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Erkindikus

에르킨딕 공원의 영장류 인간

by 천산산인

비슈케크에 머무는 2년동안 거의 매일 에르킨딕 가로공원길을 거닐었다. 그 길은 나의 운동장이자, 휴식의 공간이었고, 또한 사유의 공간이었다. 이모저모 살펴봐도 에르킨딕 가로공원은 비슈케크시의 보석(crown jewel)이다. 높이 솟은 가로수 사이로 난 이 길을 따라 걷노라면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그 이름처럼 에르킨딕은 자유의 공원이다. 그리고 그 길은 자유를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나는 그 공원을 사랑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영장류 인간들을 일컬어 Homo Erkindikus(에르킨딕 공원의 영장류 인간)라고 부른다.

Homo Erkindikus는 인종적으로는 Homo Sapiens이고, 그 공원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빼고는 다양한 연령, 다양한 생김새, 그리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내겐 이들을 바라보고, 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키르기즈 생활에서 빼놓을 수없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이 글에서는 지난 2024년과 2025년 아침 산보길에서 자주 마주친 몇 부류의 Homo Erkindikus들을 언급해 보기로 한다.

Homo Erkindikus Cleaneros

첫 번째 Homo Erkindikus는 Cleaneros다. 이 분들은 연두색 발광조끼를 착용한 채, 자기 키보다 큰 대빗자루를 들고, 담당구역을 청소하시는 중장년의 여성들이다. 매일 아침 같은 길을 따라 산보하다보면 그 길을 담당하는 청소부 아줌마들과는 자연스레 낯이 익어질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마주치고 친해진 분은 머리칼이 하얗게 쇤 자그마한 초로의 할머니였다. 물론 내가 현지어를 못하니 우리들의 대화라곤 기껏해야 아침인사 뿐이었다. 그 할머니는 자기 키보다 훨씬 큰 대빗자루를 들고 보도블록을 열심히 쓸고 있다가 내가 다가가서 먼저 건네는 한마디 아침인사에 활짝 웃음을 담아 큰 소리로 화답해 주곤 했다. 어쩜 그렇게 즐겁게 일을 하고 계신지, 그 분이 맡은 구역으로 들어서면 밝은 에너지가 가득 찬 느낌이 들 정도다.

Homo Erkindikus Cleaneros들도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는 일하는 것이 아니고 노는 것이 아닐까 싶게 즐거운 표정으로 청소하고, 쓰레기를 주워 담는다. 어떤 때는 그 재미를 혼자서 즐기기 아까워선지 딸까지 데리고 나오지만, 끌려나온 청소년기의 딸은 부루퉁한 모습으로 마지못해 엄마의 일을 거들고 있다. 또 어떤 아줌마는 우수에 잠겨서 열심히 비질하다가 내 목례에 살포시 모나리자의 미소를 건넨다. 그러나 대부분의 Cleaneros들은 마지못해 일하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이 분들은 다른 Homo Erkindikus를 마주치기가 싫은 듯 자기 맡은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아무튼 이 분들의 노력으로 에르킨딕 공원길은 새벽부터 깔끔한 산책길로 청소되어 있다.


Homo Erkindikus Walkeros

두 번째 Homo Erkindikus는 Walkeros다. 이 곳에서 발견되는 가장 많은 영장류들이 이들이다. 대부분의 Walkeros들은 아침 일찍부터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침 산보를 하시는 분들 중 상당수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다. 나는 17년동안 키우고 떠나보냈던 우리 집 강아지 Leo를 닮은 몰티즈를 데리고 산보하는 기품 있는 초로의 할머니와 친해지게 되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 집 강아지와 친해지고 싶었으나, ‘아오’란 이름의 몰티즈는 낯을 가리는 녀석이라서 끝내 친해지지 못했다. 아오는 주인이 던지는 공을 잡으러 쏜살같이 달리고, 공을 물고는 제 자리에 서서 주인이 오길 기다리는 영리한 녀석이다. 그런데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나타난 녀석은 세 발로 걷고 있었다. 큰 개가 아오를 물어뜯어서 수술을 했다고 한다. 흉터도 길게 나 있었다. 여러 달 동안 세발로 깡충깡충 뛰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더니 드디어 재활에 성공하여 네 발로 걷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트라우마가 큰 녀석이니 낯선 사람이 예뻐한 들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키도 덩치도 크고 균형 잡힌 몸매의 러시아계 중년남성은 인상이 험악하여 혹시 비밀요원이 아닐까 싶어 보이는데 영화 <마스크>에 나오는 주인공 강아지처럼 귀와 눈이 얼룩으로 덮인 쬐그만 강아지를 목줄을 매어 매일 산책하고 있었다. 주인과 강아지가 너무 부조화스럽기에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경우인데 나를 만나면 오른손을 들어 왼편 가슴에 얹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난 아직도 이게 KGB식 인사법인가 의심하고 있다. 또 다른 러시아계 중년여성은 쬐그만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나와서 비둘기와 다람쥐를 가리키며 소곤소곤 설명해 주곤 한다.

내 나이 또래의 어떤 Walkeros는 엮은 줄로 여미는 수도승 차림의 외투를 걸치고, 주변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손에 든 라디오를 귀에 붙이곤 무언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사람처럼 땅바닥을 두리번거리면서 열심히 걷고 있다. 이 분과는 매일 마주치는데도 1년이 넘어서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안면을 트고 나니 퉁방울 같은 눈으로 건네는 인사가 제법 정겹게 다가왔다. 그리고 십여명의 할머니들이 양손에 스틱을 들고 대오를 형성하여 천천히 걷곤 했다. 어디 여고 동창생들일까? 혹은 같은 양로원 소속 할머니들일까?

늦은 오후에 마주치는 Walkeros들 중에는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처음엔 참 자애로운 조부모거니 하고 부러워했는데, 알고 보니 대부분 외국에 나가서 일하는 아들을 둔 가정이었다. 국민의 1/7이 해외 근로자인 나라의 녹록찮은 가정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Homo Erkindikus Romanceros

세 번째 Homo Erkindikus는 Romanceros다. 이들은 인류의 미래인 소중한 자원들이다. 대부분은 남녀 커플들로 손에 손을 잡고 걷거나, 때론 벤치에 앉아서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밤 늦도록 한없이 소곤거리는 데이트족들이다. 그러나 때론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몰려 앉아서 셀카를 찍으며 까르르 웃고, 어떤 소녀는 혼자서 뚫어지게 거울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정말 열심히 빗질을 하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 돼버린,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는 단아한 소녀의 모습도 에르킨딕 공원에선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장면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선 등굣길이다. 추워진 날씨에 어린 자녀들을 귀마개, 털목도리로 꽁꽁 여매 손잡고 등교시키는 어머니들, 엄마와 둘이서 자전거 타고 쌩하고 등교하는 어린 딸, 자기 키보다 커 보이는 가방을 메고 거북이 자세로 열심히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


Homo Erkindikus Retireeos

네 번째 Homo Erkindikus는 Retiereeos다. 에르킨딕 공원의 한켠에는 큰 말 머리 조각이 서있고 여러 개의 돌 책상에 체스판이 그려져 있는 구역이 있다. 이곳은 서울의 파고다공원이나 종묘 앞 광장처럼 늙은 영감들이 밤늦도록 체스를 두는 곳이다. 이 곳 또한 체스를 두는 사람보다 빙 둘러서서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곳으로 하릴없이 왈가왈부하는 재미로 모여드는 늙은 영감들의 해방구다. 개중에는 공책 들고 뭔가(아마도 영어)를 큰 소리로 외우는 할아버지도 있다. Retireeos 중에는 나를 마주치면 길 건너에서 “Mr. Hwang”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는 그 다음 영어가 안 나와서 쩔쩔매는 점잖은 노신사가 있다. 교육부장관을 역임했던 볼로트벡씨다. 일찍이 고위직을 하고 실업자가 된지 오래된 분이다. 이 분은 재기를 다짐이라도 하는 듯 컴컴한 새벽부터 산보를 하고, 밤에도 또 열심히 산보를 하시는 분이다.

Homo Erkindikus Exerciseros

다섯 번째 Homo Erkindikus는 Excerciseros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이들이 Runneros다. 이들은 달리기가 존재 이유인 듯 쉴 새 없이 달린다. 대부분의 Runneros들은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고 보는 사람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빨리 달리고, 쉬지 않고 몇 바퀴씩 돌아서, 아침 산보길에서만 여러 번 마주친다. 어떤 날씬한 젊은 여성은 두손을 가슴 위로 모은 채 바람결에 날아가는 나비인 듯 머리칼을 팔랑팔랑 날리며, 날렵한 동작으로 끊임없이 달리고 있고, 러시아계인 초로의 남성은 다가오는 늙음과 한판 결투라도 하려는 양 야구모자를 거꾸로 돌려쓰고, 초록색 야광 신발을 신은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씩씩거리며 달린다. 가장 예쁜 모습은 거의 매일 아침 아빠, 엄마를 따라 가로수 길을 몇바퀴씩 열심히 뛰는 러시아계 어린 소녀와 소년이다. 부모님 따라 뛰는 아이들도 대단하지만, 어떻게 애들이 자발적으로 뛸 수 있도록 권유할 수 있는지 그 부모님들의 능력도 대단하다.

다른 Exerciseros들은 폼들이 제 각각이다. 히잡 쓴 어떤 젊은 여인은 머리칼을 두건으로 숨기고, 허리띠를 질끈 졸라맨 체 프룬제(Frunze) 장군 동상 화단을 신속하게 20번쯤 돌고는 놀라운 유연성으로 몸을 풀곤 했다. 또 다른 중년여성은 향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머리 위로 두 손을 치켜들고 손 따로, 허리 따로 연신 흐느적 거리며 살과의 전쟁을 벌이곤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신장개업을 알리는 식당의 헛개비 광고 풍선 같은 모습이다.


Homo Tien Shanos

그러나 가장 괴팍한 Excerciseros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에르킨딕 가로공원을 걷는 꺼삐딴 늙은 이방인이다. 이 작자는 도무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생김새부터 약간 다르고, 키르기즈어라곤 어눌한 말투로 불과 몇마디 밖에 할 줄 모른다. 이 자는 어느 시절에 배워왔는지 아침마다 이상한 체조를 제법 절도(?)있게 실시하고, 비쩍 마른 주제에 큰 역기를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고, 자기가 무슨 뉴욕 양키즈 투수라도 된 양 폼 재며 와인드업하고, UFC 선수라도 되는 양 향나무 줄기를 향해 잽잽, 훅, 스트레이트를 날리고 양발로 킥을 하는 괴상한 이방인이다. 걷는가 싶다가, 뭔가 이상한 동작으로 손발을 쭉쭉 뻗고 있고, 그러다가 벤치에 앉아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한없이 멍 때리고 앉아 있고, 만약 주변에 사람이라도 없을 때는 벤치 위에 벌렁 드러눕기까지 한다. 하는 짓거리는 영락없이 방정맞은 젊은이인데, 벙거지를 뒤집어 쓴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면 늙은 영감이다. 그리고 봄부터 늦가을까지 만발한 장미를 뚫어지게 감상하고 한없이 찍어대는 이상한 사나이다. 그러니 이 작자는 딱히 어디에 분류해 넣기가 쉽지 않은 '괴물인간(Homo Monsteros)'이다. 그냥 개별 영장류인 Tien Shanos로 독자 분류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가 이 글을 쓰는 영감, '천산(Tien Shan)산인'이다.


Erkindik, the Freedom Park

에르킨딕 가로공원, 이 곳은 이 모든 괴상한 영장류들이 모여들고, 즐기고, 사랑하는 곳이다. 에르킨딕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닥에 눕는 것이다. 가끔 사람 눈을 피해 벤치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도, 곧게 뻗은 나무들도 하늘바다를 향해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듯 또 다른 별천지가 펼쳐진다. 에르킨딕, 이 곳은 자유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괴상한 영장류들은 이제는 내 가슴 속의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2026년 2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