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 자문활동을 마치며
출발, 고국으로 가는 길
2026년 1월 22일 새벽 비행기로 비슈케크를 떠났다. 1시간 이상 연착되어 새벽 4시 50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항공안전수칙을 설명하는 터키항공의 알록달록한 애니메이션이 명멸한 후, 이제 비행기는 허공을 향해 솟구쳐 흑암의 공간을 날아가고 있다. 그저 “우~웅”하는 기계음만 기내에 가득 울리고 있다. 심야 비행기를 기다리느라 지친 승객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떨구기 시작하건만 나는 선뜻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움도 아쉬움도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허무함에 가까운 무상(無想)의 감정이 가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곰곰이 돌이켜 본 만 2년의 키르기즈 체류기간은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당초에 무엇을 하러 왔다기 보다는 개발현장에 몰입해 보고 싶은 개발경제학자의 염원이 주 동기였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교수직 은퇴 후 스스로 유배생활(self-exiled)을 떠난다며 제주도로 은거한 후, 자그마치 3년동안 허구헌 날 유유자적 놀고먹는 꼴을 보다 못한 아내의 등쌀에 밀려 출국한 셈이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역만리에서 시작한 자문관 생활은 외로웠지만, 그래서 주어진 임무에 더욱 집중하고, 살아 온 인생 70년을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장사는 인간이, 봉사는 천사가
잘 모르시는 분들은 늙은이가 후진국에서 대단한 봉사라도 하고 온 줄 알고 측은해하신다. 키르기즈스탄에서 내게 주어진 미션은 ‘지식전수’, 그 중에서도 정부의 개발정책을 자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문활동도 크게 보면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해외봉사활동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열심히 봉사를 했는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이윤추구행위를 인간의 가장 중요한 행위규범으로 간주하는 경제학을 전공한 속인이 차라리 장사를 할지언정, 어찌 감히 천사들의 영역인 봉사활동을 감당할 수 있었으리오. 그저 유사 봉사활동에 종사하는 시늉만 했을 뿐... 생각해 보니 애시 당초부터 지원서의 “자문단 활동기간동안 반드시 해보고 싶은 일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란 첫 번째 질문에 “키르기즈스탄이란 나라와 국민, 지리, 역사를 탐구하고 사랑해 보고자 합니다.”라는 다소 엉뚱한 답변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던 엉터리 봉사자였던 셈이다. 그런 속물이 영어-러시아어로 된 제법 괜찮은 저서를 발간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기관, 대학에서 32회의 특강을 시행했으니 실상 적지 않은 일을 한 셈이다. 그리고 일과 시간 외에 키르기즈의 역사, 문화, 지리가 담긴 에세이를 수십편 써서 ‘한국인을 위한 지식전수 활동’도 하였다. 그것이 브런치에서 디지털 북으로 발간된 이 글, <새외별전>이다.
키르기즈의 백낙천(白樂天)
한편으로 키르기즈 자문관 활동은 내 체질에 딱 맞는 직장생활이었다. 나란 녀석은 애시 당초 경쟁력이 높지 않은 사람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해낼 만큼 유능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어떻게든 이겨내는 모진 성격도 못된다. 다만, 남의 비방을 무시할 만큼 이기적이지 못하고, 남의 손가락질을 감당할 만큼 뻔뻔스럽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남과 경쟁하지 않고 스스로의 업적으로 평가 받는 교수직이 내겐 천직이었다. 이런 내 게으른 천품이 더욱 잘 맞아 떨어진 것이 자문관 직책이었다. 후진국 정부조직 내에서 선진국 자문관이란 사람은 일을 맡기기엔 이방인이요, 무시하기엔 경륜이 높은 묘한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일을 열심히 하기도 어렵고, 열심히 할 수도 없는 직책이었다. 이른바 속세를 버리고 심산유곡으로 도피하는 소은(小隱)도 아니요, 조정에서 큰 일을 하면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는 대은(大隱)도 아닌 그 중간단계의 탈속(脫俗), 즉 중국 당나라의 낭만파 시인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추구한 <중은(中隱)>의 삶이 바로 이 자문관이었다. 백거이는 중은이 “물러난 듯, 일하는 듯, 바쁘지도 한가하지도 않고(似出復似處 非忙亦非閒),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고도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니(不勞心與力 又免饑與寒), 해가 다가도록 공무가 없어도 달마다 봉급이 나오는(終世無公事 隨月有俸錢)” 최고의 자리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공공의식이 없는 너무나 무책임한 공직자의 자세이다. 그러나 그는 무책임한 듯 중은의 생활을 추구하면서도 천고에 길이 남을 명시를 남겼으니 누가 그의 한가함을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백거이는 “사람이 한 세상 살면서 두가지 길을 온전히 하기 어려우니(人生處一世 其道難兩全), 빈천하면 춥고 배고파 괴롭고, 귀하면 근심이 많아진다네(賤卽苦凍餒 貴卽多憂患), 오직 이렇게 중은하는 선비만이 신세가 길하고 편안하나니(唯此中隱士 致身吉且安), 궁함과 통함 풍부함과 검소함 이 네 가지의 정 중앙에서 살아가노라(窮通與豊約 正在四者間)”라고 읊조리고 있다. 바로 그랬다. 자문관직은 바쁘기에는 일상업무에 참여할 수 없었고, 한가하기엔 스스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조직 내에서도 적당한 경외심을 자아냈고, 무슨 말을 하면 정론인가 싶어서 경청하는 분위기였다. 물질적으로도 궁하지는 않았으나, 통할 만큼 넉넉하게 지원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 중간 어딘가에서 스스로의 책임으로 일하고, 복잡하지 않은 인간관계 속에서 남는 시간을 소요(逍遙)할 수 있었다. 백거이가 스스로의 아호(雅號)를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고 일컫고, 술과 시 그리고 거문고를 ‘북창3우(北窓三友)’라고 부르며 즐긴 것처럼, 내 경우엔 스스로의 필명을 ‘천산산인(天山山人)’ 혹은 ‘천산우옹(天山愚翁)’이라고 일컬으며 매일 산보를 하고, 글을 쓰며, 여행을 하는 것이 키르기즈 생활에서의 세가지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순탄하게 살아온 시절이 키르기즈스탄에서 지낸 2년이었다.
귀로
그러나 세상일은 매양 그렇게 순탄하지 만은 않은 법이다. 2년간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2026년 1월 22일, 가벼운 마음으로 키르기즈스탄을 떠났다.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스에서 일주일간 귀로여행을 하고 당당(!!)하게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가소로운 생각이었다. 밤샘하고, 연착하고, 다른 비행편으로 갈아타고 늦게야 도착한 아테네공항에서 멋진 렌트카를 빌려서 비 내리는 밤길 산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다가 차가 그만 산비탈 아래로 쑤셔 박히는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약간의 찰과상만 입은 채 현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비록 반짝반짝한 렌트카 벤츠 GLC는 산속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지만... (이 과정은 후일 다른 글로 서술해 보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2026년 1월 30일 오후, 에티오피아 항공을 통해 고국으로 귀환했다. 키르기즈스탄의 국민작가인 친기스 아이트마토프(1928-2008)의 대표작이 <백년보다 긴 하루>인데, 내게 그리스여행은 2년보다 길었던 1주일이었다.
감사의 글
이렇게 70의 나이에 이른 노인이 키르기즈스탄 자문관 생활을 수행하고, 즐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한국국제협력단(KOICA) 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현지에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키르기즈 사무소의 임소연 소장 이하 여러 직원분들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개발도상국의 빈민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 및 봉사활동에 매진하셨던 천사같은 봉사단원, 거룩한 선교사님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혹시 자그마한 것이라도 내가 키르기즈스탄에서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만의 노력이 아니요, 주변인들의 협조와 은덕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감사한 나날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숨쉬기 힘들고, 한없이 지루한 낯선 땅, 천산산맥 넘어 후진국까지 따라와서 내 곁을 지켜준 늙은 아내의 노력도 한몫을 차지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2026년 2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