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과장의 검은 세단은 빗줄기를 뚫고 서울 외곽의 버려진 폐공장 제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뒷좌석에 앉은 민준은 가슴팍에 품은 양가죽 지도의 온기를 느끼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자신은 촉망받는 고고학 박사였으나, 이제는 국가적 유물을 탈취하고 박물관을 난장판으로 만든 도망자 신세였다. 38년 동안 쌓아 올린 사회적 지위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지만, 기이하게도 민준의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이 일렁였다. 차가 멈춰 선 곳은 녹슨 철문이 가득한 지하 창고였다. 최 과장이 무거운 셔터를 올리자, 겉모습과는 딴판으로 수만 권의 고서와 최첨단 모니터들이 즐비한 은밀한 '작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사님, 손 좀 보여주세요."
서윤이 구급상자를 들고 다가와 민준의 오른손을 살폈다. 낙인은 이제 피부 표면 위에 청동기 특유의 푸른빛과 핏빛이 섞인 기묘한 양각으로 굳어져 있었다. 서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미세한 진동이 일었지만, 아까와 같은 폭주하는 통증은 사라진 상태였다. 민준은 창백한 안색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최 과장에게 물었다.
"최 과장님, 아니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그리고 나를 쫓던 그 '천룡회'라는 자들은 대체 정체가 뭐죠?"
최 과장은 코트를 벗어던지며 모니터 하나를 켰다. 화면에는 연천 발굴 현장의 위성사진과 함께, 민준의 집 근처에서 포착된 검은 양복의 사내들 사진이 나열되었다. 최 과장의 눈빛은 평소 연구소에서 보여주던 멍청한 만년 과장의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남방 수호국' 소속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정부 기관이죠. 우리가 하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80년 전 당신의 증조부가 목숨 걸고 지켰던 그 '기록'이 엉뚱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감시하는 것."
그는 화면을 전환해 황금색 용 문양—천룡회의 표식을 띄웠다.
"천룡회는 이천 년 전 대륙에서 밀려난 후, 다시 그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고 힘을 키워온 비밀결사입니다. 그들은 당신 혈관 속에 흐르는 '귀향인의 피'를 원해요. 그 피가 있어야만 대륙 깊숙이 봉인된 '마지막 성소'의 문을 열 수 있거든. 강 박사, 당신은 그들에게 열쇠이자, 동시에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정통 계승자입니다."
민준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서른여덟, 인생의 중반에 들어선 고고학자에게 '정통 계승자'니 '성소의 열쇠'니 하는 말들은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바닥에서 박동하는 이 뜨거운 증표가 그 모든 황당한 이야기를 현실로 강제 소환하고 있었다. 민준은 품속에서 양가죽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지도는 은신처의 푸른 조명 아래에서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새로운 좌표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최 과장은 낡은 서랍장에서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 민준 앞에 놓았다. 1940년대 중반, 해방 직후의 혼란기 속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최 과장의 조부와, 민준이 기록으로만 보았던 증조부 강휘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의 손등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각기 다른 형태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민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가문이 짊어진 짐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오래된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당신네 강 씨 가문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해왔습니다. 80년 전 연천 갱도 사건 때, 내 조부님은 당신 증조부의 마지막 유언을 현장에서 받아 적었지. '피가 끓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록을 잠재우라'는 것이었네."
최 과장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는 민준의 손바닥 낙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천룡회는 단순히 역사를 조작하는 집단이 아니야. 그들은 1930년대 일제 만주군 소속의 비밀 연구소 '사토 부대'의 후예들이지. 그들은 대륙의 정기를 가두고 자신들만의 제국을 세우려 했고, 그 열쇠인 '귀향인의 인장'을 뺏기 위해 강 박사님의 증조부를 고문하고 죽였어. 이제 그들은 당신을 통해 그때 완성하지 못한 과업을 마무리하려 하는 거네."
민준은 사진 속 증조부의 눈을 응시했다. 서른여덟, 자신이 이룬 모든 성취가 실은 이 거대한 음모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한 껍데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하고 연천 발굴 현장에 자원한 것조차, 어쩌면 혈관 속에 각인된 본능이 이끈 정해진 수순이었을까. 민준의 시선이 옆에 서 있던 서윤에게 향했다. 그녀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슬픈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서윤 씨는요? 서윤 씨도 이 모든 걸 알고 나를 감시해 온 겁니까?"
서윤이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민준의 젖은 손을 잡았다.
"아니요, 박사님. 저는 그저 기록을 해독하는 학자일 뿐이에요. 하지만 제가 찾은 고문서 속에서 박사님의 성함과 이 문양을 발견했을 때, 저도 선택해야 했어요. 이 진실을 덮을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곁에서 끝을 볼 것인지. 저는 후자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민준은 옥빛으로 박동하는 자신의 손바닥을 꽉 쥐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연천의 흙을 파던 무기력한 학자가 아니었다. 증조부의 비명과 아버지의 침묵,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숨어 산 파수꾼들의 역사가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민준은 탁자 위의 양가죽 지도를 다시 한번 움켜쥐었다. 지도의 인장들이 민준의 각성에 반응하듯 이전보다 선명하게 붉은빛을 내뿜으며 북쪽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좋습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게 이 피라면, 직접 보여주죠. 대륙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민준의 선언과 함께 은신처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제 이론과 발굴의 시대는 끝났다. 38세 고고학자 강민준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위대한 '실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