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그 일지

안개 속으로 사라진 도시

by 천산산인

키르기스스탄은 아름다운 나라다. 그러나 한겨울 나기가 만만치 않은 나라다. 추위보다는 혼탁한 공기 때문이다. 2024년 1월 23일 01시 30분, 도착한 키르기스스탄의 첫 느낌은 후각으로 다가왔다. 공항 주위로 연탄가스 냄새가 자욱했다. 시내의 공기도 만만치 않았다. 도착한 지 일주일만에 배속기관에서 개최되는 환영파티에 참석했다가 새벽 1시 반 호텔로 돌아왔다. 2층 방문을 연 순간, 진한 연탄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잠에 취한겐지, 이산화탄소에 중독된겐지 아내는 비몽사몽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어떻게 이런 도시에서 살아갈지 암담했다. 그 이후 난 비슈케크의 별칭을 ‘이산화탄소의 도시(The City of CO₂)’라고 부르곤 했다. 현지인들이 비슈케크가 2023년에 대기질 나쁘기로 세계 3위였노라고도 하였다. 이렇듯 겨울이 오는 게 겁나는 도시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2년 근무하면서 3번째 겨울을 맞았다.


2025년 말 또 다시 스모그가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시작은 아름다웠다.

12월 19일(금)

엊그제부터 내린 눈이 소복하다. 눈꽃이 화사한 아침 출근길. 푸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가지마다, 줄기마다 소복이 쌓인 눈이 머리 위로 하얀 곡선을 그리고 있다. 하도 예뻐서, 차마 멋져서 그냥 걷지 못하겠다. 겨우 세 걸음 가다가 서서 카메라를 꺼내서 찍고, 말고를 거듭하였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행복한 아침, 눈 덮인 아침이다.

오후가 되면서 날이 포근해지기 시작했다. 쌓인 눈이 급속도로 녹아내리며 증발하기 시작한다. 거기까진 좋았다. 늦은 오후부터 어디서 나타났는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의 시커먼 매연이 도시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매캐한 연기가 스며든다. 핸펀에서 살펴 본 도시 대기질(Air Quality Index) 계기판이 점점 짙은 보라색으로 변하면서 200을 돌파했다. 밤이 되었다. 그래도 아파트에서 바라 본 알라투(Ala Too) 광장의 크리스마스 조명은 찬란하다. 금요일 밤이라선지 마나스(Manas) 장군 동상 옆으로 대형 LED 전광판이 점등되고 음악소리도 커졌다. 크리스마스 마켓을 덮고 있는 작은 불빛들도 영롱하게 반짝인다. 축제의 계절이다. 식사 후 아내와 산책을 나섰다. 광장은 젊은이들의 천국이 되어 있었다. 머리에 반짝이는 사슴뿔 장식을 달고 화사한 복장으로 나온 소녀들, 털모자 속에 얼굴이 파묻힌 채 부모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아이들. 울긋불긋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가판상점에 젊음이 넘친다. 참으로 곱다. 싱싱하다. 광장 중심의 분수대를 끼고 한 바퀴 빙돌게 만들어진 아이스링크 위로 청춘남녀들이 달리고, 돌고, 미끄러지고, 환희가 넘쳐난다. 누군가는 머플러를, 누군가는 고깔모자를, 누군가는 히잡을 쓰고 있지만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럴송에 맞춰 질주하는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즐겁다.

19시 30분 연단 위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곧 교통이 통제되고 광장 전체가 축제의 장이 되었다. 젊은 청춘들이 무대 위 가수들의 노래에 감응하여 손을 흔들고, 발을 구르고, 떼창으로 화답한다.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위의 장식품이 더욱더 반짝이고, 레이저 빔이 저 하늘 높이, 도시 건너편을 향해 번쩍번쩍 전광석화처럼 오가고 있다. 그런데 이게 뭐지?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광장을 감싸기 시작한다. 레이저 빔 속으로 탁한 물질이 비친다. 노래 소리는 점점 커지는데 뭔가 음습한 기운이 가득하다. 광장의 대형 국기가, 그 아래 꼼짝 않고 서있는 경비병 마냥 차렷 자세로 깃대와 나란히 축 늘어져 있다.


20시 30분경,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걷는 뒤로 무언가 섬뜩한 것이 따라 오고 있는 듯하다. 10층 아파트 베란다 넘어 명멸하던 조명들이 희뿌옇게 보이는가 싶더니 10여분도 되지 않아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어둠 속으로 잠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과 10여분 만에 비슈케크의 불빛이 사라졌다. 정전이 된 듯 온 도시가 새카맣다. 컴컴한 구름을 뚫고 잠시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얼마 안가서 조용해 졌다. 공연이 급히 취소된 모양이다. 연극이 끝난 무대를 바라보듯 이제 온 도시가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였다. 핸펀의 AQI 계기판의 보라색이 더욱 짙어졌다. 290을 넘어섰다. 공기가 매캐해지고 바람도 한 점 없다. 이제 캄캄한 밤이 되었다. 방안으로도 매캐한 냄새가 스며든다. 마스크를 쓰고 자야 되나? 억지로 잠을 청했다. 꿈자리도 뒤숭숭하다. 여러 번 잠에서 깼다.

12월 20일(토)

잠자리에서 몽롱한 채 핸편을 열고 대기질을 살펴보았다. 온통 빨강색. 399. 화들짝 잠이 깼다. 도시는 여전히 깜깜했다. 뭔가 조치가 필요할 것 같다. 어릴 적 연탄가스 중독된 분들에게 내려진 민간처방이 생각났다. 급히 냉장고 문을 열고 쉰 김치를 집어 먹었다. 보통 때와 달리 쉰 맛이 청량하게 느껴진다. 이외에 무엇을 어떻게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같은 시간 파리의 AQI는 55, 뉴욕시는 20이었다.


문득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장례식 장면이 떠올랐다. 54년 전, 아침에 학교에 가니 그 험악한 담임선생님께서 침통한 표정으로 간밤에 박OO 군이 연탄가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두어줄 건너 앞자리 책상이 텅 비어있었다. 뱅뱅 도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육군사관생도처럼 팔을 높이 들고 당당히 걷던 친구였다. 바로 그 날 오후, 우리 반 모두 부산 당감동 화장터로 갔다. 죽은 이는 우리 동기만이 아니었다. 같은 학교 1학년 선배인 바로 손 위의 형까지 한 방에서 자던 두 형제가 함께 변을 당한 것이다. 자랑스럽게 키운 아들 둘을 졸지에 잃은 어머니는 화장터 안에서 오열하다, 실신하고, 다시 오열하다가 실신하기를 반복하셨다. 차마 눈 뜨고 못 볼만큼 처절한 장면이었다. 두 형제를 집어삼킨 저 몹쓸 저기압은 그날 오후까지도 온 도시를 가득 덮고 있었다. 화장터 굴뚝의 연기가 하늘로 솟지 못했다. OO이의 혼령이 차마 하늘로 떠나지 못하고 부모님들 곁으로, 친구들 곁으로 와서 땅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그날의 처연함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오늘 새벽 그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그 때 맡았던 그 냄새가 다시 맡아지는 것 같다.


낮이 되도 짙은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쉬(Osh)에서 건너와서 You Tube를 촬영하기로 했던 Akylai양은 온종일 공항에서 비슈케크행 비행편을 기다리다가 귀가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 또한 하루 종일 뿌연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다림에 지쳐 버린 하루가 되었다.

2025년 12월 21일(일)

다시 뒤숭숭한 하룻밤을 자고 나서야 계기판은 겨우 193까지 떨어졌다. 오전에 교회를 다녀오고, 정오 비행기로 상경한 Aklai양과 이 나라에서 제법 유명한 You Tuber인 Ydyrus Isakov, 그리고 카메라 기사와 4명이서 오후 내내, 그리고 밤까지 촬영을 했다. 그날 밤도 도시는 검은 안개 속에 잠겼다. AQI는 다시 200을 넘어섰다.


2025년 12월 22일(월)

동짓날이다. 이제 낮이 길어지고, 겨울 기운도 조금씩 사그러지지 않을까? 어제 과로를 해서일까? 혼탁한 공기 속에 노출되어서 일까? 아침 산보를 나서니 사물의 색깔이 탈색되어 보이고, 어지럼 증세가 올라온다. 오늘 촬영을 할 수 있으려나? 아침 식사 후 한참을 쉬고 집을 나섰다. 찬바람을 쐬니 차라리 정신이 든다. 아침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함께 도심을 걸으며 촬영을 마쳤다. 오늘 밤도 스모그는 또 한번 도시의 밤을 삼켜 버렸다. 어제 밤처럼 AQI는 최고 200을 넘어섰다. 그리고 비슈케크의 스모그는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2025년 12월 23일(화)

새벽에 잠이 깼다. 엊저녁엔 보이지 않던 도시의 불빛이 번하다. 아~ 드디어 스모그가 사라졌구나 안도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7시 48분. 이제 동이 트고 하루가 시작되려는 아침. 몇일만에 맑은 공기를 마시며 공원 산책을 해보려나하고 핸펀을 켰다. 그런데 이게 웬 일? AQI의 붉은 빛이 여전하다. 333. 나쁜 공기를 마셔서 건강에 해가 되는 건 둘째 치고, 이런 날 아침 운동을 나갔다간 마누라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에라~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오전 11시가 넘어도 AQI는 여전히 321로 남아있다. 아카데미 동료인 Baktybek과 함께 전직 수상님이신 80세의 Muraliev Amangeldy씨를 모시고, 우아한 레스토랑 푸룬제에서 식사를 했다. 아직도 반듯한 체격에 총기가 넘치고 자상하면서도 품격이 넘치는 분이셨다. 그 분의 충고와 주선으로 대통령에게 드리는 편지를 써서 내 책을 대통령 비서실에 전달시켰다.


다행히 오늘은 밤이 되어도 뿌열 뿐 시커멓지는 않다. 그러나 도시 전체가 여전히 음습한 안개로 뒤덮여 있다. 밤 8시 35분 AQI가 393을 찍는다. 그리고 밤 9시 30분, 계기판 색깔이 처음으로 짙은 고동색으로 변했다. AQI 422. 이대로 잠자리에 들어도 깨어날 수 있을까? 아내는 진작부터 마스크를 끼고 곰처럼 웅크린 채 넷플릭스를 보면서, 나더러도 마스크를 끼라고 성화다. 밤새 공기정화기는 물론 에어컨을 통풍 모드로 틀어놓고 잤다. 이제 귀국일자가 1달도 남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이 도시를 탈출해야 한다. 건너 방에서 이제는 할머니가 된 늙은 아내의 기침소리가 컹컹 울리고 있다.

2025년 12월 24일(수)

엊저녁도 잠을 설쳤다.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AQI 계기판의 고동색이 더욱 짙어지고, 새벽 2시 448, 새벽 4시에 477까지 이르렀다. 계기판 끝 숫자가 500인데 이 수준이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대기 질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지옥문 가까이에 다다른 느낌이 든다. 대부분이 초미세먼지다. PM2.5 (2.5 마이크론 미만의 초미세먼지 농도)가 전체의 92%를 차지하고 있단다. 비슈케크에 사는 모든 시민들이 세계보건기구의 허용량보다 약 30배 이상의 초미세먼지를 흡입하고 있고, 다른 말로 하루에 담배 30가치를 피우는 정도다. 하루밤새 4,000명이 죽었다는 악명 높은 1952년의 ‘London Great Smog’가 이랬을까? 공포의 밤을 지냈다. 새벽 5시에야 최악은 벗어났다. 463, 그리고 새벽 6시에는 386으로 떨어졌다. 긴긴밤이었다. 새벽공기는 차라리 청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하늘 위로 구름이 가득차서 아침 8시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컴컴하다. 그러다 대반전이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 알라투 광장의 붉은 국기가 활짝 펼쳐졌다. 천산북로 계곡을 따라 산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동남풍이 서쪽에서 몰려온 혼탁한 스모그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아침 8시, 대기질은 241까지 떨어졌고, 9시에는 194로 드디어 이틀 만에 처음 200 이하로 떨어졌다.


아직도 북쪽 평원 저지대로는 시커먼 매연이 깔려있지만, 몇일만에 처음으로 엷은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나타나고, 카자흐스탄 국경인 일리산맥(Trans-Ili Alatau)의 설산준봉들이 드러났다. 찌푸린 하늘 아래서 탁한 공기를 마시며 머리가 띵한 채 살았던 한 주일이었는데... 창문을 활짝 열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하늘은 푸른 기운이 더욱 확산되었다. 그리고 오후 4시 대기질 계수는 117까지 내려갔다. 마침내 길고 긴 매연의 터널을 벗어난 느낌이다. 휴~ 지난 6일 동안의 The Great(?) Bishkek Smog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다. Merry Christmas!!



이 글을 써놓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신 분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불과 수년전까지도 석탄이 주 난방연료인 단독주택 밀집지역에선 겨울철 AQI가 1,300까지 다다르곤 했노라신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초미세먼지의 농도가 이토록 높았던 적은 없었지만 황사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는 대기질 지수가 900까지 올랐던 날도 있었단다. 갑자기 몇일 동안의 호들갑이 부끄러워졌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대부분의 서민들은 저런 환경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살아남았단 말이다. 그러니 이제 대기질 계기판을 들여다보지 않기로 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숫자를 보는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리고 키르기즈스탄을 떠나기 72시간 전인 2026년 1월 19일(월) 아침 07시 30분, 비슈케크의 대기질이 526을 찍었다. 이번에도 몇일 전 내린 눈으로 멋진 설경이 연출됐었는데... 같은 시간 귀로여행길 목적지인 아테네는 46이다. 조금만 더 참자. 몇일 후면 저 에게해의 푸른 섬들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 혼탁한 공기 속에서 숙명적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저 키르기즈인들은 어쩌란 말인가...


*** Cover photo credited by Ms. Aky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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