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슈케크의 동상 (1)

Ala Too 광장에서 필하모닉까지

by 천산산인

2025년 말 이집트 카이로의 기자(Giza)지구, 파라오 쿠푸(Kufu)의 피라미드로부터 2km 떨어진 사막에 거대한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름하여 The Grand Egyptian Museum(GEM). 단일 문명권의 박물관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유물은 11m 높이의 거대한 동상, 파라오 람세스 2세(1303 BC-1213 BC)의 석상이다. 이처럼 동상 건립은 이집트, 그리스-로마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서구 사회의 수천년된 전통이지만, 이를 국가 상징조작에 가장 활발하게 활용한 체제는 사회주의국가들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선전선동(propaganda)을 체제유지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고, 영웅숭배가 이러한 선전선동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는 대도시는 물론 작은 시골 길모퉁이까지 툭하면 무슨 영웅이란 호칭을 가진 동상들이 즐비하다. 키르기즈스탄도 예외가 아니다. 시내 곳곳에 수많은 동상들이 건립되어 있다. 따라서 키르기즈스탄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이들 동상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들이 키르기즈스탄을 일으키고, 키르기즈 민족의 정신세계를 일깨운 위인들이기 때문이다.

Manas Statue (old) at the Ala Too Square

비슈케크시는 3개의 광장을 중심으로 주요 공공건물들이 배치되어 있고, 이들 광장을 따라 도로와 교통축이 연결되어 있는 계획도시다. 즉, 동쪽의 승리광장과 서쪽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광장, 그리고 중앙의 알라투광장이 그것이다. 따라서 영웅들의 동상도 이 광장을 따라서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비슈케크시에 있는 동상들은 일부 정치인들의 동상도 섞여 있긴 하지만, 시인, 작가 같은 예술인들의 동상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해 키르기즈인들이 얼마나 문학과 예술을 중시하는 민족인가를 엿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비슈케크시에 있는 주요 동상들을 3개 구역/길을 따라 도보로 찾아가는 시각에서 소개한다. 우선 비슈케크시의 최중심부로 꼽히는 알라투광장과 그 남쪽의 넓은 분수대가 바라보이는 키에프(Kievskya) 거리의 동쪽 방향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자.

(1) Chinghiz Aitmatov 동상

알라투 광장 앞 넓은 분수대를 지나 Kievskya 도로를 건너면 정면에 현재 농업부 건물로 쓰고 있는, 5개의 반원형 아치 입구와 황금빛 돔이 배치된 웅장한 건물이 있다. 그 건물 앞 정중앙, 붉은 대리석으로 기단을 쌓은 꽃밭 위에 양복 윗도리를 오른손으로 어깨에 걸치고 정면을 향해 서있는 전신상이 있다. 이 분이 키르기즈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칭기즈 아이트마토프(1928-2008) 씨다. 아이트마토프는 1928년 키르기즈족 아버지와 타타르족 어머니 사이에서 키르기즈스탄 서쪽 끝에 있는 도시인 탈라스시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열 살 무렵 탈라스 지역의 공산당 지도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스탈린 집권기의 ‘대숙청기간’에 자본주의에 물든 반동분자로 몰려 구속되고 처형당한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후 이른 나이부터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나이 18살이 되는 1946년에 당시 수도 프룬제에 있는 키르기즈농과대학에서 수의사 과정을 수학하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모스크바로 가서 ‘막심 고르키 문학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다. 이 시기 그는 초기 습작을 여러 편 발표하나 문단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졸업 후에는 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서 8년 동안 일하면서 1958년 발표한 중편소설 <자밀라>로 유명해진다. 이 소설은 키르기즈의 한 여성(Jamila)이 전통적 가치와 사회주의 이념이 충돌하는 시골마을에서 전쟁으로 남편과 사별한 후 그 마을에 있는 상이군인과 사랑에 빠져서 살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아이트마토프는 스탈린 집권기가 끝난 1959년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한다. 그리고 1963년 4편의 창작소설을 묶은 <산과 초원의 이야기>를 발간한 후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최고의 문학가에게 수여하는 ‘레닌상’을 수상한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적 현실주의(socialist realism)’의 이념적 소설을 지양하고 종교, 생태환경, 인간의 가치 등에 대한 순수 문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그는 구전되어 오는 키르기즈 민족의 민속설화를 20세기의 현실 속에 투영하여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면서 줄거리를 잡아가는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들 간의 교감이 주요 오브제(objet)로 등장한다. 이러한 독창적인 소설기법으로 그는 소비에트 문단의 극찬을 받고, 국제적으로도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소설은 여러 편의 영화로 각색되어 상영되었고, 1960년대 이래 러시아문학권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부상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그는 소비에트연방의 정치권에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문화 고문으로 초빙되었고, 소연방의 주 룩셈부르크 대사로 임명된다. 키르기즈가 독립한 이후에도 그는 주 EU, 베네룩스, 프랑스 대사로 활동한다.

Chinghiz Aitmstov

그는 키르기즈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다. 그만큼 그의 이름은 길 이름, 공원 이름의 인물로도 등장하면서 키르기즈인들에게 높이 추앙되고 있다. 그는 러시아 뿐 아니라 구 소비에트연방의 많은 나라에서 훈장을 받았고, 그의 동상도 여러 국가에 건립되어 있다. 2008년 그가 서거했을 때는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고, 전 국민의 애도 하에 독립 이후 최대의 국민장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그의 묘역은 비슈케크시 외곽, 천산산맥이 굽어보고 있는 Ata Beyit 추모공간에 마련되어 있다.


(2) Manas 동상

다시 시야를 북쪽으로 돌려서 분수대 광장을 지나 하얀 대리석 건물, 국립역사박물관을 바라보면 알라투 광장 정중앙에 키르기즈스탄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동상이 서있다. 키르기즈 민족의 영웅인 마나스 장군의 기마상이다. 마나스장군은 다분히 전설 속의 인물이다. 호모의 『오디세이』보다 20배나 더 긴 세계에서 가장 긴 구전 서사시 『마나스』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키르기스 민족의 영웅이다. (마나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본 BRUNCH e-book의 제3편 <키르기즈의 영웅: 마나스>를 참조하시기 바람.) 그러나 그의 행적은 전설 속에서 살아 있을 뿐, 역사 속에서 확인되지는 않는다. 단지 9세기 키르기스 부족이 위구르왕국을 멸망시킬 때 활약했던 장군으로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구전 서사시 속 그와 그의 아들(Semetei), 손자(Seitek)의 행적은 세대를 이어가며 점점 미화되고 과장되어, 현재 불러지고 있는 이야기에는 그가 중국 통일왕조의 수도인 북경까지도 점령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나스 구전 설화는 표준 스토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신 내림을 받은 ‘마나스치’들이 강신한 상태에서 읊조리는 말들이 모아진 것이기에 오늘날도 새로운 이야기로 각색되고 지어내지고 있다. 근래에 와서 채집된 가장 긴 마나스시는 Sayakbai Karalaev의 서사시로 500,553문장에 600여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1995년 마나스 서사시 1,000년 기념행사가 열렸고, 마나스 서사시는 UNESCO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알라투광장의 마나스상이 놓인 자리는 소비에트 시절에는 커다란 레닌의 입상(立像)이 놓여 있던 레닌광장이었다. 키르기스인들은 독립 후 많은 나라에서 그러했든 것처럼 레닌동상을 목매달아 끌어 내리는 대신, 2003년 역사박물관 뒤편으로 이전해 놓기만 한 상태다. 그리고 그 자리엔 자유의 여신상, 즉 에르킨딕상을 건립해 놓았다가, 2011년 마나스상으로 교체된 것이다. 당초의 마나스상은 왼손에 만도를 들고 말 위에 의젓하게 올라 탄 점잖은 장군상이었다. 그러나 2024년 키르기즈 소비에트 공화국 건국 100년과 독립 33주년을 맞아, 동상 옆쪽에 있던 40m 높이의 국기봉을 100m 높이로 올리고, 가로길이 33m의 깃발을 게양하고 나니 마나스상이 장난감 기마상처럼 초라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느낌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2025년 독립기념일을 맞아서 기존의 동상과 기단을 허물고, 더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천마처럼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모양의 보다 역동적인 동상을 건립해 놓았다. 그런데 이번엔 마나스장군을 강조하다 보니 그가 타고 있는 말이 불균형적으로 작아 보인다. 마치 거인이 힘들어하는 조랑말을 타고 가는 느낌이랄까? 현재 알라투 광장에 건립된 마나스상은 시청 앞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건물 앞 분수대에 서있는 마나스상을 흉내 내어 역동적인 모습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필하모니아의 동상이 뒤로 칼을 꺼내든 채 용과 더불어 바야흐로 눈앞에 있는 적을 베어버리는 자세라면, 알라투 광장의 마나스상은 어깨에 솔개를 얹고, 깃발이 달린 긴 창을 수직으로 꼬나든 채 저 멀리 보이는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으로 필하모니아의 동상에 비해서는 보다 정적인 모양새다.

(3) Bishkek Baatyr 동상

알라투 광장 동쪽에 있는 황금색 돔을 가진 건물은 비슈케크 최초의 근대식 2층 건물로, 키르기즈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청사로 건립된 역사성을 자랑하고 있다. 2024년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현재는 문화정보청소년부 청사로 사용 중이다. 그 건물 동쪽 끝 추이대로를 바라보는 위치에 당당한 자세로 서있는 동상이 Bishkek Baatyr(1700-1755/57) 장군의 동상이다. 이 동상의 옆으로는 방패와 투구 그리고 칼이 놓여있고, 동상 뒤편에 안테나처럼 생긴 둥근 원판이 설치된 특이한 구조물이다. 동상의 주인공은 19세기 초반 키르기스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중가리아(Dzungaria, 오이라트 몽골계) 침략자들에 대항해서 싸운 키르기스의 영웅이다. 그는 1,700년 키르기스 서남쪽 사리첼렉(Sary-Chelek)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 그의 아버지인 Er-Kobok Baatyr는 국토의 남쪽인 Alai계곡으로 침공해 온 중가르 군인들과 전투 중 전사하였다고 한다. (Baatyr 혹은 Bhagatur는 몽골 및 터키어로 “하늘이 나은 용감한 영웅”이란 호칭) 그의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의 집에 걸려 있던 달력에 “그들이 나무를 부러뜨리나, 한 가지가 살아있다”란 문구가 쓰여 있었기에 아기는 Butak(가지)이란 이름을 받았고, 사람들이 그를 Buta라고 불렀다. 그가 자라는 동안은 중가르 왕국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745년 중가르 칸인 갈단 체렌(Galdan-Tseren)이 죽자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고, 이후 즉위한 칸들이 단명하게 되면서 중가르 왕국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키르기즈 측의 구전 역사에 의하면) 1745년 키르기스, 카자크, 우즈벡, 위구르, 타지크 민족이 연합하여 50,000명의 군대가 중가르에 대항하게 되고 그 때의 총사령관이 Bishkek Baatur라고 한다. 연합군은 아르칼룩(Arkalyk)이란 도시를 함락시키고, 그 곳을 총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Bishkek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Bishkek Baatur의 죽음에 관해서는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째는 1755년 중가르와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전장을 정리하는 중, 상인복장으로 위장한 중국 청나라 황제 건륭제가 보낸 자객들 7-8명이 갑자기 활을 꺼내서 말에 탄 비슈케크 바아투르의 등을 쏘아 현장에서 죽였다는 설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마지막 전투에서 적군들이 그를 에워쌌지만 그가 다 물리쳤을 때 중가르의 궁수 두 명이 그에게 여러 발의 화살을 쏴서 그 상처로 인해 죽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중가르제국의 멸망에 관한 정사를 보면, 중가르제국은 주력부대가 오늘날의 외몽골 지역에서 청나라 건륭제의 군대에 의해 패퇴되면서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중앙아시아에서는 1723년부터 1730년까지 카자흐 왕국과의 전투가 지속되다가 서쪽 변방에 남아있던 중가르 왕국의 잔류병력이 1729년 오늘날의 알마티 인근 Anyragcei강 인근에서 카자흐의 지배자인 Abdul-Khair Muhammed(1710-1748)에 의해 궤멸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뤄볼 때 Bishkek Baatur의 역할을 중가르 주력부대를 격파한 것으로 칭송하는 키르기스의 구전 스토리는 상당부분 과장-왜곡된 서술일 것으로 추론된다.

동상의 뒷 배경으로 건립된 흰색 원판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도시 위로 제비들이 날아다니는 모양새다. 원판의 이면에는 꼬리에 백조의 머리를 매달고 있는 날개달린 설표(눈 표범)가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무늬는 고대 유물에서 발견된 문양으로 중앙아시아 지역 민족들의 신앙의 대상물로 사용된 상상의 동물이다. 비슷한 디자인이 비슈케크 시의 문장(coat of arm)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키르기즈공화국의 수도였던 프룬제는 독립과 더불어 동상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의 비슈케크로 불리게 되었다. 그 연원과 의미를 담은 동상이 비슈케크 바아투르의 동상이다.

(4) Aidarbekov Imanar 동상

비슈케크 바아투르 장군의 동상을 뒤로 하고 다시 북쪽으로 걸어가서 푸시킨거리에 이르면, 문화정보청소년부 건물 정면을 바라보는 위치에 수십기의 흉상이 건립되어 있는 공원 산책길이 나타난다. 이 길은 소비에트 시절 이래 키르기즈 공화국의 유명 정치인들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는 ‘키르기즈 건국인의 길(Alley of Founders of Kyrgyz Statehood)’이다. 그 길의 시작점, 맨 앞 중앙에 코트를 벗어서 연단에 걸쳐 놓은 채 오른손에 서류를 들고, 공산당 근로복을 입고 서있는 카이젤 수염의 신사 동상이 있다. 이 분이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초대 혁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신 아이다르베코프 이마나르(1884-1938)다.

Aidarbekov Imanar

그는 비슈케크 원예학교와 타슈켄트 수력기술대학을 졸업한, 당시로는 엘리트 교육을 받은 분이다.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 시기, 그는 유목민들의 정착생활을 지원하는 행정을 담당하였다.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되자 그는 자진하여 동참하였고, 볼세비키를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는데 앞장 서는 등 소비에트 국가 수립 활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 공로로 1919년 말 그는 공산당 비슈케크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23년 봄에는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남동부와 키르기즈스탄 북부를 포괄하는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지방 도인 Semirechye Oblast의 행정수반으로 임명된다. 1924년 10월 21일 모스크바의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현재의 키르기즈스탄에 해당하는 ‘카라-키르기즈 자치도’를 승인하고 아이다르베코브는 초대 혁명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소비에트 중앙정부의 중앙아시아 정책을 비판하고 개선책을 촉구하는 ‘30인의 성명서’에 참여한 이유로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의장직에서 해임되고, 공산당에서도 축출된다. 1927년 Abdrakhmanov가 Sovnarkom(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자 그는 복권되어서 국가경제중앙위원회 의장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1937년 남부 산악주(오늘날의 바트켄 주와 타지키스탄 일부 포함)의 형성과정에서 터키계 우랄-알타이 민족의 독자성을 주창하는 ‘Social-Turan당’의 당원이 되어서 폭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1938년 11월 5일 처형된다.

아이다르베코프는 현재의 키르기즈스탄의 영토가 단일 민족 지치구로 인정받은 이후, 즉 최초의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춘 키르기즈스탄의 최초의 국가수반급 인물이다. 그는 모스크바의 소비에트연방 통치 속에서도 끊임없이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제국 건설에 혈안이 되었던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인물이다.


(5) Yusup Abdrakhmanov 동상

아이다르베코프 동상의 오른 쪽 도로변에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정치노선을 걸었고, 같은 사건으로 구속되어, 같은 날 처형당한 또 한 분 키르기즈 민족지도자의 흉상이 서있다. 그 분이 키르기즈 자치공화국의 초대 수상을 역임한 유수프 압드라흐마노프(1901-1938)다. 그는 오늘날의 카라콜 시 인근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의 유력한 원로로 1916년의 대소 민중봉기(Urkun)를 주동하는 와중에 병사한다. 그의 어머니와 가까운 친척 7명은 제정러시아 진압군에 의해 피살당하고, 그와 그의 8살 어린 남동생만 겨우 살아남는다. 15살 나이에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다니던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몇해동안 그는 온갖 허드레 일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져야했고, 그 과정에서 봉건주의적 제정러시아 체제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고향 인근에서 전투에 종사하였고, 이후 키르기즈 Komsomol(공산당 청년동맹) 창립에 적극 참여한다. 18살 때인 1920년 그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3차 공산당 청년동맹대회에 키르기즈 대표로 참석하고, 의장단 멤버로 선출된다. 그때 그는 레닌의 옆자리에 앉아서 중요한 사안들을 토론한다. 이후 그는 키르기즈스탄과 카자흐스탄 동남부 지역의 공산당 지도자로 부각된다. 1925년 이래 그는 모스크바의 중앙당에서 중앙아시아의 지도와 민족간 경계를 확정짓는 중요한 일에 종사한다. 그는 이시쿨 호수에서 아랄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하나로 묶고, 잘랄라바드를 수도로 하는 Kara-Kykyz-Karakalpak자치주의 결성을 주창한다. 비록 그의 제안은 수용되지 못했지만 그는 현재의 키르기즈스탄 영토를 키르기즈 민족의 자치구역으로 확정 짓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그는 당대 최고의 혁명시인으로 꼽히던 마야코프스키(Mayakovsky, 1893-1930)의 문학써클에 드나들면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교분도 쌓는다. 1927년 3월 12일, 그는 새로 승격된 키르기즈 소비에트 자치공화국의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된다. 그의 나이 불과 26살 때의 일이다.

Yusup Abdrakhmanov

그는 1933년까지 그 자리에 있으면서 때로는 중앙당의 지시에 반기를 들면서까지 독자적인 정책을 집행한다. 1929년 11월과 1930년 4월에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키르기즈를 보다 독립적인 ‘연방 자치공화국’으로 승격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국가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1930년대 초 키르기즈 자치공화국의 경제적 위기 속에서 그는 스탈린의 개혁정책을 불신하게 된다. 특히 그는 유목민을 강제 정착시키고, 그 땅을 몰수하여 생산된 곡물을 중앙정부에 공급하는 스탈린식 집단농장체제 도입을 거부한다. 그는 볼세비키 중앙당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 공화국을 카자흐스탄처럼 만드는 것보다 그 계획을 이행하지 못해서 당에서 제명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라고까지 항변한다. 이로 인해 그의 집권기 키르기즈스탄은 소련 연방국가 중 가장 빠른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1930년대 초반의 대기근을 예방할 수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서는 집단농장화의 부작용으로 대기근이 발생하여 수백만명이 굶어죽었으나 키르기즈스탄은 기아를 예방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Asharshyryk’이라고 불리는 1930년대 초의 대기근 시절에 키르기즈스탄은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와 볼가지역에서 온 수십만명의 굶주린 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소비에트연방 전체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잘못된 정책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압드라크마노프를 민족주의를 추동하여 소비에트 질서를 훼손시키는 반동분자로 몰아간다. 이 과정에서 그가 평생에 걸쳐 쓴 일기가 유력한 증거물로 채택된다. 1933년 스탈린은 그의 수하 정치국원들에게 “압드라크마노프의 일기를 읽어 보아라. 그가 트로츠키파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라고 지시한다. 1933년 9월 그는 중앙당으로부터 “트로츠키파의 영향하에서 해당행위를 저질렀다“는 추궁을 받고 그 자리에서 축출되어, 시베리아 지방도시의 한직으로 배치된다. 그의 복권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37년 4월 4일 그는 ‘인민의 적’으로 구속되어 프룬제로 압송된다. 비밀정보국은 조사과정에서 그에게 실제 존재하지 않는 우익적 트로츠키 조직인 ‘사회주의 튜란당”의 당원으로 영국의 지시 하에 키르기즈를 독립시켜 부르주아국가를 설립함으로써 소비에트 체제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어마어마한 죄명을 씌워 버린다. 그는 모진 고문을 받고 조작된 심문서에 서명을 강요받지만, 곧 그 사실을 번복한다. 그는 1938년 11월 3일 총살된다. 당시 그와 함꼐 총살당한 137인의 시신은 1991년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된 이후에야 발굴되어 비슈케크 인근의 Ata-Beyit 묘역에 안장되었다. 소비에트 집권기 내내 그는 인민의 적으로 격하되어 반역자의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다. 그러나 독립 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2021년에야 ’키르기즈 공화국의 영웅‘이란 칭호가 부여되었다. 그를 옭아맸던 그의 일기는 오늘날 키르기즈공화국의 중요 국가기록물로 지정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의 등재도 추진하고 있다. 그의 동상은 고국뿐 아니라 터키, 카자흐스탄에도 건립되어 있다. 가장 거대한 그의 동상은 고향인 카라콜 시 중심부에 건립되어 있다.


(6) Vladimir Lenin 동상

‘정치인의 길’의 서쪽 방향으로 평행으로 난 Razzakov 거리를 따라 역사박물관 뒤편으로 가면 한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고 전 대통령궁(현 경제상무부와 외교부)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상이 있다. 동상의 높이만 10m에 이르는 거대한 입상이다.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연방을 건립한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의 동상이다. 이 동상은 당초 키르기즈의 소련연방 가입 60주년을 맞아서 1984년 비슈케크의 최중심부에 광장을 조성하고 레닌광장으로 명명하면서 광장 중심에 건립된 동상이었다. 1990년대 초 소연방의 붕괴와 더불어 각국에서 레닌동상이 쓰러지고 부서지는 수난을 당했으나 키르기즈스탄에서는 2003년까지 훼손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그 당시 키르기즈 국가형성 2,200주년 기념행사가 기획되면서 상당한 논란 끝에 레닌동상을 역사박물관 뒤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키르기즈 공화국의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는 ‘에르킨딕 여신상’이 건립되었다가 뜬금없는 동상이라는 비판이 일자, 혁명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2011년 마나스 장군의 동상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레닌의 동상은 자리만 옮겼을 뿐 아직도 키르기즈 행정부를 굽어보는 자리에서 혁명정신을 설파하고 있는 듯 근엄한 자세로 우뚝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레닌의 동상이 아직도 국정의 중심부에 건재한 모습을 보면 키르기즈스탄은 여전히 사회주의적 이상을 품고, 그 시절을 동경하고 있는 나라인 것처럼 보인다.

사회주의 사상가들

레닌동상의 아래 쪽 대법원 앞 Old Square 공원 끝단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연상시키는 긴 수염을 가진 두 노인이 오순도순 얘기하는 모습의 자그마한 동상이 있다. 사회주의 사상의 바이블인 <자본론(Das Kapital)>을 공동 집필한 두 독일인 ‘칼 막스(Karl Marx, 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동상이다. 독일 베를린 Marx-Engels Forum에 있는 형형한 눈빛의 두 분 동상에 비하면 비슈케크의 동상은 마냥 다정하기만 하다. 참고로 오쉬 주청사 앞에 있던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 높이 23m의 레닌동상도 2026년 2월초 철거되었다.

(7) Tattybubu Tursunbayeva 동상

레닌동상을 뒤로하고 북쪽 방향으로 공원을 걸어 나가면 제법 넒은 도로가 나온다. 비슈케크인들은 이 도로를 ‘구 광장(Old Square)’이라고 부른다. 길 건너 편에는 그리스 신전처럼 8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있는 웅장한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이 2024년까지 대통령 및 수상실로 쓰이던 소위 ‘White House’다. 현재는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서쪽)은 경제상무부가, 오른쪽(동쪽)은 외교부가 사용하고 있다. 경제상무부 왼쪽 길 건너, 드라마센터의 북쪽으로 정사각형의 자그마한 공원이 있다. 그 공원 정중앙 화단에 약 3m 높이의 황금빛 신전기둥이 서있고, 그 위에 우아한 자태의 여인의 흉상이 놓여있다. 이 여인이 ‘키르기즈 극장의 여왕’이란 별칭으로 불린 인기 여배우 ‘타투부부 투르순바에바(1944-1981)’이다.

그녀는 나른의 산골마을인 차에크의 집단농장에서 음악적 재능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16살의 나이에 단역으로 첫 데뷔를 하였고, 17살에 타슈켄트에 있는 연기학교에 입학한다. 22살 때인 1966년에는 키르기즈 국립극장의 단원이 되어 명작의 여주인공 역할을 맡는다. 1968년에는 Ak-Meer란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영화계에서도 최고 스타자리에 오른다. 1971년 ‘불 숭배’란 영화에서 열연하는 등 30여편의 연극과 영화에서 여주인공 역을 담당하면서 키르기즈는 물론 중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배우로 사랑 받는다. 그녀는 미모와 가창력을 겸비한 재주꾼으로 특히 비련의 여주인공 역을 잘 소화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인기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지 않았고, 당시 소비에트 당 이념에의 헌신으로 농부들까지도 그녀를 존경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1960년대-1970년대 키르기즈 미인의 대명사이자 기준으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란 말이 맞는 듯 그녀는 37살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키르기즈 영화계의 전설이 되었다. 사후에 그녀는 키르기즈 소비에트공화국의 인민예술가로 추대되었다. 타슈켄트 연기학교의 동기생이었던 배우와 결혼하여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두었으나 결혼생활 9년만에 이혼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연기생활을 계속하였다. 드라마센터 근처 공원의 흉상은 2022년에 건립되었다.

(8) Ivan Panfilov 동상

타투부부의 동상이 있는 공원을 서쪽 방향으로 벗어나면 길 건너로 회전관람차가 있는 놀이공원이 보인다. 공산당을 상징하는 별 모양으로 조성된 그 놀이공원이 판필로프공원이고, 그 앞 길이 판필로프 거리다. 판필로프 공원과 국회의사당 건물 사이에 조성된 화단에는 비슈케크에서 가장 멋진 포즈를 잡고 서있는 러시아 군인의 동상이 있다. 동상의 인물은 정복 차림으로 목에 쌍안경을 걸치고, 왼손으로 작전지도를 움켜쥔 채 오른손 손가락을 앞으로 뻗어 진군을 지시하는 근엄한 장군의 모습이다. 동상 아래 기단에는 2개의 부대 깃발이 늘어져 있고, 전투장면도 부조로 양각되어 있다. 이 동상의 인물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이반 판필로프(1893-1941) 장군이다.

이반 판필로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침공하는 독일군에 맞서 모스크바를 지키는 과정에서 전사한 장군이다. 그는 11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학업을 중단하고 생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22살 때인 1915년 군인으로 징용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붉은 군대(볼세비키)에 참전하여 내전에서 공을 세우고 승진을 거듭한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키에프에 있는 보병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에는 당시까지도 진행되고 있던 대소 게릴라 항쟁인 ‘바스마치(Basmachi) 반란’ 전투에 자원하여 중앙아시아로 건너 와서 Mikhail Frunze장군의 휘하에서 반란군 토벌에 참여한다. 이후 그는 1941년까지 17년동안 중앙아시아에 주둔하며 지역사령관으로 소장까지 승진한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전선으로 보낼 중앙아시아 병력을 징빕하여 그 해 10월 모스크바 방위전투에 투입된다. 그의 부대인 ‘제316 소총사단’은 다른 소비에트 방위군과 함께 맞서 싸우나 독일군 주력부대의 화력 앞에서 계속해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분투로 독일군의 모스크바 진군이 여러 날 지연되어 도시 방어의 시간을 벌어준다. 11월 15일의 전투에서는 판필로프 장군 휘하의 28인의 용사들이 최후의 한사람까지 산화하면서 독일군 전차 18대를 폭파시켜서 독일군의 진격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 11월 17일 소련군 사령부는 제316 소총사단을 경호단급 특수부대로 격상시키고, ‘제8 경호소총사단’으로 명명한다. 이 영예로운 결정을 알려주기 위해 종군기자단이 판필로프 장군이 주둔하고 있는 시골 마을인 구세니오보를 방문한다. 그러나 야외에서 전황을 설명하는 도중 판필로프 장군은 독일군의 포격으로 그 자리에서 전사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11월 23일 ‘제8 경호사단’은 ‘Panfilovskaya’란 별칭을 받고, 그의 부하들은 ‘Panfilovtsy(판필로프의 사람들)’로 불린다. Panfilovskaya부대는 12월의 모스크바 탈환작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하는 거의 마지막 전투인 라트비아 반도 전투에도 투입되어 독일군 섬멸의 주력부대가 된다. 1942년 판필로프 장군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웅’이란 칭호를 받는다.

판필로프 장군의 이야기는 1944년 러시아 작가 알렉산더 벡(Alexander Bek)이 판필로프 장군의 휘하에서 종사하던 카자흐스탄 출신 장교의 시각으로 쓴 종군소설 <Volokolamsk Highway>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진다. 그는 1960년대 초 <Several Days>, <General Panfilov’s Reserve>란 소설 두권을 추가 집필하여 3부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28인의 판필로프 사단의 전투가 지나치게 과장된 무용담이고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영웅조작이라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비슈케크의 판필로프공원은 1924년 공산주의의 상징인 5각형 별모양으로 조성되어 ‘Zvezda(별)공원’으로 불리다가, 1942년 Ivan Panfilov공원으로 개명되었고 1944년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는 소비에트 전역에서 최초로 건립된 판필로프 장군상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아름다운 ‘성모승천성당’이 있는 공원은 ‘28인의 판필로프 경호원 공원’으로 개명되고 그들의 전투장면을 상징하는 거대한 조각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설치되어 있다. 그 밖에도 소련 전역에 판필로프를 기리는 동상과 거리, 도시 이름까지 등장하였다. 키르기즈스탄에는 4,300m 높이의 설산 봉우리에도 그의 이름이 헌정되어 있다. 그런데 독립 후 3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중앙아시아의 반러시아 저항운동을 진압하고, 중앙아시아 젊은이들을 이끌고 모스크바 방어에 나섰던 러시아 군인의 동상을 수도 한 복판에 세워두어야 하는지, 이방인의 시각으로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다.

(9) Keba uulu Kozhomkur 동상 (1889-1955) 거인상


판필로프 동상 뒤편으로 국회의사당 뒷담 길을 따라 5분쯤 공원길을 걸어가면 Togolok-Moldo거리에 이른다. 그 길 건너편에 삼각형 모양으로 지은 현대식 실내체육관이 있다. 그 체육관으로 향하는 초입에 매우 독특한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키르기즈 전통모자인 칼팍을 쓴 근육질의 남자가 어깨 위로 말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전설에 등장하는 거인인가 싶은 이 동상의 인물은 놀랍게도 실존 인물인 Kozhomkur(1889-1955)란 이름의 거인이다. 그는 비슈케크에서 오쉬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는 3,000미터급 고원지대인 수사무르의 소박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목동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라면서 거인으로 변모한다. 키가 230cm에 몸무게는 164kg에서 203kg 사이를 유지하는 장한(壯漢)이 된다. 그는 20세기 초 운동선수로 레슬링 시합 등에 출전하여 유명인사가 된다. 1,500파운드(약 660kg)의 바위를 들고, 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는 괴력의 사나이로 유명세를 탄다. 그러나 그는 우승상품으로 받은 가축을 가난한 이웃에게 기증하는 등 선행을 베푼다. 그리하여 그는 ‘점잖은 거인(Gentle Giant)’란 별명을 얻고, 키르기즈인의 강건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된다. 수사무르 고원에 있는 그의 고향마을은 ‘코촘쿨’ 마을로 개명되고, 그는 민족의 ‘호걸(baatur)’이란 호칭을 받는다. 그의 동상 배후에 있는 실내체육관도 그의 이름을 따서 ‘Kozhomkur 스포츠 전당’으로 명명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20세기판 키르기즈의 헤라클래스인 셈이다.

(10) Pamyatnik Yusup Balasaguni 동상

Kozomkur 장사의 동상에서 ‘Togolok-Moldo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두 블록을 가면 ‘Frunze거리’에 이르고, 좌회전을 하여 ‘푸룬제 거리’를 따라 세 블록을 더 걸어가면 비슈케크의 중심도로 중 하나인 ‘Manas거리’에 다다른다. 그 길을 건너면서 키르기즈 국립대학교 캠퍼스가 펼쳐져 있다. 다시 한 블록쯤 서쪽으로 더 걸어가면 분홍빛으로 칠한 그리스 신전 모양의 국립대학교 본관건물이 있고, 그 정중앙에 이슬람식 전통복장을 입고, 오른 손에 책을 든 채 남쪽 설산을 향하고 서있는 노인의 동상이 있다. 이 분이 터키어권 최고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숭상 받는 유수프 발라사구니(1019-1077)다.

그는 터키계 언어권 최초의 시집으로 인정받는 <Kutadgu Bilig>의 저자이다. 시편 형식으로 쓰여 진 이 책에서 그는 유일 신 알라를 찬송하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이슬람 신앙에 입각하여 모든 이들이 잘 사는 공평한 사회를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저서의 중요성에 비해, 그의 삶의 행적은 덜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는 부라나탑이 있는 키르기즈스탄의 도시 토크목(Tokmok)의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고향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 이후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의 문화정치적 중심지였던 카슈가르, 부하라 같은 큰 도시의 마드라샤(이슬람식 고등교육기관)에서 유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도 유창하게 구사하였다. 50대 초반에 이르자 그는 카슈가르(오늘날 중국 신장성의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도시)에 도착하여 (이 때쯤 그는 저명한 학자가 되어 왕의 초청을 받아서 간 것으로 추측된다.) 열심히 저작활동에 매진한다. 그리하여 54세의 나이에 젊어서부터 구상해 왔던 책 <Kutadgu Bilig (‘축복받은 지식’, 혹은 ‘행복을 가져오는 지혜’)>란 저서를 지어 당시 카슈가르의 지배자에게 헌정한다. 책의 내용에 흡족해진 지배자는 그를 ‘수상’직에 해당하는 최고의 예우를 한다. ‘지혜의 삯‘인 셈이다. 이 책은 그 내용뿐 아니라 언어문화학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의 주류언어인 아랍어나 페르시아어가 아닌 고대 터키어로 쓰여진 최초의 책이었단 사실이다. 그는 10세기 초반 건국되어 약 3세기동안 존립하면서 중앙아시아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카라카니드 왕국을 대표하는 백과전서적 학자중 한명이다. 문학뿐 아니라 천문학, 수학, 의학, 민속 장기, 민속 게임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Kutadgu Bilig> 이외에도 “정치학”과 “백과사전‘도 썼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터키어권 국가에선 그를 Yusuf Haas Hajib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여러 나라에 그를 기리는 동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의 묘역은 사후 800여년이 지난 1865년 카슈가르에 대규모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중국 문화혁명기인 1972년에 파괴되고 그 자리에 학교가 건립되었다가 다행히 모택동의 서거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는 키르기즈 1,000솜 화폐의 등장인물이자 키르기즈 국립대학교의 이름으로 명명되어 키르기즈를 대표하는 문화적 영웅으로 여전히 존숭받고 있다.

그의 탄생지인 토크목은 동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위대한 두 예술가의 고향이다. 701년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중국 최고의 시인 이백이 태어나서 5살 때까지 산 동네이자, 300여년 후 터키어권을 대표하는 또 한 분의 위대한 시인/학자인 발라사구니가 탄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어찌 한적한 초원의 벌판에서 두 문명을 대표하는 최고의 시인이 탄생할 수 있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아마도 당시 토크목이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하는 실크로드상의 융성한 도시였고, 설산을 바라보는 웅대한 경치 속에서 시심이 배태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11)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하우스 주변의 동상들

국립대학교 정문에서 남향, 즉 발라사구니 동상이 응시하고 있는 방향으로 폭 50m 쯤 되는 보기 좋게 화단이 조성된 넓은 보행자 전용도로가 있다. 거기로부터 약 1km 밖,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국립대학교 건물과 대칭을 이루어지어진 듯, 하늘색으로 칠한 고대 신전 양식의 건물인 비슈케크 시청 건물이 있고, 그 너머로 설산 산맥의 장관이 바라다 보인다. 2/3쯤 왔을 때 왼쪽으로 웅장한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보인다. 이 곳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하우스다. 그 앞, 넒은 분수광장 중앙에는 말에 올라탄 장군의 동상이 우뚝하고 그 좌우로 2기의 동상이 분수 물줄기 위로 솟아 있다. 서사시의 주인공인 마나스 장군과 그의 아내인 카누케이(Kanykei), 그리고 마나스의 명 참모인 바카이(Bakai)의 동상이다. 이 곳의 마나스 장군상은 용마(龍馬)로 표현되는 그의 명마 토루차르(Toruchaar)에 올라탄 마나스가 큰 칼을 뽑아들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매우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그의 부인인 카누케이는 긴 원뿔 모양의 전통모자인 쇼쿨로를 쓰고 단아하게 서 있다. 광장 둘레로는 마나스 서사시의 명창들인 마나스치들의 흉상이 열댓개 정도 건립되어 있다.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건물에는 시인이자 작곡가이며, 근대 키르기즈 문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Toktogul Satylganov의 이름이 명명되어 있다. 광장 건너 교회 첨탑 같은 뾰쪽탑이 설치된 건물은 ‘키르기즈 국제대학교’이다. 따라서 이 주변은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비슈케크의 또 다른 랜드마크, 활력 넘치는 중심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