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만의 회한(悔恨)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에 되돌아 본 우리 사회와 나의 삶

by 천산산인

어제 밤, 어린 시절의 친구가 멋지게 찍은 고궁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남대문에서 덕수궁을 거쳐 경복궁까지, 가을비 속에 혼자 감상에 젖어 걸었노라고... 그리고 지나가는 말투로 되뇌었다. “그러고 보니 10·26일세...” 그 말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 친구는 1974년 민청학련 당시 서울상대 학생회장으로 12년형을 선고받았던 민주지사다. 그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원영이 그렇게 싫어했던 18년 장기집권, 그리고 나서 지난 36년. 18년은 긴가민가했고, 또 다른 18년은 존경하게 된 기간??” 그가 하트 문자로 답신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 에르킨딕 공원길로 아침운동을 나섰다. 운동을 마치고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 셈법이 틀렸다. 급히 핸펀을 열고 문자를 보냈다. “늙으니 덧셈, 뺄셈이 안되네... 36년이 아니라 46년이 지났구려~ 원영의 운명을 바꾼 이가 떠난지...” 즉시, 슬픈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 문자가 응신되어 왔다.


낙엽을 떠나보낸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그리고 흰구름이 흘러흘러 간다. 그렇게 46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반이 될 때까지, 학창시절 내내 우리의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철들면서 그 사실이 지긋지긋했다. 1979년 10월 27일 이른 아침. 관악산을 오르는 소로에 두툼한 밧데리로 포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든 웬 아저씨가 멈추어 서있다. 라디오 넘어 들리는 긴박한 목소리는 김성진 공보처장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리는 대국민 발표문이었다. 순간 세상이 멈춘 듯 멍해졌다. 그가 죽다니, 그도 죽는가? 나도 발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라디오를 도청했다. 그리고 산모퉁이를 돌자마자 나 혼자 저쪽 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했다. 드디어, 그래 드디어 18년 독재정권의 압제가 사라졌다.

그런데 세상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뭔가 짙은 안개 속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12월 12일 저녁, 아무 이유도 없이 서울시의 교통이 마비되었다. 다음 날부터 험한 인상의 합수본부장 전두환의 얼굴이 지상에서, 흑백 TV에 자주 나타났다. 뭔가 수상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중엔, 나중에 오보로 판명되었지만, 육군 참모총장 비서를 하던 내 고교 동기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도 했다. 날이 풀리고 꽃이 폈다. 서울의 봄이 왔다고 했다. YS, DJ, JP로 불리던 소위 ‘3김’이 저마다 민주국가의 비전을 설파하고 다녔다. 그 중 가관은 JP였다. 우리 공화당은 (18년 장기집권동안) 이미 부자가 되었으니 더 이상 부정부패하지 않을 거라고 컬컬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1980년 3월, 고향친구는 복학이 되자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캠퍼스에 나타났다. 종종 걸음으로 잽싸게 걸으며 그냥 가끔씩 수업에 와서 얼굴만 비추노라고 했다. 순진했던 얼굴엔 생활인의 분주함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1980년 5월. 캠퍼스는 학생들의 데모로 달구어졌다. 종잡을 수 없는 소문들이 귓전을 스치고 갔다. 어디서 듣고 온 겐지 마이크를 잡은 학생회 간부들은 이상한 음모론을 설파하고 있었다. 캠퍼스 가득, 밀도 짙은 분노의 공기가 응축되고 있었다. 그리고 5월 15일. 짙은 구름이 드리운 늦은 오후, 학생들은 교문을 박차고 영등포 로터리 - 신촌 로터리를 돌아 서울역 광장까지 걸어서 뛰쳐나갔다. 연도의 시민들이 빠다빵을 사서 던져 주었다. 우린 우물우물 씹으며 큰 길 한가운데로 열을 지어 걸어갔다. 가끔씩 빗방울이 뿌렸다. 서울역 앞 광장은 인산인해였다. 저 뒷 켠에 서있으니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단지 검붉은 거대한 장벽, 대우빌딩에 부딪혀 울리는 스피커 소리가 에코되어 웅웅거릴 뿐이었다. 간간히 들리는 소리론 전두환 일당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노라고 한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부르는 “유신 잔당 물러가라 훌라훌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란 노래가락이 광장을 넘실거렸다. 저 언덕 위 남대문 로타리에선 데모대와 전투경찰 간에 투석전이 오가는 듯 연기가 피어올랐고,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가 스며들었다. 밤이 되자 일단 해산한다는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학생들은 흩어졌다. 나도 그 먼 길을 걸어서 6·25때 피난 갔던 부모님의 경험담을 떠올리며 신림동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대학은 휴교령이 내리고, 교문 앞을 군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늦봄이 지나고 여름 내내 세상은 유언비어로 가득했다. 광주에서 뭔가 큰 일이 벌어졌다고 하는데 신문지상에선 단 한 줄의 기사도 확인되지 않았다. 여름동안 광주사태의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호기롭던 3김도 자취를 감추고 대한민국의 정치는 진공상태가 되었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의 찬성으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은 또 다시 독재국가가 되었다. 가을이 되고 캠퍼스엔 경찰기동대가 상시 배치되고, 가끔씩 데모하는 학생들을 좇아서 경찰들이 교실까지도 난입했다. 세상은 개판이 되었다. 누군가는 분신(焚身)하고, 누군가는 도서관 창 밖으로 투신(投身)했다. 회색빛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청춘도, 사랑도, 조국도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이태리 칸초네를 번안해서 부른 가수 오정선의 흐느끼듯 절규하는 운율, "눈물 속에 피는 꽃(L'immensita)"이 가슴 속 깊이 꽂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라경제는 잘 돌아갔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나라도 걱정되었지만, 부모 형제도 나 자신도 살아가야 했다. 그 와중에서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했던 시골 청년의 인생행로도 당초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뭔가 부끄러웠지만 때가 되어 취직을 했고, 때가 되어 장가를 갔고, 때가 되어 아이 둘을 낳았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외국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서 두 번이나 유학을 다녀왔다. 외국에서도 한국 유학생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나라 걱정이었다. 그 새 나라는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1992년 우여곡절 끝에 YS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두 전직 군 출신 대통령이 감옥에 갔다. 문민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제 바야흐로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네 삶 속에선 실감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18년이 된 1997년. 정치는 바뀌었지만 경제는 흔들렸다. 태국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북상하여 한국에 상륙하였다. 소위 말하는 IMF 위기가 왔다. 연초 850원하던 대미 환율이 연말에 1,950원까지 치솟았다. 파견 나가서 모시던 상전은 미국 정부에 읍소하기 위해 뻔질나게 워싱턴으로 출장을 다녔다. 12월 초 난 이경식 한은총재가 ‘대외비 친전’이라고 쓴 봉투에 담긴 “외환보유고 잔액 30억불. 약 2주일 후면 소진”이란 문장을 흠칫 쳐다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시골 이장님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이름처럼 사람 좋게 생긴 IMF 아태국장 나이스(Nice)씨가 먼저 오고, 워싱턴에 가신 내 상전이 성탄 전야에 홍차 브랜드 이름의 미국 재무부 차관 립튼(Lipton)씨를 모시고 왔다. 그리고 IMF총재 미셀 깡드쉬(Michel Camdessus)가 방한하여 210억불 구제금융 신청서에 서명하면서 외환위기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여파는 컸다. 대량해고, 도산의 난리통 속에서 외환위기가 한국경제의 ‘위장된 축복(disguized blessings)’이라고 평가하던 그 대머리 까진 프랑스인이 얄미웠다. 1998년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알현(?)한 하버드대 교수 출신의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 미국 재무부 부장관은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따뜻한 가슴(warm heart)는 오간데 없이 차가운 머리(cool head)만 남아서, 고압적인 자세로 한국의 IMF 이행조건을 채근하는 종주국의 대신이었다. 조선시대 청나라 사신이 저러했으리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와중에 DJ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글로벌 경영으로 승승장구하던 대우그룹이 부도 처리되고, 북한으로 4억 달러가 흘러 들어가고, DJ는 노벨상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기업들이 날개를 달기 시작하였다. 삼성, LG, 현대의 반도체, TV, 에어컨, 자동차, 선박들이 세상을 누비기 시작했다. 박대통령 사후 26년째인 2005년 우리나라 경제는 ASEAN 10국 경제를 합친 것보다 규모가 커졌었다. 그리고 K-Pop, K-Drama가 온 세계를 흔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인솔하여 간 수학여행 길에서 마주친 오사카 중심부 20층 높이의 소니타워는 전면이 배용준의 사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볼리비아 출장길 중소도시의 저녁 산보길에서 마주친 볼리비아 처녀는 한국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가수 싸이가 두 손 모아 펄쩍펄쩍 뛰면서 부르는 말춤이 한국의 상징이 되었다. 고지식한 나는 수천년 전통, 동방예의지국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지만, 세상은 한국을 더 잘 알게 되었고, 젊은이들은 자긍심으로 뿌듯해 했다.

그 새 국내 정치는 '혼돈의 장'이 되었다. 대통령이 자살하고, 감옥에 가고, 탄핵되고를 반복하였다. 국민들은 (사이비) 보수와 (사이비) 진보 양 진영으로 쫙 갈라져 태극기와 촛불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라 전체가 증오로 가득차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상화되었다. 국민 모두가 미신과 사이비, 음모론, 과격한 발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사이 북한은 고도비만형 애숭이가 권력을 물려받아서 핵개발을 완료하고 우리를 건드리는 나라는 모조리 불바다로 만들겠노라고 호언장담하기 시작했다. 2024년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세상은 열광하는데 정작 내국인들, 특히 보수진영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리고 2024년 말 정말 희한한 일이 발생한다. 요괴여인에게 홀려 지내던 모지리 대통령 윤석열이 자폭해 버린 것이다. 자신은 탄핵되어 감방으로 가고, 꼼짝없이 감방으로 갈 처지였던 중대범죄 피의자 이재명은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로 갔다. 희한한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로 낮아서 총인구가 줄고 있고, 환율은 급등하고, 경제전망치는 주요 선진국 중 꼴찌인데 주가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다. 정말 희한한 세상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지 어언 46년.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가 한 때 그렇게 증오했던 독재자 박정희는 알고 보니 명군이었다. 과(過)가 적은 것도 아니지만, 그 공(功)은 그의 과를 덮고도 남을 만큼 컸다. 박정희 이후 11명의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러나 단 1명도 그 분 발 뒷꿈치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심수봉의 노래 ‘그 때 그 사람’을 “그 때 그 새끼”로 변곡해서 부르고, 한 때 그토록 증오했던 박정희는 위대한 지도자였고, 선각자였다. 나는 오원철 수석이 지은 박정희 전기를 읽으며 그의 비전과 총명함에 감탄했고, 그의 애국심에 눈물을 흘렸다. 이광요 수상의 평가가 옳았다. 그렇게 그 분은 피눈물 나게 분투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빈곤의 아픔을 공감하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고 가난한 국민들을 보듬고 이끌었던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셨다.

그 분의 46주기 다음날인 2025년 10월 27일. 자유란 이름의 공원, 에르킨딕의 벤치에 앉아 저 멀리 천산산맥의 설산 준령을 올려다보면서 철없던 시절의 객기를 용서해 주시길 빌었다.


2025년 10월 27일 아침

비슈케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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