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의 유언>

추리소설

by 산들강바람


제5장: 온실의 비밀


1. 자줏빛 감옥


지하 온실의 공기는 지상보다 훨씬 무겁고 습했다. 천장의 유리창을 통해 스며드는 달빛은 보라색 투구꽃 잎사귀들을 통과하며 기괴한 자줏빛으로 굴절되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수현은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강민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발밑에서 으스러지는 마른 흙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강민호 씨, 정신 차려요. 지금 여길 나가야 해요!"


수현의 외침에도 민호는 화단 밑에 반쯤 드러난 해골과 삭아버린 노란 우비 조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20년 전 사라진 소녀 연주. 그리고 그 곁에 흩어진 낡은 단추 하나. 그것은 차도진이 카세트테이프에서 언급했던 '동료의 단추'와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범인을 풀어준 게 아니었어." 민호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진범을 법정에 세우는 대신, 이 지하 온실에 산 채로 매장한 거야. 저 투구꽃들이 그 시체를 먹고 자라게 하면서 말이지. 이게 그가 말한 '속죄'였나?"


수현은 소름이 돋았다. 전설적인 형사 차도진의 이면에 숨겨진 잔혹한 사적 복수의 현장. 하지만 감탄하거나 절망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머리 위 철제 계단이 거칠게 흔들리며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2. 김 편집자의 최후통첩


"하하, 드디어 찾았군! 차도진의 가장 추악한 비밀 정원을!"


계단 꼭대기에 나타난 김 편집자의 얼굴은 광기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손에는 권총 대신 소형 기폭 장치가 들려 있었고, 장치 위의 붉은 램프가 일정한 간격으로 점멸하며 저택 곳곳에 설치된 폭탄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내 아버지는 서장이었지만, 동시에 이 저택의 설계자이기도 했지. 그는 차도진이 진범을 이곳에 묻는 걸 도왔어. 서로의 약점을 쥐고 20년을 버틴 거야. 하지만 이제 그 계약은 끝났어. 차도진이 죽으면서 모든 걸 발설하려 했으니까!"


김 씨는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오며 수현을 겨냥했다. "한 경위, 당신이 쥔 그 원고와 저 밑바닥의 뼈다귀들만 없애면 진실은 영원히 묻혀. 내 아버지가 세운 질서, 그리고 내가 이어받을 명예는 티 하나 없이 깨끗해질 거라고!"


수현은 엄폐물도 없는 지하 온실 한복판에서 위기를 느꼈다. 그녀는 슬쩍 옆을 보았다. 투구꽃이 가득한 화단 너머로 지상 온실과 연결된 배수관 파이프가 보였다.


3. 투구꽃의 독과 반격


"김 편집자, 당신은 착각하고 있어. 선생님이 당신 아버지를 위해 침묵한 게 아니야." 수현이 시간을 벌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선생님은 당신 아버지가 보낸 암살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11시 11분에 저택을 폐쇄하고 당신들을 이 지하로 유인한 거지. 진실과 함께 당신들을 매장하기 위해서!"


"닥쳐!" 김 씨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가정부 박 씨였다. 그녀는 언제 내려왔는지 김 씨의 뒤에서 달려들어 그의 팔을 낚아챘다. "이 살인마! 우리 연주를... 우리 아이를 이 차가운 흙 속에 묻어두고 당신들만 잘 살겠다고?"


박 씨의 손에는 온실에서 꺾어온 투구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꽃들을 김 씨의 얼굴에 문질렀다. 투구꽃의 맹독 성분인 아코니틴이 김 씨의 상처 난 피부와 점막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악! 이 미친년이!"


김 씨가 박 씨를 발로 차며 밀쳐냈지만, 이미 그의 얼굴은 보라색 꽃가루와 즙으로 뒤덮여 경련하기 시작했다. 기폭 장치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수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렸다.


4. 보라색 숨결: 중독의 시작


"내 얼굴... 내 얼굴이!"


김 편집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박 씨가 짓이겨 문지른 투구꽃의 즙이 그의 점막과 상처를 타고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아코니틴 독소는 심장 박동을 불규칙하게 뒤흔들며 그의 사지를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기폭 장치는 그의 손을 떠나 화단 구석, 연주의 유골 근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한 경위, 저 장치를... 으윽!"


박 씨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김 씨에게 독을 묻히는 과정에서 본인의 손등에 난 상처에도 독이 스며든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벽을 짚고 쓰러졌다. 수현은 권총을 집어넣고 기폭 장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바닥에 흩어진 보라색 꽃잎들이 기름기 섞인 물기에 젖어 있어 발이 미끄러졌다.


그 틈을 타, 경련을 일으키던 김 편집자가 품 안에서 두 번째 장치를 꺼냈다. 그것은 기폭 스위치가 아니라, 저택의 전력을 강제로 복구시키는 마스터 키였다.


"다... 같이 죽을 순 없지. 차도진이 만든 이 감옥을... 내가 부숴버리겠어!"


5. 11시 11분의 진정한 의미


김 씨가 마스터 키를 누르는 순간, 암전 되었던 지하 온실에 수십 개의 할로겐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강렬한 빛이 자줏빛 안개를 가르며 현장을 비췄다. 동시에 저택 곳곳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11시 11분에 멈췄던 보안 시스템이 강제로 리셋되며 모든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수현은 기폭 장치를 손에 넣었지만, 타이머는 이미 00:03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 돼!"


수현은 본능적으로 기폭 장치의 뒷면을 뜯어냈다. 복잡하게 얽힌 전선들 사이로 작은 메모리 칩 하나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그것은 차도진이 생전에 미리 빼돌려 둔, 편집자의 아버지가 살인을 지시하는 내용이 담긴 음성 증거였다.


"선생님, 끝까지 이 모든 걸 설계하신 건가요?"


수현은 00:01초를 남겨두고 기폭 장치의 중앙 회로를 끊었다. 폭발음 대신 정적이 찾아왔다. 김 편집자가 설치한 폭탄은 처음부터 작동하지 않도록 도진이 미리 손을 써둔 가짜였거나, 혹은 수현이 이 칩을 찾도록 유도하기 위한 미끼였다.


6. 연주의 마지막 유언


독기 때문에 마비되어 가는 박 씨가 수현의 바지 끝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선 피 섞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경위님... 저 밑을 보세요... 연주가... 연주가 쥐고 있는 게..."


수현은 연주의 유골 곁으로 다가가 흙을 조심스럽게 파헤쳤다. 소녀의 작은 손뼈가 쥐고 있는 것은 낡은 펜던트였다. 그 안에는 차도진과 강철수 형사, 그리고 어린 수현이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차도진은 연주를 죽인 범인을 이곳에 가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연주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소녀가 외롭지 않도록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진을 그녀의 손에 쥐어준 채 이곳을 자신의 **'속죄의 사당'**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 묻힌 또 다른 유골은, 20년 전 진범을 쫓다 실종 처리되었던 진짜 목격자였다.


7. 안개 너머의 발자국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저택의 결계가 풀리며 외부와의 통신이 복구된 것이다.


수현은 마비되어 쓰러진 김 편집자와 숨을 헐떡이는 박 씨를 뒤로하고, 강민호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왔다. 온실 밖 청평 호수의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있었고, 새벽빛이 수면 위로 산산이 부서졌다.


수현의 손에는 차도진의 마지막 페이지와 증거 칩이 들려 있었다.


"이제 끝난 건가요?" 민호가 물었다.


수현은 대답 대신 저택 2층 서재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멈춘 듯 보이는 괘종시계가 있었지만, 수현은 알고 있었다. 이제 시곗바늘은 11시 11분을 지나, 진실이 밝혀질 새로운 시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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