓아도 초라하지 않을 만큼 크고 화려한 백화점이다. 아내와 딸은 백화점을 구경하고, 나는 국립박물관 관람을 한 후 1시간 후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대로변 계단 위쪽으로 파르테논 신전처럼 높은 열주의 정면 아케이드가 있는 웅장한 황갈색 석조건물이 있다. 국회의사당이다. 역시 일국의 국회의사당이니 그 위용이 당당하다. 알고 보니 소비에트연방 시절인 1933년에서 1953년 사이에 조지아공화국의 정부청사로 지어졌다고 한다.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이 고향땅에 지어준 통 큰 선물로 소련 전체에서 10대 건물중 하나로 꼽혔었다고 한다. 건물 정면에 돌 액자 안에 다시 큰 돌이 안치된 이상한 조각품이 있다. 1989년 4월 9일 소련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벌인 시민집회에서 단식항거에 참여했던 19명의 애국열사가 소련군에 의해서 사살된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조각물이다. 이후에도 이 장소는 격변기 조지아 정치 소용돌이의 구심점이 되었다. 조지아의 독립과정은 다른 소련연방국가 중에서도 유달리 험난했고, 그 여파는 아직까지도 조지아에 짙게 새겨져 있다. 조지아는 1991년 우여곡절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그 해 5월 초대 대통령으로 독립투쟁가였던 Zviad Gamsakhurdia(1939-1993)가 선출되면서 이 건물은 대통령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불과 7개월 후인 그 해 12월 22일 군사혁명이 발발하였고 감사쿠르디아 대통령은 1월 6일까지 이 건물 지하 벙커에서 저항하다가 국외로 탈출한다. 그 와중에 이 건물은 벌집이 되었고, 수년동안의 복구공사를 거쳐 다음 정권에서 국회의사당으로 개조되었다. 2003년에는 당시 대통령 Eduard Shevardnadze(1928-2014)를 축출하는 ‘장미혁명(Rose Revolution)’의 진원지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포연과 함성,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장소였건만, 오늘은 청명한 가을날을 맞아 아이들과 나들이 나선 조지아인들이 분수대 앞에서 함박웃음으로 가족사진을 찍는 화평한 일요일 아침이다.

길 건너 국회의사당을 마주보는 위치에 네오 바로크(Neo-Baroque) 양식의 웅장한 건물 두동이 있다. 돔이 있는 더 큰 건물이 1920년에 ‘영광의 신전’으로 건립되었다가 현재는 국립미술관으로 쓰고 있는 것이고, 오른쪽의 작은 건물이 Simon Janashia Museum of Georgia, 조지아 국립박물관이다. 무얼 크게 볼 것이 있으랴 싶은데 30라리(Lari), 약 9달러에 해당하는 제법 비싼 입장료를 받는다. 전시관은 시대별로 배열되어 있었다. 들어오는 입구 정면에 석기시대의 유물과 인간의 유골들이 전시되어 있다. 수천년 전 이 세상을 떠나신 수십기 조상님들의 해골들이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듯 퀭한 모습으로 진열대 위에 올라앉아 수천년 후의 후손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역사시대관으로 향하자 인상적으로 큰 토기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조선백자 달항아리 모양새의 둥근 토기인데 높이가 거의 2m에 달하는 기원전 300년경에 만든 거대한 토기다. 동물들과 사냥하는 사람의 모습들이 암각화처럼 단순한 터치로 그려져 있으나 매우 역동적인 움직임을 그려 내고 있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으니 거창한 유물들을 기대했으나, 내부에 진열된 유물들은 의외로 소품들이 대부분이다. 주로 조지아 서쪽을 지배했던 고대왕국인 콜키스(Colchis)왕국과 동쪽을 지배했던 카르틀리 왕국(Kartli, 이베리아왕국이라고도 부름)의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후 5-6세기까지의 무덤에서 발굴된 부장품들이라선지 자그마한 공예품들이다. 그러나 금세공 기술은 매우 뛰어나서 아주 정교하게 문양과 인물을 새겨 넣은 것들이다. 장신구는 21세기의 여인들이 착용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그 디자인과 정교함이 우아하다. 그 중 일부는 로마제국의 유물들이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얼굴이 새겨진 자그마한 목걸이 구리 장식도 있다. 쿠타이시의 동물상 분수대에서 두 필의 황금말을 본 사람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이곳에 전시된 실물은 손톱 반만한 크기의 귀걸이 장식이다. 그러나 이 장식용 말을 수백배 크기로 확대하여 큰 분수대의 상징 조각으로 사용한 예술가의 아이디어가 기발나다. 우리나라 해태 조각상과 견줄만한 돌로 만든 원숭이와 말 머리 조각상의 익살맞은 표정이 오랜 세월을 건너 뛰어 오늘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3층 기획전시실에 재미있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란의 마지막 봉건왕조인 콰자르(Qajar)왕조(1789-1925)의 유화들이다. 전시된 작품의 대종은 발끝부터 머리까지 온몸을 보석으로 장식한 콰자르 공주와 왕자들의 초상화들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거나, 칼을 찬 전투복 차림의 군왕(Shah)의 초상화와 무희, 비파를 연주하는 악공의 모습도 있다. 서양의 그림과는 다르지만 궁정의 화려함과 풍습을 엿볼 수 있는 귀한 그림들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색 바탕 위에 짙은 농도의 색조로 여러 번 덧칠하여 인물을 그려내었기에 인물들의 피부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모든 인물들이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의 자화상처럼 짙은 두 눈썹이 미간 위에 붙어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모든 인물화가 화려한 보석장식 옷으로 몸 전체를 두르고 있으나, 딱 한 점의 그림은 신화속의 인물인지 상체를 벗고 단검을 치켜든 채 순수한 눈망울의 사슴을 내리치려고 하는 섬뜩한 여인의 모습이다. 돌출된 젖꼭지를 화폭 정중앙에 배치하여 보는 이의 시각을 끌어당기고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독특한 그림이다. 보수적인 이슬람 왕조에서 그린 그림치고는 매우 특이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콰자르왕조라면 1795년 조지아를 침공하여 쑥대밭으로 만든 바로 그 왕조가 아닌가? 민족의 원수들의 그림이니 쳐다보기도 싫을텐데 국립박물관에서 특별전시를 하고 있으니 조지아인들의 마음이 너그러운겐지, 예술과 역사를 구분할 줄 아는 성숙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 세련된 민족인지 모르겠다.

국립미술관 옆 단아한 러시아 정교회 앞에서 아내와 딸을 만났다. 성 조지 카슈베티(Kashveti St. George) 교회는 아주 오래된 교회는 아니다. 원래 1753년에 세워진 벽돌교회가 무너져 폐허로 남아있던 터에, 1910년 지역 유지들이 헌금을 모아 지은 비교적 현대식 건물이다. 그러나 이 교회는 조지아 정치격동의 주무대인 국회의사당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위치 때문에 현상타파를 원하는 정치세력의 집결지가 된 보조무대로 유명세를 탔다. 이 교회의 이름인 ‘카슈베티’는 조지아 말로 ‘돌을 낳다’란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엔 재미있는 전설이 서려있다. 6세기에 조지아에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동방선교를 위해 찾아 온 13인의 거룩한 사제들이 있었다. 그 때 트빌리시에 살던 한 여인이 이들 중 한 분인 ‘가레자의 데이비드(David of Gareja)’가 자기를 임신하게 만들었노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데이비드 사제가 만약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 여인이 돌멩이를 출산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그 여인이 실제로 돌을 낳았다고 한다. 교회 내부는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상징주의 화가인 Lado Gudiashvili(1896-1980)란 분이 1946년에 그린 성화다. 그런데 어럽쇼? 성당 중앙제단 위에 그려진 성모자상이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기독교 성화라기보다는 인도 힌두교의 크리슈나 여신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얼굴 윤곽도 갸름한 서구식 얼굴상이 아닌 둥근 얼굴이고 아기 예수를 안고 치마를 펼친 채 바닥에 앉아있는 자세도 동양적이다. 성모의 얼굴 위로 비치는 후광과 그 위의 당초무늬, 하늘로 날아가는 천사의 얼굴까지 모두 생경하다. 아니나 다를까, 구디아슈빌리는 이 인도풍의 파격적인 성모자상으로 공산당에서 축출될 뿐 아니라 20년동안 봉직해 온 트빌리시 미술아카데미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그리하여 구디아슈빌리는 조지아 화단의 이단아로 불리며 ‘벌거벗은 마야 부인’을 그려 외설화가로 구설수에 오른, 그보다 정확하게 150년 전에 태어난 스페인의 화가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같다고 하여 ‘조지아의 고야’란 별칭을 얻게 된다. 그래도 이 요상한(?) 그림이 아직까지 남아있고, 정교회에서 화가를 파문했다는 얘기가 없는 것을 보면 조지아인들은 예술작품에 관한 한 관용성이 퍽 큰 사람들인 것 같다. 이 교회 안에는 조지아의 다른 어떤 교회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서양식 현대 그림도 걸려 있었다. 한 때 우리나라 교회 본당의 단골 게시물이었던 Heinrich Hofmann의 1890년 작품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예수’와 ‘길 잃은 양을 안고 있는 예수’ 그림이다. 그런데 길 잃은 양을 안고 계신 예수의 얼굴이 한국 교회의 액자 그림에서 보던 인자한 얼굴이 아니고, 무척 근엄한 얼굴이다. 마치 십계명 언약궤를 받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던 모세가 우상숭배에 열중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며 분노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같단 생각을 했다. 평범해 보이지만 기묘한 교회였다. 구디아슈빌리의 동상은 성당 밖 공원 초입에 있다. 나비넥타이 정장차림에 챙 넓은 페도라(Fedora) 모자를 쓰고 철제 난간에 기대서서 비스듬히 먼 곳을 응시하는 훤칠한 키의 늘씬한 중년남성. 가수 프랑크 시나트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포즈가 이 분을 따라했나 싶게, 바라만 봐도 멋이 철철 넘친다. 게다가 프랑스 유학파로 시대를 앞서가던 화가였으니 젊은 날 그의 인기가 얼마나 충천했을지 짐작이 간다. 성당 맞은 편 오래된 건물의 아치형 나무 정문 앞에서는 표범가죽 무늬 미니스커트에 킹키 부츠를 신고 은발로 염색한 멋쟁이 젊은 여성들이 번갈아 가며 모델이 되어 요 모양새, 저 모양새로 사진을 찍고 있다. 중세와 현대, 경건과 파격이 공존하는 천년고도 트빌리시의 일요일 모습이다.

성당 동쪽으로 길을 따라가자 제법 울창한 나무들이 솟아있는 넓은 녹지공간이 나온다. 이 공원은 1865년 제정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더 1세의 트빌리시 방문을 기념하여 조성된 것으로 스웨덴 출신 건축가인 Otto Simonson의 설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공원은 개원 직후 당연히 ‘알렉산더 공원’으로 명명되었었다. 그러나 후일 전차 선로가 지나가게 되면서 선로 윗부분은 독립항쟁일을 기념하여 ‘4월 9일 정원’으로, 아랫부분은 조지아의 저명한 작가를 기념하여 ‘Giorgi Leonidze 정원’으로 명명되었다. 공원에는 Otto Simonson의 작품인 무지개 분수가 있다. 미키 마우스 가방을 메고 아빠와 나들이 나온 여자 아이가 형형색색의 타일 위로 졸졸 흐르는 분수대 물길 옆에 앉아서 연신 나뭇잎을 흘려보내며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인근 모든 나라들마다 수만명씩 득실거리는 의과대학 유학생 같아 보이는 젊은 인도인 학생들도 분수대 옆에서 주말의 공원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일요일 아침엔 청소부도 쉬는가보다. 밤 새 떨어진 낙엽이 공원길에 수북이 쌓여 있다. 만추(晩秋)의 정취가 가득한 주말이다.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이브 몽땅(Yves Montand)이 부른 「고엽」의 한없이 늘어지는 가락을 흥얼거려 보았다. 우리 또래들에게 낙엽은 시몬이다. 낙엽을 밞을 때마다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8-1915)의 “시몬, 너는 좋으니, 낙엽 밟는 소리가...”란 구절이 떠오른다. 혹은 “시몬, 그대는 들리는가, 낙엽 밟는 소리를...”로 시작하는 모윤숙(1910-1990) 작시 「렌의 애가」의 낭만적인 구절도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의 직업병에 찌든 메마른 감성의 사나이는 낙엽을 밟을 때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시작하는 김광균(1914-1993)의 시 「추일서정」이 떠오른다. 허긴 이십여년 세월 인플레이션에 대해 강의할 때 마다 인용했던 18번 구절이니, 어찌 내 몸에 체화되어 있지 않으리요. 허나 구속받지 않는 나이에 이른 이젠 다시 낭만을 회복하자. 트빌리시의 가을 낙엽을 ‘망명정부의 지폐’로 바라보는 삭막한 늙은이에겐 아름다운 미래가 없다. “낙엽은 낭만이고, 낙엽은 추억이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보았다. 그러나 뼈 속까지 현실주의자인 사나이는 지금 현재 무엇보다 배가 고프다.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에서 벗어 난 벤치를 골라 자리 잡았다. 슈퍼에서 사 온 봉지 빵으로 점심을 대신해야 한다. 아차. 마실 물도 없다. 주변을 둘러봐도 상점은 어디에도 없다. 그냥 폴란드 그다니스크 조선소의 프로레타리아 노동자마냥 차가운 빵 쪼가리를 꾸역꾸역 씹어 먹었다. 딱딱한 빵을 씹느라 이지러진 딸의 얼굴이 새삼 가여워 보인다. 그러나 얘야 서러워 말거라. 낙엽 쌓인 공원 벤치에서 먹는 소박한 한 끼 식사는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낭만이란다. 우린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어린 오빠를 울러 메고, 세계 각국의 공원 벤치를 전전하며 한미(寒微)한 멋을 즐길 줄 알던, 지구별의 방랑자 가족이란다.

공원 동쪽 끝에 풀어헤친 코트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왼쪽 아래를 응시하고 있는 거구의 중년 사내 동상이 있다. 이 분이 공원의 이름이 붙은 민족시인 Giorgi Leonidze(1899-1966)씨다. 이 분은 유약한 감성의 시인이 아니라 열정이 넘치는 굳건한 의지의 애국 시인인 것 같다. 그의 시 「조지아의 언어」는 조국의 언어를 찬사하고, 이를 사용하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비단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조지아의 언어여,

어린이들이 우유를 마시듯, 나는 너를 마시노라

··············

젊은이들과 현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너는,

우리 민족처럼 끝도 없고, 늙지도 않는다.

확고하게 그리고 진정으로 네게 봉사하고,

네 안에서, 너의, 너를 위하여 말하고 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도시고속도로 위로 난 보행자 길을 따라 벼룩시장을 찾아 나섰다. 10분쯤 걸어가자 다리 위에 좌판이 널려 있다. 이 곳부터 트빌리시의 명물인 ‘Dry Bridge 벼룩시장’이 시작된다. 시작부터 좌판에 깔린 물건들이 심상치 않다. 청계천 6가 황학동 골동품 시장의 진열품처럼 쓰레기 더미에서 주어온 것같이 때가 묻은 물건들이 아니다. 깨끗하게 진열되어 있고, 상당히 그럴 듯해 보이는 골동품들까지 진열되어 있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 그리고 음크바리 강변의 ‘3월 9일 공원’ 안까지 골동품, 예술작품, 그림을 파는 좌판이 족히 수백개는 된다. 진열된 모든 물건이 진짜가 아니고, 심지어 스탈린 시대의 뱃지까지도 중국제 모조품일 수 있으니 명심하고 흥정하라는 여행객의 후기를 읽은 적이 있지만 트빌리시의 벼룩시장은 내가 가본 유럽 도시의 어느 벼룩시장보다 그 크기와 진열된 물건의 품질 면에서 못하지 않다. 이제 내 나이에 새삼 무엇을 수집하랴만, 시간만 허락되면 찬찬히 살펴보고 싶은 추억과 낭만을 파는 거리시장이다. 자글자글 흥정하는 소리에 섞여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옛 가락의 색소폰 소리가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한바퀴 둘러 본 것으로 만족하고 도시고속도로 아래로 뚫린 토끼굴을 건너 강변 공원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도 멋진 조각작품이 앞을 가로막는다. 양 손을 상징하는지 V자로 감싸고 있는 손가락 모양의 길쭉한 청동기둥들 사이 공간에 두 팔을 위로 올린 어린이가 공중에 떠올라서, 머리 위에 달려 있는 종을 올려다보고 있는 높이 10여m의 특이한 조각품이다. Deda Ena (Mother Tongue) Monument, 모국어 기념탑이다. 탑신 안쪽에는 조지아어로 쓴 글이 빡빡하게 적혀 있다. 1978년 4월 14일에 조지아어를 공용어에서 삭제하려던 소비에트 당국에 대항해서 일어난 민중봉기를 기념하는 조각품이다. 다행히 소비에트 당국이 조지아어를 공용어로 남겨 두었고. 독립 이후에는 이 날을 ‘조지아어의 날’로 기념하고 있단다. 지나가는 관광객들 모두가 Deda Ena탑 앞에서 두 팔을 활짝 올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우리도 그 모습대로 사진을 찍었다. Deda Ena탑 뒤 공터 하얀색 대리석 판 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조각상이 있다. 옆에서 바라볼 때는 그림자가 비쳐서 갈기 날리는 말 그림인가 싶었는데, 정면에서 바라보니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남성의 초상이다. 1980-90년대 Mepe(황제)란 예명으로 조지아 국민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가수 Irakli Charkviani(1961-2006) 기념조각상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공산당 제1서기, 아버지가 주영대사를 역임한 보수적인 엘리트 가문 출신이지만 대중음악을 전공하였고, 독립 전후 정치적 혼란기에 진보적인 저항정신을 노래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팝뮤지션이다. 그러나 마약 상습 복용으로 2006년 44살의 나이에 갑자기 죽었다. 조지아 팝의 황제라더니 벌써 그를 잊었는가? 구경꾼도, 그 흔한 꽃다발 한 묶음도 없다. 연전에 찾은 모스크바 아르바트거리 뒷골목에 있는 소련 개혁개방시대의 고려인 저항가수인 빅토르 초이(Victor Tsoi, 1962-1990) 추모의 벽에는 사후 30여년이 다 되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메모와 꽃다발이 그득했었는데... 옛 사람은 후대인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기억되는가? 그의 조각상 앞 벤치에 누군가가 “WE NEED EU”란 흰색 낙서를 크게 써놓았다. Mepe가 노래했던 시대정신이 독립과 저항이었다면, 이제 번영과 유럽화로 나아가자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주창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조지아와 EU?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위험한 발상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작전이 마무리되고 나면 러시아 팽창정책의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조지아일텐데, 섯부른 치기가 자칫 큰 위기를 불러 올 수 있다.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인들은 조지아를 ‘러시아의 캘리포니아’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했던 땅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분리주의자들을 선동하여 동북부의 압하지아와 중북부의 오세티아를 자치공화국으로 만들어 놓고 사실상 자기 식민지처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1세기 조지아에게는 차라리 굴종의 외교술, 15세기 아제르바이잔의 시르반샤 이브라힘 1세의 지략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쿠라 강변을 따라 남동쪽으로 걸어가니 왼쪽에 연꽃잎 혹은 우산모양의 지붕으로 둘러 쌓인 크고 멋진 유리건물이 있다. 모양새나 위치로 볼 때 오페라 하우스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공공건물이었다. 공식명칭은 ‘트빌리시 공공서비스 홀’이지만 흔히들 ‘정의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 구청이나 동사무소처럼 신분증, 여권발급, 출생신고, 재산등록 등을 한군데서 처리할 수 있는 법무부 직속 통합민원사무실 건물이다. Rhike 음악당 및 전시관을 설계한 이태리 건축가 Massimiliano와 Doriana Fuksas 부부가 트빌리시에 남긴 또 하나의 작품이다. 11개의 35m 높이의 기둥 위에 커다란 꽃잎이 펼쳐져 건물을 덮고 있는 독특한 디자인이다. 평범한 행정관청으로 쓰기엔 너무 사치스런 건물이 아닐까 싶지만 이 멋진 건물을 국민들의 일상업무에 할애하는 정부의 발상이 획기적이다. 그러나 건물유지관리 예산이 충분치 않은지 높게 솟은 기둥 끝 시멘트와 맞닿은 부분마다 벌겋게 녹슨 자국이 눈에 띄어 안타까웠다. 이 건물 앞에도 정치격변기에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세계 어느 도시가 그렇지 않으랴만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트빌리시도 곳곳에 수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이 스며들어 있다. 세월이 흐르면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지겠지만, 그래도 희생된 영령들을 기리고자 하는 노력이 가상하여 잠시 숙연해졌다.

이젠 트빌리시를 떠날 시간이 가까워진다. 앰배서더리 호텔 방향으로 길을 건넜다. 강가에 출입구가 아치형으로 크게 뚫려있는 소비에트 시절의 모더니즘 건물들이 여러 채 있다. 지금은 낡아서 서민들의 거주공간이 되었겠지만, 50년전에는 공산당 간부들만 살 수 있었던 호화 아파트였을 것 같다. 아치 문 너머로 구시가지의 교회 첨탑이 그림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태리 시에나 성문에서 구시가지로 들어갈 때 보이던 경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옆에는 아르 누보양식으로 새로 지은 멋진 건물이 쿠라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이제는 공산당 간부 대신 자본주의 사회의 “누보 리시(Nouveau Riche, 벼락부자)‘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멋쟁이 건물이다. 호텔 옆 작은 거리공원, 우리 방에서 내려다보이던 조각상이 텅 비어있다. 몇 번 스쳐 지나갈 때마다 관광객들로 득실거려서 감히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었는데 이제 우리가 독점할 수 있는 찬스다. ‘Jorjoliani와 Kvantaliani 기념비’라고 부르는 군무상 조각 작품이다. 동물 모양의 옷을 입고 춤을 추며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 축제인 Berikaoba의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1981년 조각가 Avtandil Monaselidze에게 제작을 의뢰하여 완성한 것으로 원래는 기독교 전파 이전의 이방인들의 축제였으나 기독교 전래 이후에는 기독교 성일에 추던 춤이라고 한다. 아내와 딸이 7인의 군무상과 손을 잡고 그들과 비슷한 동작으로 무용수처럼 온 몸을 활짝 폈다. 여행 중 가장 유쾌한 모습의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지아, 특히 트빌리시에선 가는 곳마다 멋진 조각상이 있고, 사진이라곤 교회 혹은 조각 앞에서 찍은 것이 대부분이다. 누가 트빌리시를 ‘조각의 도시(the city of sculpture)’라고 칭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다.

짐을 찾은 후 로비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너무 즐길게 많은 멋진 도시, ‘리틀 프라하’인데 겨우 두 밤 자고 떠나려니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사령관이 세운 정확한 일정표에 맞춰서 짠짠하게 구경하고 간다. 오후 4시 반. 택시를 불렀다. 쿠라강 동안으로 건너가서 메테키성당 옆 가파른 도로로 언덕을 올라가니 큰 길이 나온다. 이 길이 공항대로다. 공항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주일 전 도착했을 때는 바쿠의 화려한 공항에서 온 참이라서인지 트빌리시 공항이 매우 초라하게 여겨졌었는데 다시 살펴보니 제법 번듯한 현대식 공항이다. Shota Rustaveli 국제공항. 이 또한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싶더니 바투미대학교의 정식명칭에 사용되고 있는 이름이었고, 트빌리시와 바투미의 가장 번화한 중심거리도 ‘루스타벨리로’였다. Shota Rustaveli(1160-1220)는 조지아가 자랑하는 작가다. 그의 서사시집인 『표범 가죽의 기사(The Knight in the Panther’s Skin)』는 6,648줄의 장편 서사시로 타마르여왕(재위 1184-1213) 시대를 배경으로 세 기사(아브탄딜, 네스딴, 프리돈)의 사랑, 우정, 충성을 그린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그 무대가 아라비아, 이란, 인도까지 포함하는 대륙을 활보하는 호쾌한 영웅들의 대서사시다. 이 책은 20세기 초까지 조지아 모든 신부들의 결혼 지참 목록일 만큼 국민필독서였다고 한다. 영문학의 효시를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의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로 여기고 있는데, 그 책이 15세기 초에 쓰여진 것을 감안하면 13세기 초에 쓰여지고 훨씬 스케일이 웅장한 『표범 가죽의 기사』의 문학사적 가치를 견주어 볼 수 있다. 융성했던 조지아 중세 문화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붐비지 않는 공항이라서 차라리 약간 기다려서야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이제 공항 활주로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6박 7일간의 조지아 일정이 주마간산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래 체류하는 나라다. 웅대한 자연과 역사적 향훈을 만끽했던 나라, 경건한 신앙심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 대부분의 도시이름이 ‘이(i)’로 끝나고, 많은 현대 남성들의 이름이 ‘드제(dze)’로 끝나는 기묘한 나라, 그루지아였다. 젊을 때는 “좋으면 다시 또 오면 되지” 싶었는데 이젠 쉽게 기약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어선지 아쉬움이 더욱 컸다. 트빌리시에서 예레반까지의 비행편은 35분에 불과했다. 떠나가는 나라의 잔상을 회억하거나, 다가오는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정리하기도 전에 저가항공 Fly One의 중형 비행기는 어둑해진 예레반 공항에 착륙했다. 내겐 여든 두 번째 나라다. 공항은 자그마하나 깔끔했다. 사령관이 또 다시 환율을 체크하여 환전한 후 공항 1층의 렌트카 구역에서 Europe Car를 찾았다. 아주 늦은 시간도 아닌데도 아무도 없다. 갈아 낀 현지 전화번호로 문자를 넣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웬 젊은이가 텅 빈 공항청사를 유유히 걸어온다. 늦어서 미안하단 기색은 전혀 없다. 서류작성을 마친 후 공항과 연결되어 있는 주차장에 가서 차량을 넘겨받았다. 당초에 사륜구동을 신청했는데 우리에게 할당된 차량은 소형차량 기아 리오다. 따지고 말고 할 여지도 없이 남은 차량이라곤 이게 유일한 차다. 사령관이 아르메니아 관광도 산악지대를 돌아다녀야 하기에 힘센 차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잘 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마일리지도 이미 6만km를 넘은 시금털털한 차다. 다행히 실내는 깔끔했다. 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기술력을 믿어 볼 수밖에...

벌써 시간은 밤 9시가 넘었다. 숙소는 도시 외곽에 있다고 했다. 공항을 벗어나니 이내 시내길이다. 그러나 오가는 차량도 드물고, 가로등이 드문드문 놓여서 컴컴하고, 도로포장도 시원찮은 듯 차량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갑자기 어디 제3세계국가의 시골동네로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다. 도시 외곽 같은 어두컴컴한 길을 20여분쯤 달리자 약간 불빛이 훤한 동네가 나타난다. 로타리 맞은편에 웬 나이트클럽이나 도박장처럼 건물 전체에 작은 전구로 점등해서 번쩍 거리는 싼 티 역력한 제법 큰 호텔이 보인다. 저 곳이 오늘밤 우리가 묵을 호텔, Richmind다. 촌스런 이름이지만, 그 이름처럼 마음만이라도 풍요로웠으면 좋겠다. 별도 주차장도 없기에 호텔 앞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여기 세워도 되느냐고 거듭 확인한 후에야 체크인을 했다. 시골 처녀같이 순박한 얼굴의 종업원들이 쪼르르 나와서 모처럼 찾아 온 손님을 열심히 응대한다. 그러나 지난 몇일 특급호텔에서 세련된 도시여인들의 환대에 익숙해진 사내에겐 감사하지만 참 어설프단 느낌이 든다. 3층방을 배정받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긴 후 움직이기 전에 갑자기 덜컹하고 큰 충격이 온다.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덜컹하곤 천천히 문이 열린다. 휴~하고 한숨을 쏟아낼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소비에트 시절의 공장용 승강기인 것 같다. 방은 넓고, 천정도 높았다. 가장 좋은 것은 고급 호텔에선 주지 않는 비누, 샴푸에 세면도구까지 들어있는 중국산 일회용 패킷이 비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샤워 꼭지는 허접하지만 따뜻한 물은 잘 나왔다. 이 정도면 내 수준에 딱 맞는 호텔이다. 밤 10시가 넘었으니 어디 가서 요기할 곳도 없다. 또 다시 김광섭 시인이 생각난다. 에라~ 물 한잔 마시고 그냥 자자. “낮은 베게 높이 베고...” 배고픔을 참으며 침대에서 곯아 떨어졌다. 뚜벅이 걸음으로 트빌리시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고, 비행기 타고 국경을 넘은 피곤한 하루였다. 그렇게 여행 10일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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