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수장고의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순간, 외부의 빗소리와 추격자들의 거친 발소리는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이곳은 민준이 지난 10년간 제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오늘 밤의 수장고는 마치 거대한 고대의 무덤처럼 차갑고 낯선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비상등의 희미한 푸른빛만이 끝없이 늘어선 유물 보관함 위로 유령처럼 일렁였다. 민준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골랐다. 젖은 옷에서 떨어진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오른손바닥의 낙인에 쏠려 있었다. 박물관 깊숙한 곳으로 들어올수록 낙인의 진동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해졌지만, 대신 그 열기는 더 깊은 뼛속까지 파고들어 민준의 골수를 태우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이 공간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동족'의 기운을 느끼고 반응하는 사냥개의 본능과도 같았다.
민준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신이 담당하던 '고대 북방 유물실'의 보관함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철저한 보안 절차를 거쳐야 열릴 보관함들이, 민준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미세한 금속음을 내며 반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떨며 보관함 유리 위에 올렸다. 그 순간, 보관함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이름 없는 청동 거울 파편들이 민준의 맥박에 맞춰 은은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것들이 전부 연결되어 있었단 말인가?"
민준의 입술이 경련하듯 떨렸다. 학자로서 그는 이 모든 유물들이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출토된 별개의 존재라고 가르쳐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몸이 느끼는 감각은 단호했다. 이 파편들은 이천 년 전 대륙의 심장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거대한 문장(紋章)이자, 흩어진 형제들의 비명이었다.
"강 박사님,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지금 밖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계시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민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민준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췄다.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린 민준의 시야에, 고문서 해독 전문가 이서윤의 창백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의 단정한 모습과는 달리 헝클어진 머리에 커다란 서류 뭉치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과 의구심, 그리고 무언가 말하지 못한 비밀이 뒤섞여 있었다. 민준은 그녀가 왜 이 늦은 시간에, 폐쇄된 수장고에 홀로 남아 있는지 물을 겨를도 없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옥빛 광채가 이미 그녀의 눈에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윤 씨...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날 쫓고 있어요. 아니, 나를 쫓는 게 아니라 내 손바닥에 깃든 이 저주를 쫓고 있는 겁니다."
민준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손을 내밀자, 서윤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오히려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은 민준의 얼굴이 아닌, 옥빛으로 타오르는 그의 낙인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안고 있던 고문서 뭉치 중 하나를 펼쳐 보였다. 그것은 박물관 비밀 수장고에서도 극비로 분류되어 일반 학자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던 '고조선 유민의 비망록' 복사본이었다. 그 종이 위에는 민준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과 정확히 일치하는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박사님... 제가 오늘 종일 이 문서를 해독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문서의 마지막 장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죠. '남쪽의 땅에 비가 내리고 피의 부름이 시작되는 날, 잠들었던 인장이 후손의 혈관을 타고 다시 솟구칠 것이다'라고요."
민준과 서윤, 두 학자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이제 수장고의 정적은 더 이상 평화로운 휴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구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서윤이 펼쳐 든 비망록의 누런 종이 위에는 민준의 손바닥에서 타오르는 것과 소름 끼칠 정도로 일치하는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민준은 홀린 듯 그 종이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38년 평생, 단 한 번도 믿지 않았던 초자연적인 현상이 그의 눈앞에서 실체화되고 있었다. 맞닿지도 않았는데, 종이 위의 인장이 옥빛으로 미세하게 진동하며 민준의 피부 속 낙인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80여 년 전 증조부가 목숨과 맞바꿨던 그 비명이에요."
민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서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 대신, 오히려 민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차가운 그녀의 손끝이 민준의 뜨거운 낙인 위로 닿자, 순간적으로 푸른 스파크가 튀며 수장고 내부의 공기가 정전기라도 일어난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강 박사님, 당신이 오늘 연천에서 파낸 건 단순한 청동 조각이 아니에요. 그건 잠들어 있던 이 대륙의 '심장 박동'을 깨운 겁니다."
서윤의 눈동자에는 학자로서의 지적 호기심을 넘어선, 어떤 숙명적인 공포와 경외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녀는 민준을 이끌고 수장고 가장 깊숙한 곳, 일반인에겐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특수 보관 구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꺼운 방탄유리 너머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긴 거대한 비석 조각 하나가 안치되어 있었다. 민준이 다가가자, 그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낮게 웅웅 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수장고의 육중한 철문을 뚫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픽—! 픽—!
소음기를 장착한 탄환이 철문에 박히며 공기를 찢는 둔탁한 파열음이었다. 뒤이어 육중한 해머가 문을 때리는 굉음이 정적을 찢어발겼다.
"시간이 없어요, 서윤 씨! 그들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민준이 다급하게 외치며 서윤을 비석 뒤로 밀어 넣었다. 서른여덟의 젊고 예리한 신경은 이제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손바닥의 낙인은 이제 민준의 팔 전체를 타고 올라와 어깨까지 옥빛 혈관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강 박사, 인장을 가진 자가 비석의 주인이 된다고 적혀 있었어요. 당신이 이 문을 열었듯이, 저 비석을 깨워야 해요!"
서윤의 절규와 동시에 수장고의 철문이 우그러지며 틈이 벌어졌다. 검은 연무탄이 안으로 흘러 들어오며 시야를 가렸다. 민준은 결단했다. 더 이상 학자로 남을 수 있는 평온한 세계는 없었다. 그는 폭주하는 낙인의 열기를 억누르는 대신, 오히려 그 모든 에너지를 손바닥 끝으로 모아 방탄유리 너머의 비석을 향해 내질렀다.
콰앙—! 유리벽이 산산조각 나며 흩날리는 파편 사이로 민준의 손바닥과 고대의 비석이 직접 맞부딪쳤다. 2,00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두 존재가 조우하는 순간, 박물관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거대한 충격파가 수장고를 휩쓸었다.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던 천룡회 요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고, 민준의 의식은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일방적인 파괴가 아니라, 잠들어 있던 거대한 거인이 눈을 뜨며 내뱉는 첫 번째 포효와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