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통과한 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공기는 무겁고, 시간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발밑의 땅은 단단하지 않았고, 마치 기억 위를 걷는 것처럼 미끄러웠다.
모든 방향이 길이었고, 동시에 막다른 길이었다.
눈을 들어보니, 하늘은 없었다.
대신 나를 감싸는 거대한 벽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벽은 돌이 아니었다.
벽은 ‘생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누군가의 판단, 오래된 후회, 아직 사라지지 않은 욕망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 벽을 손끝으로 만졌다.
차가웠다.
그건 타인의 시선이 남긴 온도 같았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미로는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나는 내 안에서 길을 잃었다.”
그 순간,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낯설지 않았다.
익숙하고, 어딘가 불쾌했다.
뒤돌아보니,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자가 서 있었다.
“길을 찾고 있나?”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왔다.
“길을 찾는 자는 항상 늦는다.”
그 말이 떨어지자, 그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졌다.
얼굴의 윤곽이 녹아내리듯 사라지며, 또 다른 나의 얼굴이 그 자리에 겹쳐졌다.
슬픔의 얼굴, 분노의 얼굴, 무표정의 얼굴…
수많은 ‘나’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말했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숨을 삼켰다.
“나… 나는…”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들이 웃었다.
그리고 벽에 스며들 듯 하나둘 사라졌다.
고요가 다시 찾아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름이 없다는 건 자유일까, 아니면 고통일까.
정체를 잃는 순간, 인간은 사라지는가, 혹은 태어나는가.
그때였다.
발밑에서 낮은 울림이 일었다.
마치 대지 자체가 내 안의 생각을 듣고 있는 듯했다.
그 울림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잃었다면, 그건 네가 처음으로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 빛은 출구가 아니었다.
그건 ‘또 다른 문’이었다.
나는 속삭였다.
“아직 끝이 아니구나.”
그리고 다시 걸었다.
길은 여전히 미로였지만, 이제는 그 미로가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혼란은 나의 적이 아니라, 나의 형태였다.
길을 잃는 일은, 어쩌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