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

by 조가


당신은 과거와 현재, 미래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가?

철학가들이 현재를 살라고 많이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모든 것을 잊고 현재를 살 수 있는가?

인간이면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과거를 후회하기도 미래를 계획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후회하며 사는가 미래를 위해 살아가는가?

나는 둘 다 아니다. 두 선택지 모두 소중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더 소중한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위해 사는 것보다 현재에 행복한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고

현재가 행복해야 미래도 행복한다고 생각했다. 난 더 나아가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을 찾았다.

바로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 현재와 미래의 연결고리이다. 과거에 머물지 말고 과거에서 배운 기억과 경험으로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절대 과거를 후회하며 머물면 안 된다. 후회하는 것도 소중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소중하다. 하지만 후회에 빠지기엔 현재가 버려지기엔 아깝다. 그래서 나는 현재를 사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의 연결고리, 인간은 절대 현재만은 못 산다. 현재만을 산다면 인간이 아니라 검은 머리 짐승이다.

나는 되도록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편인데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미래를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살아있기를 반복하고 있으면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를 보내고 잠을 자고 일어나고 반복이다. 그것이 의지일까?


의지가 없다면

아침에 눈을 뜬다.
몸은 깨어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하다.
해야 할 일이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불안하다. 이유 없는 두려움이 짙은 안개처럼 가슴을 뒤덮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질문은 사실 너무 익숙하다. 매일 아침, 혹은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떠오른다.
마치 의식 너머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 오래된 질문처럼.

의지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살아야 하니까 산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위로가 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더욱 공허하게 들린다.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걸까? 살아야 하니까 그냥 사는 것, 그게 전부일까?

나는 의지가 사라졌을 때의 나를 자주 만난다.
불안과 무기력이 손잡고 찾아오는 날, 나는 침대 위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심도 따라온다.
삶이란 무엇인가, 노력은 어디로 가는가, 목적 없는 반복 속에 나는 왜 이리 지쳐 있는가.

의지가 없다는 건, 나약함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인간의 상태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우리는 기계처럼 항상 강할 수 없다.
때로는 고장 나고, 때로는 멈추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멈춤 속에서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지가 없을 때, 나는 내 감정을 잠시 바라본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무력함은 어디에서 온 걸까.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불안은 때로, 우리가 너무 앞서가고 있을 때 생긴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있을 수 없다면, 마음은 미래로 도망치고, 거기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그냥 불안해진다.

그럴 땐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단 하나의 작은 일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일까?"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
창문을 열고 바람을 한 번 마시는 것.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 작은 행동이, 다시 나를 ‘살게’ 한다.

의지가 없을 때, 삶은 작아지지만 동시에 더 본질에 가까워진다.
우리는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사소한 움직임으로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할 때도 있다.


당신은 의지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당신도 나처럼 의지를 거창하게 생각했는가?

의지란 삶이 의미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으려는 선택의 힘이다.

의지가 사라지면, 인간은 존재하되 살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숨은 쉬지만, 삶을 밀어가는 중심축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것이다.

의지는 강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넘어지고 무너지는 순간에도,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는 생의 끈 그것이 바로 의지다.

의지는 때때로 위대하지 않다. 그저 오늘을 견디는 것, 한 걸음을 떼는 것,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의지라고 본다.


마음이 마비되면


가끔은 감정이 사라진다.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분노도 없다. 그저 공허하다.
사람들은 그걸 무기력이라 부른다. 나는 그것을 마음의 마비라고 느낀다.

의지가 없는 상태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마비되면, 움직일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기억은 있고, 감정은 있으나, 모든 게 멀리서 흐릿하게 들리는 라디오처럼 느껴진다.
마치 나 자신이 내 삶을 구경하는 관객이 된 것처럼. 그럴 때 나는 묻는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는 건 단순히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음이 움직여야,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의 마비는 방어다

마음이 마비될 때는 이유가 있다.
그건 나약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상처가 너무 깊으면 감각을 끊는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무감각으로 대체된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너무 무거우면, 마음은 잠시 작동을 멈춘다.

어쩌면 마음의 마비는 정신의 비상대응 체계다.
계속 고통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잠시 꺼버리는 것.
울지도 못하는 상태. 슬퍼할 힘조차 없는 상태.
그게 바로 이 장의 제목이다.


마비된 마음은 어떻게 회복되는가

누군가는 말한다. “시간이 약이다.”
나는 이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마음은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어떻게 버티고 있는가,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다.

나는 작은 감각부터 되살리려 한다.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

노을이 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말없이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시간

이런 아주 사소한 것들이
마비된 마음에 아주 약한 전류처럼
조금씩 생기를 불어넣는다.

마음은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다.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시 움직인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마음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억지로 울려하지 않고, 억지로 기뻐하지 않고,
그저 내가 나를 통과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작고 소소한 경험을 소중하게 만들어가다 보면 언젠간 올 것이다.

모든 것에 감사해 보아라 언젠간 올 것이다.


마음이 마비되면, 삶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끝이 아니라, 잠시 멈춘 숨이다.
숨이 돌아오면, 마음도 따라온다.


생각 없이 몸이 움직이면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오늘 아침도 눈을 떴고,
세수를 했고, 밥을 먹었고, 출근을 했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누워 있다. 그런데, 나는 언제 살아 있었던 걸까?

몸은 움직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행동은 있었지만, 인식은 없었다. 그 하루는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이었다.


무의식적 생존

사람은 생각보다 자주 생각 없이 산다.
반복되는 루틴, 반복되는 업무, 반복되는 피로 속에서 몸은 스스로 움직인다.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고, 커피를 마시고, 습관처럼 일하고, 기계적으로 대화하고, 하루를 ‘소모’한다.

그 와중에 나는 나였던가?
내가 이 삶의 주체인가, 아니면 피동적인 기계인가?


오히려 편하다, 생각이 없으면

생각 없이 사는 건 편하다.
감정도 덜 느끼고, 갈등도 줄어든다.
‘나’를 성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정신적 무통증 상태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 없이 사는 삶은 의미 없이 지나간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 살아도, 그 삶을 내가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질문이 있어야
우리는 다시 의식을 켜고 내 몸이 왜 움직이는지 묻기 시작한다.

왜 일어나야 했는가,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왜 이 반복을 끊지 못하는가.

그 질문들이 쌓여야,
비로소 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삶’이 된다.

아마 요즘 사회에 ‘내가 살아가는 삶’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 없는 움직임 속에서도 한 줄기 깨어있기

생각 없이 움직이는 날에도,
하나만 의식해보려고 한다.

내 손끝의 감촉,

내 심장의 박동,

내 한숨의 온도

이 작은 인식 하나가,
몸과 마음을 다시 연결해 준다.

생각 없이 움직이는 삶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상태다.
그러나 단 하나의 의식이
그 삶을 다시 생기로 돌릴 수 있다.


나는 다시 묻는다.

"지금 움직이는 이 몸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나는 나를 다시 느끼기 시작한다.


자기 삶을 찾기 위한 노력과 방법

삶은 스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를 모를 때다. 그때 우리는 멈춘다. 마비된다. 기계처럼 산다.

하지만 그 상태를 인식하는 순간이 바로 삶을 다시 '나'에게 되돌리는 첫 번째 계기다.


1. 작은 감각을 의식하는 훈련

자기 삶을 찾는다는 건 대단한 결단이나 거창한 목표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작고 구체적인 감각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걷고 있을 때, 발바닥이 바닥을 누르는 느낌을 인식해 보는 것

따뜻한 물이 손을 감싸는 순간을 느껴보는 것

말없이 누군가와 앉아 있는 시간의 정적을 인식하는 것. 이런 감각들은,
잃어버린 ‘나’와 나 사이의 끊어진 줄을 다시 잇는 일이다.


2. 질문을 되살리기

기계처럼 살게 될 때,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을 되찾으려면 반드시 자기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왜 이걸 하고 있지?

나는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나는 지금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이 없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질문은 방향을 만든다.


3.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기

때로 우리는 자기 안에서만 길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지쳐 있을 땐 타인의 삶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누군가는 오늘을 견디기 위해 만든 글을 읽고

누군가는 울면서 만든 노래를 듣고

누군가는 고요히 만든 그림을 바라보는 것

그 안에서 나는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를 느낀다.
그리고 다시 살아볼 용기를 얻는다.

타인에 의존하는 것은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라. 타인이다.


4. 일상 속 루틴의 재구성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면,
그 일상에 작고 사적인 변화를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일어나자마자 핸드폰 대신 종이노트에 기분 한 줄 쓰기

매주 같은 시간에 혼자 산책하기

‘해야 할 일’과는 무관한, 완전히 나만을 위한 활동 만들기

그건 누가 시키지 않은 ‘내 삶의 선택’이다.
작은 선택이 쌓여 ‘내가 사는 삶’이 된다.


5. 포기하지 않기

가장 중요하고도 모호한 말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삶을 되찾는다는 건 ‘언젠가 멋지게 살아보겠다’는 게 아니다.
오늘 하루를 버리지 않는 것, 내일을 미워하지 않는 것,
지금 이 순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내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삶이 얼마나 불완전하든,
그 삶이 얼마나 작든,
그게 진짜 내 삶이라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포기란 도망일까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포기하지 마. 끝까지 버텨야지.”
“도망치면 안 돼. 맞서 싸워야 해.”
“회피하지 마. 마주해야지.”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조용히 되묻는다.
정말 포기는 도망일까?


포기의 순간

포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놓아버리는 포기

2. 더 이상 이 싸움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멈추는 포기

첫 번째는 절망의 포기다.
두 번째는 인식의 포기다.
전자는 무너지는 것이고,
후자는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그러므로 모든 포기를 도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포기는 ‘용기의 다른 얼굴’ 일 수도 있다.


회피는 나쁜가?

회피는 비겁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직면만이 언제나 옳은 태도는 아니다.
상처가 덜 아물었을 때 상처를 억지로 들여다보는 것은 오히려 더 깊은 고통을 낳는다.

때로는 돌아서야 한다. 때로는 피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살아남는 것, 그것이 철학 이전의 조건이다.


도망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떤 시점에서는 도망치며 살아왔다.
관계에서, 책임에서, 감정에서, 과거에서.
하지만 돌아보면,
그 도망이 나를 지금까지 살아오게 만든 유일한 방법이었던 순간도 있었다.

문제는 도망쳤느냐가 아니라, 도망친 다음 어디에 닿았는가이다.


진짜 포기는 언제 일어나는가?

진짜 포기는,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칠 때 일어난다.

실패해도 좋다.

멈춰도 된다.

돌아가도 된다.

하지만 단 하나,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금의 나’가 싫고 초라하고 무기력해도,
그 모든 나를 떠안고 가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포기했지만, 도망친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것들을 포기했다. 어떤 관계, 어떤 역할, 어떤 기대.
그게 나약함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는 그것들을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포기는 도망일 수도, 회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삶의 재구성을 위한 통과의례다.

포기란, 어떤 것에서 ‘물러남’이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것으로 ‘돌아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삶을
여전히 나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나는 무엇에서 도망치고 있는가?

그 도망은 나를 살리고 있는가?

나는 진짜 나를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에 답하려는 용기,
그것이 진짜 도망과 진짜 포기를 가르는 경계다.

포기는 패배가 아니라 선택이다.
회피는 나약함이 아니라 생존의 본능이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을 향해’ 있는가이다.


사르트르: 자유라는 형벌

사르트르는 말했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인간은 어떤 본성도, 정해진 운명도 없이
자기 선택으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이 말은 곧, ‘나는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는 공포를 말한다.
선택은 자유지만, 동시에 책임을 요구하는 형벌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고 그 선택은 나의 본질이 된다.
그래서 인간은 때때로 그 책임을 피하고 싶어 한다.


나쁜 믿음: 회피의 철학적 정의

사르트르는 이를 “나쁜 믿음”이라 불렀다.
나쁜 믿음이란,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고 거짓으로 믿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고, 상황이나 타인 탓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

예를 들어,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게 내 운명이야.”라는 말은 모두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말이다.

진짜 포기는, 자유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회피는 왜 유혹적인가

포기와 회피가 유혹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안락한 위치를 준다.
‘나’의 삶에서 물러나 관객처럼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려 할 때 불성실해진다.”

삶을 외면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를 살지 않고,
‘기능’이나 ‘역할’, ‘피해자’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도망치지 않으려면?

도망치지 않는다는 건,
상황을 ‘선택 가능한 것’으로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그 선택이 실패로 이어지더라도
그건 나의 삶을 내가 만들고 있다는 증거다.

포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결정하는 것.

회피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기감정에 솔직해진 끝에 판단하는 것.

그렇게 선택한 포기라면,
그건 더 이상 비겁함이 아니다.
그건 책임 있는 자유의 행위다.


나의 포기는 도망이었을까?

나는 어떤 것들을 포기했다.
관계, 꿈, 습관, 사람.

그중 일부는
진짜 도망이었고,
또 다른 일부는
삶의 재구성을 위한 필요였다.

그 구분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다.

내가 그 선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답게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건 도망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진실한 방향이었다.


우리는 늘 도망치고 있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이 종종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믿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인간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반성의 순간이야말로
자유와 책임, 그리고 존재의 실마리가 다시 시작되는 지점이다.

포기는 언제나 나쁜 것이 아니다.
회피는 때때로 생존의 방식이다.
하지만 진짜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 다른 세상

어제는 견딜 만했지만,
오늘은 벽에 부딪힌다.
어제는 웃었지만,
오늘은 눈물조차 안 난다.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하루하루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같은 나인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제와 다른 공기, 다른 마음, 다른 생각이 있다.
어제 결정했던 것도 오늘은 확신이 안 든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또 변했어?”
“어제는 그렇게 말했잖아.”

하지만 나는 정말 어제와 같은 사람일까?
감정은 흐르고, 생각은 뒤집히고, 의지는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매일 조금씩 다른 내가 된다.

그건 일관성 없는 게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다.


세상도 매일 다르다

문밖에 나가면
세상도 어제와는 다르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공기의 무게가 다르다.

같은 사람을 만나도 표정이 다르다.

같은 일을 해도 내 안의 반응이 다르다.

삶은 결코 정지된 풍경이 아니다.
그건 매일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매일 익숙한 세상 속 낯선 마음으로 살아간다.


나를 오해하지 말 것

나는 하루하루 다르게 느껴진다.
어제는 긍정했고, 오늘은 부정한다.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멀리하고 싶다.
어제는 살고 싶었고, 오늘은 멈추고 싶다.

이런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변덕스럽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의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모든 감정은 진짜였고, 거짓은 없었다.
단지, 내가 하루하루 다른 세상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하루하루가 다른 이유

하루가 다르면, 나는 다르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진폭이다.
어떤 날은 파도처럼 올라가고
어떤 날은 가라앉는다.

중요한 건
그 모든 진폭을 내 삶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다.

나의 불안, 나의 희망, 나의 흔들림, 나의 멈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나’라는 복잡한 파동을 만든다.


사르트르의 그림자, 키르케고르의 목소리

사르트르는 “인간은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만든다”라고 했지만,
키르케고르는 더 고요하게 말했다.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려 하지 않거나, 자기 자신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상태다.”

나는 하루하루 다른 나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 하루하루가 쌓여 '나'가 된다.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절망을 넘는 첫걸음이다.


오늘이 다르면, 내일도 다를 것이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어떤 날은 무언가를 시작해보고 싶다.

어떤 날은 나를 이해할 수 없고
어떤 날은 나를 안아주고 싶다.

나는 그런 하루하루를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오늘을 살고, 내일의 나를 미리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매일 다르듯, 세상도 매일 나를 다르게 받아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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