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의 유언>

추리소설

by 산들강바람


제6장: 죽은 형사의 고백


1. 폭풍 뒤의 정적


사이렌 소리가 청평 호수의 정적을 찢어발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 저택은 기묘한 평온에 휩싸였다. 수현은 지하 온실의 차가운 흙을 뒤로하고 다시 2층 서재로 향했다. 온몸은 진흙과 보라색 꽃가루로 엉망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서재 문은 김 편집자가 휘두른 도끼에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수현은 부서진 문틈을 지나 도진의 책상 앞에 앉았다. 주인이 사라진 의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여전히 마르지 않은 잉크 향이 감돌았다.


수현은 기폭 장치에서 빼낸 작은 메모리 칩을 도진의 노트북에 연결했다. 화면이 밝아지며 '마지막 기록'이라는 이름의 폴더가 나타났다. 그 안에는 동영상 파일 하나가 외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2. 모니터 속의 유언


마우스를 클릭하자, 수척해진 차도진의 얼굴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그는 평소처럼 정갈한 셔츠 차림이었지만, 눈 깊은 곳에는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수현아,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그리고 너는 내가 숨겨온 가장 추악한 비밀을 목격했을 것이다. 지하 온실의 유골들 말이다."


도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20년 전, 나는 정의를 위해 동료를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 반대였지. 강철수 형사는 진범인 서장의 아들을 잡기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나는 내 가족의 안위를 대가로 서장과 거래를 했다. 강 형사의 위치를 넘겼고, 그 대가로 나는 특진과 이 저택을 얻었다. 연주의 유골을 그곳에 묻은 건, 내가 저지른 비겁한 거래의 증거를 내 발밑에 두고 평생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기 위함이었다."


수현은 숨을 쉴 수 없었다. 평생을 우상으로 모셔온 스승이, 사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파트너를 팔아넘긴 배신자였다는 고백. 모니터 속 도진의 목소리는 담담해서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3. 설계된 심판


"하지만 죄악은 잉크처럼 번져나가는 법이지. 김 편집자의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죽어가며 그날의 기록을 파기하라고 아들에게 명령했다. 김 편집자는 원고를 회수하기 위해 나를 압박했고, 나는 깨달았다. 이 연극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죽음을 미끼로 너라는 '공정한 심판자'를 이곳에 불러들이는 것뿐이라는 걸."


도진의 눈에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사로서 마지막 사건을 해결하려는 집념의 눈빛이었다.


"내가 11시 11분에 죽기로 결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시간은 김 편집자와 가정부 박 씨가 각자의 탐욕과 원한으로 내 서재에 모이는 시간이지. 나는 박 씨가 내 차에 독을 탈 것을 알고 있었고, 김 편집자가 내 원고를 훔치려 들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저지른 '현재의 살인'을 통해, 내가 20년 전 저지른 '과거의 범죄'까지 함께 심판받기를 원했다."


영상 속 도진은 화면 너머 수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수현아, 이제 서재 책상 세 번째 서랍의 이중 바닥을 열어라. 그곳에 내가 20년 동안 모아 온 진짜 '증거 인멸의 흔적'들이 들어있다. 그것을 가지고 이 저택을 나가라. 그리고 나를 영웅이 아닌, 가장 비겁했던 죄인으로 기록해 다오."


4. 마지막 퍼즐


영상이 끝나고 블랙아웃된 화면에 수현의 망연자실한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도진이 말한 대로 이중 바닥 안에는 낡은 증거물 봉투들이 가득했다.


그 안에는 강철수 형사의 혈흔이 묻은 단추, 당시 서장이 내렸던 비밀 지시서, 그리고 도진이 차마 제출하지 못했던 현장 사진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증거물들 사이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작은 수첩 하나가 수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도진의 수첩이 아니었다. 20년 전 죽은 강철수 형사의 수첩이었다. 수현이 그 수첩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그녀는 이 모든 사건을 다시 한번 뒤집을 충격적인 문구를 발견했다.


5. 수첩에 새겨진 진심: 또 다른 배신


수현의 손등 위로 차가운 전율이 일었다. 강철수 형사의 낡은 수첩 첫 페이지에는 도진이 영상에서 고백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2006. 07. 10. 도진이가 위험하다. 서장이 그를 회유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도진이는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이미 놈들의 감시망에 걸려든 것 같다. 만약 내가 잘못된다면, 모든 화살을 도진이에게 돌리도록 장치를 해두어야겠다. 그래야만 놈들이 도진이를 믿고 곁에 둘 것이고, 언젠가 도진이가 이 기록을 발견했을 때 진범을 잡을 기회가 생길 테니까.」


수현은 숨을 들이켰다. 도진은 자신이 파트너를 배신했다고 믿으며 20년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지만, 사실 강철수는 도진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배신당한 '희생양'이 되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강 형사는 도진이 살아남아 언젠가 이 진실을 밝혀줄 '생존 증거'가 되길 바랐다.


"선생님... 당신은 죄인이 아니었어요. 당신을 살리려던 동료의 마음을 오해한 채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신 거군요."


수현의 눈에서 참아왔던 눈물이 고였다. 도진은 자신이 비겁하다고 믿었기에 지하 온실에 스스로를 가두고 투구꽃의 독 같은 고통을 씹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고통의 근원조차 사실은 지독하게 아픈 우정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수현의 가슴을 후벼 팠다.


6. 제3의 그림자: 마지막 틈입


그때, 저택 아래층에서 현관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경찰들의 진입이었다. 하지만 수현의 감각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진입하는 발소리들 중 유독 박자가 어긋나는 소리가 하나 있었다.


수현은 재빨리 강철수의 수첩과 도진의 증거물들을 가슴 안쪽에 숨겼다. 서재 문틈으로 비친 그림자는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는 무전기 대신 개인 휴대전화로 낮게 속삭이고 있었다.


"차도진은 확실히 죽었습니다. 한수현 경위가 지하에서 뭔가를 찾은 것 같습니다. 예, '그것'까지 한꺼번에 처리하겠습니다."


수현은 이를 악물었다. 김 편집자의 아버지, 전직 서장이었던 그 권력의 뿌리는 여전히 경찰 조직 내부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스승이 왜 법에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를 미끼로 던져 이토록 복잡한 '사적 극장'을 만들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7. 잉크는 눈물보다 진하다


수현은 책상 위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도진이 마지막 페이지에 쓰다 만 문장 옆에, 그녀는 강철수의 수첩에서 본 마지막 문구를 덧썼다.


「용서받지 못한 자들의 속죄는 끝났다. 이제 진실이 걸어 나올 시간이다.」


그녀는 서재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안개가 밀려 들어와 수현의 얼굴을 적셨다. 아래층에서 자신을 찾는 동료(혹은 적)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수현은 창틀을 짚고 섰다. 그녀의 눈앞엔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청평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수현은 결심했다. 스승을 영웅으로 포장하지도, 그렇다고 파렴치한 배신자로 남겨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강철수가 도진에게 남긴 생명의 빚을, 이제 자신이 진실의 빚으로 갚기로 했다.


"가요, 선생님. 이제 안개 밖으로."


수현은 서재를 빠져나오며 등 뒤의 문을 닫았다. 11시 11분에 멈췄던 시계는 이제 다시 째깍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유언이 끝난 시각이 아니라, 남겨진 자의 수사가 시작되는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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