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인(歸鄕印) : 잃어버린 대륙의 기억> 소설

by 산들강바람

[제2문단 : 겹쳐진 기록, 드러나는 좌표]


은신처의 중앙 탁자 위로 증조부의 양가죽 지도와 서윤이 박물관에서 목숨 걸고 빼내 온 고문서 복사본이 나란히 놓였다. 민준은 안경을 고쳐 쓰며 지도 위로 몸을 숙였다. 지도의 표면은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한 빛을 내뿜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 빛은 특정한 산맥과 강줄기를 따라 미세하게 흐르고 있었다. 민준은 38년 동안 갈고닦은 고고학적 직관을 총동원해 지형을 훑었다. 현대의 위성 지도와는 거리감이 달랐지만, 산맥의 굴곡과 물줄기의 방향은 분명히 한반도 북부와 요동 만주 벌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도 곳곳에 찍힌 인장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암호처럼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서윤 씨, 아까 수장고에서 보여준 그 비망록 구절을 다시 한번 대조해 봅시다. 인장이 찍힌 위치가 그냥 지명이 아닐 수도 있어요."


민준의 제안에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고문서를 펼쳤다. 그녀가 해독한 구절들 사이에는 '천문의 눈', '부러진 화살의 계곡', '일곱 번째 별이 뜨는 곳' 같은 은유적인 표현들이 가득했다. 민준은 서윤이 읽어 내려가는 텍스트와 지도 위의 인장들을 하나하나 겹쳐 보기 시작했다. 민준의 손바닥 낙인이 지도에 가까워질 때마다, 특정 지점의 인장이 반응하며 입체적인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문자를 띄웠다. 그것은 현대 한국어도, 한자도 아닌 고대 고구려의 기하학적 문양들이었다.


"이건 좌표가 아니라 '열쇠'예요, 박사님." 서윤이 흥분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지도의 인장은 위치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 위치에 가기 위해 필요한 신체적 조건을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비망록은 그 장소로 들어가는 '시간'을 기록한 거고요."


민준은 서윤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지도의 중심부, 가장 거대하게 빛나는 인장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곳은 한반도와 만주의 경계,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백두산의 서쪽 자락이었다. 지도의 인장이 민준의 손가락 끝에 닿자, 붉은빛이 강렬하게 요동치며 하나의 날짜를 형상화했다. '동지(冬至)의 전야'. 80년 전 증조부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첫 번째 관문이, 2026년의 차가운 은신처 안에서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민준은 전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정해졌다. 하지만 그곳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삼엄하고 금지된 구역, 바로 비무장지대(DMZ) 너머의 북방이었다.


[ 지워진 길, 비무장지대의 유령]


민준은 지도 위에 표시된 백두산 서쪽 자락, 그 험준한 산세가 가리키는 좌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곳은 지도상으론 존재하지만, 현대의 법과 정치가 그어놓은 서슬 퍼런 '금지선' 너머였다. 38년 평생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발굴단장으로 살아온 그에게 무단 월경과 밀입국이라는 단어는 지독하게 낯설고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손바닥의 낙인은 그런 민준의 망설임을 비웃듯, 비망록의 기록과 공명하며 더 뜨겁게 맥질하고 있었다.


"이 좌표는... 일반적인 루트로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휴전선을 가로지르는 것은 물론이고, 북측의 감시망과 천룡회의 포위망을 동시에 뚫어야 해요. 이건 고고학 탐사가 아니라 자살 행위입니다."


민준이 냉철하게 지적하자, 최 과장은 기다렸다는 듯 탁자 한편에 놓인 구식 무전기와 전술 지도를 펼쳤다. 그 위에는 80년 전 증조부가 묻어두었던 '기록의 길'과는 또 다른, 현대의 '검은 길'이 붉은 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거네, 강 박사. '남방 수호국'은 지난 수십 년간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DMZ 지하에 버려진 땅굴과 잊힌 보급로들을 관리해 왔지. 1950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은, 일명 '유령의 길'이 있네. 증조부께서도 아마 그 길을 통해 대륙의 단서들을 남쪽으로 옮기셨을 거야."


민준은 최 과장이 가리키는 루트를 살폈다. 그것은 서류상으론 존재하지 않는, 지도와 지도 사이의 빈틈을 파고드는 비열하고도 필사적인 경로였다. 서윤은 옆에서 민준의 떨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박사님, 우리가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박사님이 평생 일궈온 학계의 명예와 박사라는 타이틀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서윤의 물음은 민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민준은 잠시 눈을 감고, 차가운 박물관의 공기와 자신의 연구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커피 잔의 온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곧이어 떠오른 것은 80년 전 갱도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이름 없는 사내들과,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이 뜨겁고도 장엄한 역사의 무게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민준의 눈동자에는 학자 특유의 신중함 대신, 진실을 쫓는 추적자의 서늘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박사라는 칭호는 죽은 종이 위에나 남겨두죠. 지금 내 손바닥에 새겨진 이 인장이 나에게 요구하는 건 학술 논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땅에 대한 증언이니까요. 가겠습니다. 그 유령의 길이라는 곳으로."


민준의 결단이 떨어지자 은신처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최 과장은 묵묵히 권총의 탄창을 점검하며 나직한 금속음을 냈고, 서윤은 고문서 더미를 방수 가방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이제 이론의 시간은 끝났다. 38세 민준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이, 비무장지대의 안갯속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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