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의 유언>

추리소설

by 산들강바람

제4장: 11시 11분의 결계


1. 침입자들의 숨소리


서재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정적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수현은 뒤집어엎은 육중한 참나무 책상 뒤에 몸을 숨긴 채,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배어 나오는 땀이 총기 손잡이를 미끄럽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밖을 살폈다.


끼익, 끼이익—


낡은 문손잡이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집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내 문틈 사이로 편집자 김 씨의 건조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한 경위님, 헛수고입니다. 이미 저택의 전력은 차단됐고, 통신 중계기도 내 손안에 있어요. 당신이 가진 그 '3장'의 원고만 넘겨준다면, 우리는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건 그저... 비즈니스의 문제일 뿐이니까요."


그의 말 뒤로 박 씨의 낮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비즈니스라니, 김 편집자님도 참. 이건 우리 모두의 생존이 걸린 문제죠. 경위님, 선생님이 차를 드시고 어떻게 되셨는지 보셨잖아요? 그 고집불통 노인이 마지막에 남긴 게 고작 당신을 이 사지로 몰아넣는 거였다면, 참 가혹한 유산 아닌가요?"


수현은 대답 대신 서재 내부를 훑었다. 11시 11분에 멈춘 괘종시계 안에서 기어가 다시금 미세하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설탕 가루를 닦아낸 기어들이 서로 맞물리며 내는 불협화음은, 마치 도진이 수현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처럼 들렸다.


2. 11시 11분의 메커니즘


문밖의 범인들이 물리적인 압박을 시작하려던 찰나, 서재 벽면 깊숙한 곳에서 육중한 금속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커덩—


저택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것은 도진이 현직 시절부터 이 저택에 공들여 설치해 둔 '보안 결계'가 작동하는 신호였다. 11시 11분, 시계의 기어가 정상 궤도에 진입하자마자 저택의 모든 창문 외부로 강철 셔터가 내려왔고, 현관문과 뒷문은 이중으로 잠겼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지?" 김 씨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미소를 지었다. 스승은 단순히 자신의 살해 시각을 알리려 시계를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범인들이 원고를 노리고 자신의 방을 습격할 것을 예견했고, 그들이 가장 방심한 순간 저택을 거대한 밀실 감옥으로 변모시킨 것이었다.


"김 편집자, 박 아주머니. 당신들은 이제 이 저택에서 나갈 수 없어. 11시 11분은 당신들이 선생님을 죽인 시간이 아니라, 당신들이 무덤에 갇힌 시간이야."


3. 밀실 속의 밀고


수현은 어둠 속에서 스피커 폰을 켰다. 아까 지하실에서 발견한 무전기가 노이즈 사이로 짧은 수신 신호를 내보내고 있었다. 범인들의 교란 작전에도 불구하고, 도진이 미리 설치해 둔 독립형 단거리 통신망이 살아난 것이다.


무전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은 강민호의 거친 숨소리였다.


"한 경위, 지하실 통로를 찾았어. 하지만 이 통로... 밖으로 연결된 게 아니야. 저택 지하 깊숙한 곳, 온실 바로 밑으로 이어져 있어."


수현은 강민호의 보고를 들으며 주머니 속 '진짜 3장' 원고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원고에는 김 편집자의 아버지가 20년 전 서장이었을 때 저질렀던 은폐 기록뿐만 아니라, 박 씨가 왜 차도진의 저택에 가정부로 들어와야만 했는지에 대한 진실도 담겨 있었다.


"박 아주머니, 당신이 왜 10년 동안 이 저택에서 선생님을 모셨는지 이제 알겠네요. 20년 전 호수에서 사라진 그 아이, 연주의 친척이었죠? 당신은 선생님이 범인을 풀어준 줄 알고 복수하기 위해 곁에 머물렀지만, 결국 김 편집자의 돈에 매수되어 선생님을 죽이는 도구가 된 거야."


서재 문밖에서 박 씨의 발소리가 멈췄다. 잠시의 정적 끝에 들려온 것은 그녀의 처절한 흐느낌이었다. "아니야... 난 연주를 위해... 하지만 선생님이 말했단 말이야! 자기가 죽어야만 진범이 나타난다고!"


그때, 서재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듯한 육중한 충격음이 들렸다. 김 편집자가 소리를 질렀다. "헛소리 집어치워! 아주머니,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할 거야? 문 열어! 그 원고를 태워버리지 않으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


수현은 총구를 문 중앙으로 겨냥했다. 도진이 설계한 11시 11분의 결계가 닫힌 지금, 이 저택에서 진실을 가질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4. 파괴된 문, 그리고 폭로


쾅! 육중한 충격과 함께 서재 문설주가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김 편집자가 소방 도끼를 휘두르며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었다. 평소의 말끔하던 슈트는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고,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이성을 잃은 채 번들거리고 있었다.


"원고 내놔! 한 경위, 당신이 뭘 안다고 정의를 운운해? 내 아버지가 그날 내린 결정은 이 도시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희생이었어!"


김 씨가 도끼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 뒤로 박 씨가 창백한 안색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투구꽃 독이 묻었을지 모를 찻잔 받침이 위태롭게 들려 있었다. 수현은 뒤집힌 책상 너머로 총구를 겨눴다.


"희생? 어린아이의 생명을 짓밟고 동료 형사를 죽음으로 낸 게 질서라고? 당신 아버지가 지키려 했던 건 질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안위였어."


수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 씨가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수현은 민첩하게 몸을 날려 서재 구석으로 피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탄환은 김 씨의 발치에 박혔고, 그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짧은 틈을 타 박 씨가 수현의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5. 반전의 타이머: 시계의 마지막 경고


"안 돼, 아주머니!"


수현이 외치며 박 씨를 밀쳐내려던 순간, 서재의 괘종시계가 자지러지는 듯한 금속음을 내기 시작했다. 11시 11분에 고정되었던 바늘이 드디어 11시 12분으로 넘어가는 찰나였다.


우우웅—


저택 바닥 밑에서 거대한 기계 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진은 단순히 문을 잠그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서재 자체를 하나의 '탈출구'이자 '함정'으로 설계해 두었다. 수현의 발밑에 있던 가죽 의자 부근의 바닥이 갑자기 아래로 꺼지며 미끄럼틀처럼 경사진 통로가 나타났다.


"이게 뭐야!"


당황한 김 씨가 수현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수현은 이미 통로 속으로 몸을 던진 후였다. 그녀는 어둠 속을 미끄러져 내려가며 스승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수현아, 진실로 가는 길은 때로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단다.'


6. 온실 밑의 지옥


미끄럼이 끝난 곳은 습하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였다. 수현은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손전등을 비추자, 그곳은 저택 지상에서 보았던 온실의 바로 밑바닥, 즉 투구꽃의 거대한 뿌리들이 엉켜 있는 지하 온실이었다.


유리 천장 너머로 은은한 달빛이 스며들었지만, 그 빛은 보라색 꽃잎들을 거쳐 기괴한 자줏빛으로 변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 강민호가 넋을 잃은 채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민호 씨, 괜찮아요?"


수현이 다가가자 민호가 가리킨 곳에는 20년 전 사라졌던 소녀, 연주의 것으로 보이는 노란 우비의 조각과 함께, 누군가의 유골이 화단 밑에 반쯤 묻혀 있었다.


"선생님은... 차도진은 이곳을 알고 있었어." 민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범인을 풀어준 게 아니야. 진범을 이곳에 가두고, 평생 이 꽃들의 거름으로 삼으려 했던 거야."


7. 가면 뒤의 최종 무기


그때, 지하 온실로 연결된 철제 계단 위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김 편집자가 권총을 든 채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도끼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의 손목시계에서 붉은 불빛이 점멸하며 저택 곳곳에 설치된 소형 폭탄의 작동을 알리고 있었다.


"차도진이 미쳤던 거지. 진범을 사적으로 처형하고 그 위에 온실을 짓다니. 하지만 덕분에 증거는 완벽하게 인멸될 거야. 이 저택과 함께 말이지."


김 씨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폭파 스위치에 손가락을 올렸다. 수현은 가슴속의 원고를 꽉 쥐었다. 이제 11시 12분. 결계는 닫혔고, 저택은 화약고로 변했다. 수현은 마지막 도박을 걸어야 했다.




작가의 이전글<마지막 페이지의 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