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제4부: 무너지는 알리바이
본청 취조실의 형광등은 지나치게 밝았다. 그 빛은 취조실 중앙에 놓인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서 차갑게 반사되었다. 수현은 테이블 위에 작은 유리병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고운 입자의 백설탕이 담겨 있었다.
"김 편집자님, 수사관으로서 저는 증거가 하는 말을 믿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증거가 '하지 않는 말'에 더 집중하죠."
수현은 장갑을 낀 손으로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설탕 소리가 정적을 깼다. 맞은편에 앉은 김 씨는 초조한 듯 넥타이를 풀었다 조였다를 반복했다. 그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화려했던 명품 시계가 사라진 자리에는 창백한 피부만이 남아 있었다.
"차도진 선생님은 평생 커피나 차에 설탕을 넣지 않으셨어요. '순수한 본질을 가리는 기만'이라며 혐오하셨죠. 그런데 돌아가신 날, 선생님의 찻잔 옆엔 이 설탕 가루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게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김 씨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노인네가 죽기 전에 입맛이 변했나 보지. 그게 내 알리바이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김 씨의 미세한 안면 근육의 떨림을 포착했다. 베테랑 수사관의 직관이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상관이 아주 많죠. 부검 결과, 선생님의 식도와 위점막에서 미세한 설탕 결정이 발견됐거든요. 선생님은 독이 든 차를 마시기 직전, 설탕을 '한 움큼' 삼키셨습니다. 당신이 독을 타는 걸 보면서도 말이죠."
수현은 제2장에서 김 편집자가 원고의 오탈자를 수정하며 결벽증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던 복선을 떠올렸다. 김 씨는 완벽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잉크 한 방울조초 조심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살인 현장에 설탕 가루를 흘렸을 리 없었다.
"당신은 범행 현장을 완벽하게 치웠다고 생각했겠지만, 당신이 치운 건 당신의 흔적이지 선생님의 흔적이 아니었어요. 선생님은 당신이 독을 탄 차를 마신 뒤, 11시 11분에 시계가 멈추도록 기어에 설탕을 뿌리셨습니다. 그게 왜 가능했는지 아십니까? 설탕은 아코니틴 독소의 흡수를 아주 미세하게 지연시켜 주거든요."
수현은 노트북을 돌려 김 씨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8장에서 확보한 적외선 필름 영상이 정지 화면으로 떠 있었다. 20년 전 호숫가에서 연주를 밀치던 소년의 손목시계. 그리고 현재 김 씨가 강박적으로 문지르던 빈 손목.
"당신은 20년 전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시계를 벗어본 적이 없죠. 마음의 감옥에 갇혀서 말이야. 그런데 사건 당일, 저택 CCTV에는 당신의 손목이 비어 있었어요. 왜입니까? 20년 전 그 시계가 선생님의 찻잔에 부딪혀 흠집이라도 날까 봐 두려웠던 건가요, 아니면 그 시계가 범행 현장에 남겨질까 봐 겁이 났던 건가요?"
김 씨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증거 있어? 그 시계가 내 거라는 증거가 있냐고!"
수현은 기다렸다는 듯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취조실 문을 열고 수사관 한 명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증거물 상자 하나가 들어왔다. 그 안에는 김 씨의 본가 지하실에서 압수해 온, 20년 전의 낡은 예물 시계가 들어있었다.
"이 시계 뒷면을 감식해 봤습니다. 거기서 당신의 땀과 함께, 차도진 선생님의 서재에만 있는 '투구꽃 향료' 성분이 검출됐더군요. 당신이 선생님을 죽이던 그 순간, 이 시계는 당신의 주머니 속에 있었던 겁니다."
"시계에서... 향료가 나왔다고?"
김 편집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깨끗한 손가락 끝을 강박적으로 문질렀다. 제2장에서 원고의 오탈자를 잡아낼 때처럼 예민하게 굴던 그의 결벽증은 이제 스스로를 찌르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수현은 그가 무너지기 직전의 댐처럼 위태롭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선생님은 평생 만년필을 고집하셨죠. 그 잉크에는 특수한 투구꽃 향료가 섞여 있었습니다. 당신이 서재에서 원고를 훔치고 시계를 주머니에 넣던 그 짧은 순간, 선생님이 미리 잉크를 묻혀둔 원고의 가장자리가 당신의 시계 뒷면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은 겁니다."
수현은 취조실의 조명을 조금 더 낮췄다. 오직 테이블 위의 증거물 상자만이 도드라져 보였다.
"김 편집자님, 당신은 문장의 오탈자는 참지 못하면서, 당신 인생에 새겨진 거대한 오점은 왜 지우지 못했습니까? 당신 아버지가 시킨 일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자원한 일입니까?"
"아버지는... 아버지는 완벽해야 했어!"
김 씨가 마침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의 고개가 꺾이며 눈물이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20년 전 그날, 연주가 물에 빠졌을 때 난 정말 겁이 났어.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지. 아버지는 울고 있는 나를 때리며 말씀하셨어. '너의 실수는 가문에 오점이다. 그 오점을 지우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라고. 아버지는 최 형사를 불러 모든 걸 세탁했어. 강철수 형사를 범인으로 몰고, 노 씨를 실종 처리하고..."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차도진 선생이 회고록을 쓰겠다고 했을 때, 난 그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 거라는 걸 알았어. 최 형사가 연락해 왔지. 선생을 침묵시키지 않으면 우리 모두 끝이라고. 그래서... 그래서 아주머니(가정부)를 매수했어. 그녀의 복수심을 이용하면 난 손을 더럽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수현은 녹음기를 켜며 차갑게 물었다. "최 형사와의 거래 조건은 무엇이었지?"
"선생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고, 서재에 숨겨진 '원본 필름'을 넘겨받는 조건이었어. 최 형사는 이미 경찰 내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그 필름이 세상에 나오면 자기 목줄이 조죄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는 나에게 독초(투구꽃)를 구해주며 구체적인 살해 시간을 정해줬어. 정각 11시. 경찰 교대 시간이라 감시가 가장 허술한 때였지."
김 씨는 허탈한 듯 웃었다.
"그런데 선생은... 그 죽어가는 와중에도 설탕을 삼키며 버텼어. 11시 11분. 그 11분이라는 오차가 결국 내 모든 계획을 망친 거야. 선생은 죽으면서도 나를 비웃고 있었던 거야!"
수현은 김 씨의 자백이 담긴 조서를 조용히 정리했다. 수사관으로서의 냉철함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김 편집자님, 당신의 아버지가 지키려 했던 건 질서가 아니라 추악한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침묵의 대가로 영혼을 팔았죠.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교정'은 이 조서에 서명하는 것뿐입니다."
김 씨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았다. 평소 그가 그토록 아끼던 고급 만년필이 아니었다. 수사관이 건넨 낡은 볼펜이었다. 그가 서명을 마치는 순간, 취조실 밖 복도에서 최 형사가 체포되어 압송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은 취조실을 나왔다. 복도 끝 창밖으로 청평 호수의 안개가 완전히 걷히고 선명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20년 동안 썩어 문드러졌던 진실이, 설탕 한 알의 무게와 11분의 인내 끝에 비로소 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