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차 증정식

Deja Vu (2)

by 천산산인

유년의 추억은 사그라든 불씨 같다. 다 잊고 있다가도 바람이 불면 불현 듯 피어오른다.

비슈케크 시내를 가로 지르는 아침 출근길. 투르순바예바(Tursunbayeva) 공원 너머, 얼마 전까지 대통령집무실로 사용되던 웅장한 건물 앞 광장(Old Square)에서 무슨 행사가 열리고 있다. 행사에 동원된 어린 학생들이 저마다 색색의 풍선을 들고 기다리고 서있다. 경호원들까지 나서 일대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필시 대통령 주관행사일 것이다. 광장 저 멀리 빨강색 소방차 몇 대가 보인다. 아마도 고가사다리 소방차 구입(? 혹은 기증)을 기념하기 위한 국가적 행사인가보다. 역시 후진국이다.


60여년 전 어느 가을날.

갑자기 교실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군청에 불이 났으니 전교생 모두 운동장으로 대피할 것. 대피! 대피!”. 수업을 하다말고 모두들 우루루 운동장으로 모였다. 우리 국민학교 옆 건물인 군청에 불이 났다. 벌써 매캐한 연기가 일대를 뒤덮고, 학교 건물 너머로 언뜻언뜻 불길이 보였다. 교실마다 비치된 양철 바께츠를 학교 우물로 갖고 나가서, 선생님들은 도르래로 물을 퍼올리고, 고학년 남학생들은 길게 나래비 서서 물통을 전달 전달했다. 훗날 고약한 국무총리가 되는 순박했던 해찬이형도 열심히 물통을 날랐다. 손이 바뀔 때 마다 물이 출렁출렁 넘쳐서 마지막엔 반쯤이나 남았을까 싶었다. 맨 앞 쪽엔 덩치 큰 동네 청년들이 물통을 받아들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있는 힘껏 뿌렸다. 그래봐야 물길은 건물 안쪽까진 도달하지 못했다. 의용소방대원들이 빨갛게 칠한 리어카에 곡괭이와 도리깨 몇자루를 들고 언덕길을 급히 올라왔지만 이미 퍼진 불길을 잡기엔 시간이 늦었다.

군청은 청양군에 있는 거의 유일한 2층 건물이었다. 일제시대 목조로 지은 제법 의젓한 관공서 건물로, 우성산 기슭 북쪽 언덕 위에서 읍내를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그 아래로 경찰서가 있고, 그 옆으로 우리가 다니던 국민학교가 있었다. 목조 건물은 일단 불이 붙자 순식간에 거칠게 타올랐다. 일진광풍이 일대를 감쌌다. 이제 의용소방대원들도, 청년들도 뒤로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모두들 손을 놓고 멀찌기 물러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적한 동네에선 무슨 일이 생기면 너도나도 모여든다. 이제 읍내 주민 거의 모두가 새카맣게 몰려들어서 혀를 차면서 불길을 바라보고 있다. 불길이 이층 지붕 위로 타고 올라가더니, 이윽고 불길 속에서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저마다 고함을 지른다. “아악~”, “아이고, 큰 일 났네”, “어이쿠, 저를 워째.”, “엄니 이를 워쩐대유...”...


거의 전소되어 잔불만 타오를 때 쯤, 저 멀리서 “앵~”하는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웅장한 빨강 소방차가 읍내 중심도로를 돌진하여 군청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웃의 큰 도회지(?)인 홍성군에서 소방차 지원이 온 것이었다. “길을 내줘~” 소리에 맞춰 군중들이 양 옆으로 쫙 갈라섰다. 빨강색 헬멧을 쓴 소방대원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물이 어디냐고 묻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소화전을 들고 우리 학교 우물로 달려갔다. 잠시 뒤 소방 호스가 부풀어 오르고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잔불을 향해 세찬 물줄기가 뿜어져 나갔다. 타고 남은 작은 기둥들이 물줄기를 맞고 다시 무너져 내렸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이런 문명의 이기가 있었다니...


잠시 후 물줄기를 맞은 잔해 위로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홍성군 소방대원들은 상전이었다. 입을 헤벌리고 멍하니 서있던 청양군 의용소방대원들을 향해 “뭐하고 있능겨?”하고 고함을 쳤다. 홍성군 소방대원들의 일갈에 번쩍 정신을 차린 의용소방대원들이 곡괭이를 들고 잔해 더미 위로 용감하게 올라서서 타고 남은 기둥들을 뒤집으면서 양동이로 물을 뿌리며 잔불을 잡기 시작했다. 한심한 듯, 혹은 측은한 듯 잔불 끄는 모습을 바라보던 홍성군 소방대원들은 호스를 감아서 소방차에 장착하곤, 다시 “앵~”하는 사이렌을 울리며 군중 사이를 빠져 언덕길을 돌아서 내려갔다. 군민들이 우뢰같은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했다. 이후 군청 화재사건은 한동안 청양군민들의 인구에 회자되었다. 심심한 동네에서 벌어진 사건은 말이 말을 만들어 가면서, 누군가는 영웅이 되고, 누군가는 희화되면서 점점 더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진화되었다.


겨울이 되었다. 청양군에도 드디어 소방차가 들어온단다. 이웃 공주군에서 소방차를 기증(?)했단다. 지역 국회의원인 장영순이 힘을 썼다고 했다. 전 군민(?)이 아래장터 공터에 모였다. 벌써 연단 위로 천막이 쳐져 있었다. 어디서 데려 왔는지 청양에는 없는 군악대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브래스 밴드 악기로 뿡꽝뿡꽝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여든 군중들은 이제나 저제나 거의 두어시간을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렸다. 눈 쌓인 한티고개를 넘어 오느라 시간이 지체된다고 했다. 드디어 공설운동장 한 켠의 사람들이 물러나고, 저 멀리 눈 덮인 논밭 너머 굽은 길을 따라 소방차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애개개, ‘쓰리 쿼터’, 625때 썼던 1톤도 안되는 낡은 군용트럭을 개조한 쬐그만 소방차다. 지난 번 홍성군에서 지원 나왔던 소방차와는 비교가 안되는 꼬마 트럭이다. 군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군민들의 실망감을 알아차린 듯 군악대의 연주가 더욱 증폭되었다. 이윽고 연단 위로 국회의원이 나서서 자기가 얼마나 애썼는지 한바탕 자화자찬을 늘어놓은 후, 군수님께서 이제 우리 청양군에도 현대식 소방차가 도입되어 군민들이 발을 쭉 뻗고 자게 되었노라고 자못 감격한 말투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리고 소방차 호스에서 빨간 염료를 탄 물줄기가 공중으로 살포되었다. 우리는 볼이 멘 자세로 박수를 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또한 겨울 내내 시골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뭐 저런 고물차를 줘? 청양사람 무시하능겨?”하면, “그래도 장영순이가 쎄긴 쎄. 공주군에서 소방차 한 대를 뽑아 오니...”, “아니 공화당 벱싸위원장인가 뭐라매 새 차 한 대도 뽑아 오지 못하는 사람이 뭐가 쎈겨?” 눈 덮인 겨울 밤, 촌로들의 토담방 토론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 한겨울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고 노인이 된 저자가 중앙아시아의 산골에 앉아서 60년 전 충청도 산골 마을의 옛 이야기를 풀어 쓰고 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흘러갔다...


--- 2024년 10월 9일 (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