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인(歸鄕印) : 잃어버린 대륙의 기억> 소설

by 산들강바람

제4장: 경계선의 밤


[제1문단 : 지워진 이름과 되살아난 기록]


동굴의 입구가 거대한 석문의 중압감과 함께 닫히는 순간, 민준의 고막을 메우던 남쪽의 소음들은 일순간에 소멸했다. 그것은 단순한 방음이 아니었다. 38년 평생을 살아온 익숙한 세계와의 영원한 단절이자, 사회적 강민준의 장례식과도 같았다. 민준은 습기 찬 바닥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을 더듬었다. 그곳에는 80년 전 증조부가 목숨과 맞바꾼 양가죽 지도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비릿한 화약 냄새와 빗물이 섞인 옷에서 한기가 올라왔지만, 오른손바닥의 낙인은 오히려 골수를 태울 듯한 고열을 내뿜으며 어둠 속을 옥빛으로 물들였다.


불과 몇 시간 전, 서울에서의 사투는 처절함을 넘어 비현실적이었다. 천룡회의 손길은 민준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은밀하게 남쪽 사회의 혈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민준이 잠시 비운 사이 연천의 연구실과 아파트를 흔적도 없이 불태웠고, 학계의 유력 인사들을 포섭해 그를 '국가 지정 문화재 절도범'이자 '정신 착란에 빠진 학자'로 낙인찍었다. 한때 촉망받는 고고학자로 불리며 강단에 섰던 민준의 이름은 이제 뉴스 하단 자막을 도배하는 추악한 도망자의 이름이 되어 있었다. 10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논문들과 발굴 기록들은 서버에서 삭제되었고, 그의 모든 존재 증명은 0과 1의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남쪽은 더 이상 그에게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덫이었고, 민준은 그 덫에서 자신의 이름과 명예라는 살점을 뜯어낸 채 이곳, 금지된 경계선으로 기어들어 온 것이었다.


"박사님... 아니, 민준 씨. 정신 차리세요. 여기서 멈추면 우리는 정말로 유령이 됩니다."


서윤의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민준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 민준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벽면을 짚었다. 낙인의 광채가 닿는 곳마다, 거칠게 깎인 화강암 벽면 위로 고구려 특유의 강렬하고 거침없는 기상의 벽화들이 그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민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곳에 그려진 것들은 그가 교과서와 정통 사학계의 논문에서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지극히 위험하고도 신성한 기록들이었다.


벽화의 중심부에는 《환단고기》 중 〈태백일사(太白逸史)〉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기록된 태고의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세 개의 빛줄기, 즉 천부인(天符印)의 형상이 거대한 태양을 호위하고 있었고, 그 주위를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고구려의 기마병들이 엄호하고 있었다. 특히 민준을 경악케 한 것은, 벽화 속 군주가 손을 들어 올린 지점에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진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동일한 문양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조롱받던 그 세월 동안, 누군가는 이곳에 진짜 역사를 새겨 넣은 거예요. 고구려가 고조선의 북부여를 계승하며 수호하고자 했던 그 '근원의 기록'이 바로 이 길 속에 잠들어 있었던 겁니다."


민준은 홀린 듯 벽화 속의 인장 위로 자신의 낙인을 포개었다. 그 순간, 차가운 돌벽을 뚫고 2,000년의 시간을 건너온 거대한 진동이 민준의 전신을 관통했다. 그것은 비명인 동시에 포효였고, 지워진 역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는 처절한 간구였다. 38세의 젊은 학자가 가졌던 실증주의적 회의론은 낙인의 고열 앞에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 민준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남쪽의 권력자들이 왜 그토록 자신을 지우려 했는지. 그들은 단순히 황금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땅의 뿌리를 증명하는 단 하나의 혈통, 즉 '귀향인'의 귀환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는 남쪽의 화려한 조명 탄 냄새가 아닌, 굶주림과 감시, 그리고 지독한 고립감이 서린 북쪽의 삭막한 공기가 섞여 있었다. 민준은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길을 응시했다. 이제 이 통로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숨소리조차 죄가 되는 삼엄한 감시 국가 북한의 들판일 것이었다. 낙오된 자들의 이름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곳에서, 민준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오직 본능과 이 기록에 의지해 사선을 넘어야 했다. 민준은 옆에 선 서윤의 차가운 손을 꽉 잡았다. 이제 그들은 지도에도 없는 길을 걷는 유령이자, 역사를 등에 업은 수호자가 되어야 했다. 민준은 마지막으로 폐쇄된 남쪽의 문을 향해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안녕히, 내가 사랑했던 나의 세계여.


[ 붉은 별의 장막과 낙오된 자들의 길]


벽화의 빛이 정점에 달했을 때, 동굴 바닥을 타고 기이한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지하수가 아니었다. 벽화 속 '천부인'의 문양에서 스며 나온 옥빛 액체는 바닥에 새겨진 정교한 수로를 따라 흐르며 거대한 기하학적 진(陣)을 형성했다. 민준은 학자로서의 직감으로 이것이 침입자를 가려내기 위한 고대의 '혈맥 인증' 기제임을 깨달았다. 만약 민준의 손바닥에 새겨진 낙인이 이 길의 정통 계승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 동굴은 거대한 무덤으로 변했을 것이었다. 낙인의 고열이 최고조에 달하며 민준의 시야가 붉게 점멸하자, 마침내 동굴 끝을 막아서고 있던 육중한 암벽이 비명 같은 금속음을 내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이제부터는 숨소리조차 죄가 되는 땅입니다. 박사님, 아니... 이제 우리는 이름 없는 유령입니다."


최 과장의 나직한 경고와 함께 그들이 마주한 것은 지독한 어둠이었다. 동굴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남쪽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화려한 네온사인이나 자동차의 불빛 하나 없는, 거대한 묵화(墨畵) 같은 산맥의 능선만이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민준은 첫발을 내디디며 발끝에 닿는 차가운 흙의 감촉을 느꼈다. 이곳은 북한, 그중에서도 가장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는 비무장지대 북방 한계선 인근이었다. 38세의 고고학자가 가졌던 모든 사회적 페르소나는 이제 이 삭막한 황무지 위에서 완전히 휘발되었다. 그는 이제 남쪽에서도 지워졌고, 북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말 그대로 세계에서 '낙오된 존재'가 된 것이었다.


멀리서 서치라이트의 날카로운 빛줄기가 밤하늘을 가르며 주변을 훑었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며 서윤을 끌어당겼다. 보초병들의 투박한 발소리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이 바람을 타고 들려올 때마다, 민준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느껴졌다. 남쪽에서의 사투가 세련된 기술과 자본의 압박이었다면, 이곳에서의 위협은 날 것 그대로의 살의와 지독한 굶주림이 섞인 생존의 공포였다. 민준은 지도를 확인했다. 지도의 다음 좌표는 북한군 비밀 기지 아래 잠든 고구려의 지하 요새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낙오되는 순간, 기록은 영원히 매몰될 겁니다."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흙을 꽉 쥐었다.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지뢰가 터지거나 당국의 감시망에 걸려 영영 사라질 수 있는 상황. 민준은 서른여덟 해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극한의 고립감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진 고대 인장의 박동에 더 의지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남과 북,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역사의 목격자'로서, 이 삭막한 고립의 들판을 가로질러야 했다. 차가운 빗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민준의 눈은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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