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인(歸鄕印) : 잃어버린 대륙의 기억> 소설

연제 소설

by 산들강바람


[제3문단 낯선 일상과 보이지 않는 눈]


연천의 발굴 현장을 떠나 서울의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건너온 듯 기묘했다. 최 과장의 검은 차 안에서 민준은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도심의 네온사인과 퇴근길의 분주한 인파는 지독하리만큼 평온하고 이질적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2.5미터 아래 지층에서 겪었던 그 폭발적인 진동과 사내의 경고가 꿈이었기를 바랐지만, 재킷 안주머니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청동 조각과 사진 한 장이 그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릴 때 최 과장은 짧은 인사를 남겼다.


"내일 아침 연구소에서 뵙죠, 강 박사님. 아마 당신이 알던 세상은 오늘 밤으로 끝일 겁니다."


그 무거운 예언을 뒤로한 채 민준은 낡은 아파트 복도를 걸어 잠금장치를 풀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만 고고학 학술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벽면 가득한 서가에는 연대별 지층 분석 자료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민준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몸을 던졌다. 어둠 속에서 손바닥의 낙인은 은은하게 붉은빛을 내뿜으며 여전히 기분 나쁜 열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청동 조각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달빛을 받은 청동 조각은 이제 진동을 멈췄지만, 그 표면에 새겨진 '귀향'이라는 글자는 마치 어둠 속에서도 민준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동자 같았다.


"이게 정말... 내 피의 기억이라고?"


민준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학계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차가운 분석가로 통하던 자신이, 정체불명의 사내가 던진 몇 마디와 손바닥에 나타난 이상 증세 때문에 이토록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간신히 이성이 돌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물병을 내려놓던 민준의 시선이 창밖 건너편 건물 옥상에 머물렀다.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어둠 속, 붉은빛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정체되어 있고, 가로등이라기엔 너무 높았다. 민준의 고고학적 직관, 즉 미세한 층위의 변화를 읽어내는 감각이 경고음을 울렸다. 그것은 누군가 망원 렌즈를 통해 이쪽을 감시하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고 거실 불을 껐다. 심장 박동이 다시금 빨라졌다. 발굴 현장에서 만난 최 과장이 '남쪽의 수호자'라면, 저 어둠 속에 숨어 자신을 지켜보는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민준은 어둠 속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탁자 위의 청동 조각을 다시 거머쥐었다. 그때, 고요하던 적막을 깨고 그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 표시 제한. 민준은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늘한 기계음 섞인 바람 소리만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민준이 입을 열려던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조각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강 박사. 남의 물건을 가졌을 때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죠."


소름 끼치는 금속성의 목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겼다. 민준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그는 확실히 깨달았다. 연천의 구덩이에서 그가 파낸 것은 유물이 아니라,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죽여야만 끝나는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깨어진 안식과 사명의 낙인]


전화기는 끊겼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그 금속성 섞인 목소리가 잔향처럼 맴돌았다. 민준은 불 꺼진 거실 바닥에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창밖 건너편 옥상에서 깜빡이던 붉은빛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그것이 감시의 종료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고고학자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기어가듯 서재로 향했다. 손바닥의 낙인은 이제 고통을 넘어 박동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손으로 쥐고 흔드는 듯한 기괴한 공명이었다. 그는 책상 가장 아래쪽, 평소에는 열지 않던 깊숙한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낡은 가죽 일기장이 있었다.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의 빛바랜 장을 넘겼다. 아버지는 생전 술에 취해 대륙의 지평선과 쪼개진 거울에 대해 횡설수설하곤 했다. 당시 민준은 그것을 실패한 사업가의 망상이라 치부하며 외면했다. 하지만 지금, 일기장 갈피에서 떨어진 한 장의 메모가 그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연천의 붉은 흙 아래, 비명이 들리는 곳에 그것을 묻었다. 사토의 후예들이 눈을 뜨기 전에, 우리 혈육 중 누군가 그 비명을 들어야만 한다.' 증조부 강휘의 유언을 아버지가 옮겨 적은 것이 분명했다. 민준은 그 문장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자신이 오늘 발굴 현장에서 그 청동 조각을 찾아낸 것은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이천 년을 이어온 거대한 '기다림'의 종착지였다.


그때, 현관문 너머 복도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볍지만 절제된, 훈련받은 자의 걸음걸이였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탁자 위의 청동 조각과 아버지의 일기장을 품 안으로 거머쥐었다.


"강 박사님, 안에 계신 거 압니다. 물건을 내놓으시죠. 학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뜨거운 물건입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까 전화기 너머의 그 목소리였다. 민준은 뒷걸음질 치며 주방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5층. 뛰어내리기엔 높았지만,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는 냉철한 학자로서의 판단력을 순식간에 투사의 본능으로 전환했다.


"이건 당신들 것이 아니야."


민준은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읊조렸다. 그 순간, 품 안의 청동 조구가 다시 한번 강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마치 민준의 결단에 화답이라도 하듯, 손바닥의 낙인이 눈부신 옥빛으로 잠시 타올랐다. 그 빛은 민준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서재 벽에 걸려 있던 발굴용 해머를 손에 쥐었다. 평생 흙을 살살 털어내던 도구가 이제는 자신을 지키는 무기가 되어 있었다.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거칠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창문을 열고 베란다 실외기 너머로 몸을 던질 준비를 했다.


문이 부서지듯 열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들이닥치는 찰나, 민준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추락하는 짧은 순간, 그는 보았다. 자신의 방으로 들이닥친 자들의 가슴팍에 새겨진 기괴한 용 문양—'천룡회'의 표식이었다. 지면에 닿는 충격과 함께 민준은 구르며 골목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전신을 파고드는 통증보다 더 강렬한 것은, 이제 자신이 돌아갈 곳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서늘한 각성이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민준은 빗물이 고인 아스팔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머니 속 청동 조각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것은 그를 파멸로 이끄는 저주인 동시에, 이천 년 전 잃어버린 대륙으로 그를 인도할 유일한 등불이었다. 민준은 어둠 속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디 끝까지 가보자. 당신들이 지우려 했던 그 기록이 내 손에 있으니까."


고고학자 강민준의 일상은 그렇게 흙먼지와 함께 매몰되었고, 대륙의 기억을 짊어진 '귀향인'의 처절한 첫걸음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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