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린 날
그제 오후 진눈깨비가 내렸다. 차량으로 뒤엉킨 도시는 난장판이 되었다. 라자코프 대학교에서 강연을 마치고 겨우 올라탄 시내버스는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였다. 이리저리 밀리면서도 추억 속으로 옮겨간 듯한 아련함을 즐겼다. 그리고 어제 새벽부터 본격적으로 눈이 내렸다. 온 도회가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눈이 그친 오후, 에르킨딕 공원으로 산보를 나섰다. 어제까지 형형색색의 낙엽 카페트였던 잔디밭이 하루 만에 하얀 카페트로 탈바꿈했다. 산책길 중간에 있는 시인 보콘바에프의 흉상에 흰 눈이 쌓여서 그 새 백발이 되었다. 싱긋이 웃는 모습의 흉상이 웬지 시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흰 머리칼로 바뀌자 세월의 연륜이 쌓인 인자한 미소를 띈 노시인이 되어 썩 잘 어울린다.
비슈케크 역 근처의 넓은 잔디밭에 만발한 장미송이들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아이스크림 꽃으로 변했다. 오랜 벗들에게 전송하자 유계 옥한석이 '백설장미'라고 명명해 주었다. 첫눈과 장미의 조우. 차마 꽃봉오리가 다칠까 사뿐히 내려앉은 첫눈의 고상함에 세상이 한결 따스하게 느껴진다.
밤새 계절이 바뀌었다.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8도다. 몇벌 옷을 껴입고 아침 산보를 나섰다. 웬 나무일까? 나무 그늘에 노란 잎들이 수북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낙엽이 빗줄기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갑자기 다가온 추위에 나무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철 지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는, 스카프를 곱게 동여 맨 청소부 아주머님은 차라리 대빗자루를 내려놓고 핸드폰에 낙엽을 담고 있다.
하얗고 노란 늦가을의 풍경이다. 저만큼 성큼 겨울이 다가왔다.
--- 2025년 11월 6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