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막을 찢는 듯한 이명과 함께 시야가 옥빛으로 물들었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민준은 바닥을 짚으며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수장고 안은 깨진 유리 파편과 매캐한 연무탄의 연기로 가득했다. 충격파의 중심이었던 비석 앞, 민준의 오른손바닥은 여전히 비석의 거친 표면에 맞붙어 있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단하기로 이름난 고대의 화강암 비석이 민준의 낙인이 닿은 지점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을 일으키며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파괴라기보다는, 마치 주인의 손길을 기다려온 봉인이 해제되는 듯한 경건한 소멸이었다.
"강 박사님... 괜찮으세요?"
비석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던 서윤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민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민준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끝에서 떨어져 나가는 비석의 파편들을 응시했다. 부서진 바위 틈새로, 2,000년의 먼지와 80년의 침묵을 뚫고 무언가 이질적인 광택을 내뿜는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일반적인 발굴물과는 달랐다. 겹겹이 칠해진 밀랍과 특수한 비단으로 감싸여 세월의 풍파를 완벽히 차단한, 한 권의 얇은 가죽 두루마리였다.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38년 평생을 학문적 데이터와 실증주의에 바쳐온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손끝에 닿은 이 물건이 증조부 강휘가 목숨과 맞바꿔 지켜낸 '살아있는 역사'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민준이 조심스럽게 두루마리의 끝동을 펼치자, 서윤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현대의 지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하지만 지독하리만큼 정교한 고대의 형세도였다. 누런 양가죽 위에는 한반도의 북부를 넘어 요동과 만주, 그리고 그 너머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대륙의 산맥과 물줄기가 핏빛 잉크로 그려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지도의 특정 지점마다 민준의 손바닥 낙인과 똑같은 형태의 인장들이 찍혀 있었는데, 그 인장들은 민준의 체온과 반응하듯 미세하게 점멸하며 살아 움직였다.
"이건... 단순한 지도가 아니에요."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증조부는 단순히 유물을 숨긴 게 아니라, 대륙의 기록들이 잠들어 있는 정확한 좌표를 이곳에 남겨두신 겁니다. 일제가 그토록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던, 우리 혈통만이 읽을 수 있는 '기록의 길'이에요."
민준은 지도의 한 귀퉁이에 적힌 작은 글귀를 발견했다. '남로(南路)의 끝에서 북방의 문을 보리라.' 80년 전, 죽음을 눈앞에 둔 증조부가 후손인 민준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민준은 자신의 나이 서른여덟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평생을 괴로워하며 짊어졌던 그 무거운 침묵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이 지도는 민준에게 단순한 연구 자료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완수해야 할 유언장이자 탈출구였다. 수장고 밖에서 다시금 사냥개들의 거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민준은 지도를 가슴 깊숙한 곳에 갈무리하며 서윤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깨어진 안식, 길 위의 서막]
수장고 밖 복도에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가 기괴할 정도로 선명하게 민준의 고막을 때렸다. 낙인의 힘으로 예민해진 감각은 적들이 정확히 세 명이며, 그들이 총기 재장전을 마쳤다는 사실까지 알려주고 있었다. 민준은 가슴팍에 갈무리한 양가죽 지도의 묵직한 감촉을 느끼며 서윤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서윤 씨, 여기서부터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준비됐습니까?" 민준의 짧은 물음에 서윤은 창백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은 부서진 비석 파편 중 가장 날카로운 조각을 손에 쥐고, 자욱한 연무를 뚫고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픽—! 픽—!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소리 없는 죽음의 선율이 들려왔다. 하지만 38세의 젊고 탄력적인 민준의 신체는 이미 탄환의 궤적을 비웃듯 바닥을 구르며 사각지대로 파고들고 있었다. 낙인의 고열이 전신을 휘감자 민준의 눈동자는 기이한 옥빛으로 번뜩였고, 그 순간 그는 박물관 수장고의 복잡한 배선과 환기구가 마치 투시된 설계도처럼 머릿속에 그려지는 경험을 했다. 민준은 서윤을 이끌고 비상 탈출용 승강기가 아닌, 자신이 평소 관리하던 유물 운반용 지하 레일을 향해 달렸다. 추격자들이 코너를 돌며 총구를 겨누는 찰나, 민준은 육중한 철제 카트를 밀어 통로를 봉쇄하고는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어두운 경사로로 몸을 던졌다.
지하 주차장의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멀리 출구 쪽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거대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드리프트를 하며 민준과 서윤의 앞에 거칠게 멈춰 섰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연구소의 만년 과장인 줄만 알았던,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안내자인 최 과장이었다. "생각보다 늦었군, 강 박사! 어서 타!" 최 과장의 외침과 동시에 민준은 서윤을 뒷좌석으로 밀어 넣고 자신도 차 안으로 몸을 날렸다.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빗줄기 쏟아지는 서울 도심으로 내달리는 순간, 민준은 멀어지는 박물관 건물을 백미러로 응시했다. 그곳엔 그가 10년간 쌓아온 명성, 안정된 직장, 그리고 평범한 강민준으로서의 삶이 남겨져 있었다. "이제 남쪽엔 우리가 있을 곳이 없네. 천룡회의 눈이 이미 관공서부터 학계까지 다 뻗쳐 있거든." 최 과장의 무거운 목소리에 민준은 말없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피부 깊숙이 박힌 낙인은 이제 통증 대신 잔잔한 박동을 내며 그를 대륙의 북쪽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서른여덟, 인생의 절반을 땅속의 죽은 역사를 캐는 데 바쳤던 남자는 이제 살아있는 역사를 지키기 위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비 내리는 서울의 야경이 뒤로 밀려나며, 대륙을 향한 '귀향인'의 처절한 여정이 비로소 그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