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인(歸鄕印) : 잃어버린 대륙의 기억> 소설

by 산들강바람

[제2문단 : 붉은 그림자와 이름 없는 무덤]


동굴 밖 북한의 대지는 지독하리만큼 고요했고, 그 정적은 오히려 민준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다. 남쪽에서의 밤이 화려한 인공광으로 가득한 '소음의 바다'였다면, 이곳의 밤은 모든 빛을 집어삼킨 '진공의 늪'이었다. 민준은 진흙탕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능선 너머로 주기적으로 훑고 지나가는 낡은 서치라이트의 궤적을 살폈다. 빗물에 젖은 흙에서는 남쪽과는 다른, 뭔가 삭막하고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38세의 고고학자가 가졌던 지적인 여유는 이미 증발한 지 오래였다. 이제 그의 신경은 오직 '살아남아 기록을 지켜야 한다'는 원초적인 생존 본능에만 반응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12시 방향의 감시초소... 저 아래가 바로 우리가 들어가야 할 지하 요새의 통기구입니다."


최 과장의 나직한 속삭임에 민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최 과장이 가리킨 곳은 붉은 별이 그려진 낡은 깃발이 비바람에 펄럭이는 북한군 최전방 초소였다. 지도가 가리키는 고구려의 지하 요새는 아이러니하게도 북한군이 구축한 현대식 요새의 가장 밑바닥에 잠들어 있었다. 남쪽에서 낙오되어 온 그들에게 이곳은 가장 위험한 적진인 동시에, 유일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성소(聖所)이기도 했다. 민준은 품속에서 양가죽 지도를 꺼내 조심스럽게 펼쳤다. 지도는 이제 민준의 낙인과 공명하며, 북한군 초소 지하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기묘한 혈맥을 붉게 점멸하며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는 산채로 이 땅의 유령이 될 겁니다. 북한이라는 사회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박사님도 잘 아시겠죠."


최 과장의 말은 뼈아팠다. 이곳에서 붙잡히는 순간, 그들은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낙오된 이방인'으로 처형될 것이었다. 민준은 옆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지독한 공포와 함께, 이 미친 여정을 끝내고야 말겠다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민준은 자신의 손바닥 낙인을 꽉 쥐었다. 옥빛 광채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두꺼운 장갑을 덧대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고동은 마치 "어서 나를 대륙의 심장으로 데려가라"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민준은 몸을 일으켜 포복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한 발짝을 내디딜 때마다 지뢰의 공포와 감시병의 시선이 민준의 등줄기를 훑었다. 38세,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를 보내야 할 남자가 지금 북한의 차가운 진흙 바닥을 기며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민준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환단고기》의 구절들이 민준의 귓가에 환청처럼 들려왔고,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이 땅의 진동은 그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이천 년 전의 파수꾼들이 이 어둠 속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민준은 마침내 초소의 외곽 철책 아래, 지도가 가리키는 은밀한 균열 앞에 도달했다.


[ 심연의 입구와 기시감(旣視感)]


민준은 차가운 진흙 바닥 위를 **포복(匍匐)**하며 초소의 외곽 경계선을 파고들었다. 서치라이트의 날카로운 궤적이 머리 위를 지날 때마다, 그는 숨을 멈추고 땅의 박동에 몸을 맡겼다. 남쪽에서의 안온(安穩)했던 삶에 대한 **회한(悔恨)**이 잠시 뇌리를 스쳤으나, 이내 손바닥의 낙인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가 그를 현실로 불러 세웠다. 드디어 도달한 통기구는 겉으로 보기에 녹슨 폐가스관처럼 방치되어 있었지만, 민준이 손을 대자 80년 전의 시간이 응축된 듯한 기묘한 **공명(共鳴)**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곳입니다. 누군가 최근에 이 입구를 손본 흔적이 있어요."


민준의 나직한 지적에 최 과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통기구의 덮개는 낡았지만, 경첩 부분에 칠해진 기름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북한이라는 폐쇄된 사회, 그중에서도 가장 삼엄한 최전방 초소 지하에 누군가 이 길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독한 **전율(戰慄)**을 선사했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북한의 수호자'가 남긴 소리 없는 초대장일지도 몰랐다. 민준은 낙인의 힘으로 무겁게 닫혀 있던 빗장을 풀었다. 육중한 철문이 비명 같은 금속음을 내며 열리자, 그 아래로 끝을 알 수 없는 **심연(深淵)**의 어둠이 입을 벌렸다.


민준은 서윤의 허리에 로프를 감고 먼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수십 미터를 타고 내려간 끝에 발끝에 닿은 것은 현대식 콘크리트가 아닌,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온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 바닥이었다. 민준이 랜턴을 비추자, 북한군의 현대식 지하 요새 바로 아래층에 숨겨져 있던 광활한 고구려의 지하 요새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습기 찬 벽면마다 새겨진 거대한 신수(神獸)들의 문양은 민준에게 묘한 **기시감(旣視感)**을 주었다. 38세의 고고학자로서 평생을 바쳐온 지식들이 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 실체화되고 있었다. 지도는 이제 민준의 심장 바로 위에서 미친 듯이 고동치며, 더 깊은 대륙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을 붉은 혈관처럼 그려내기 시작했다. 민준은 이곳이 단순히 도망자들의 피난처가 아니라, 대륙을 호령하던 선조들이 남긴 최후의 **보루(堡壘)**임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낙오(落伍)**된 자가 아니라, 두 세계를 잇는 유일한 혈맥의 수호자로서 이 거대한 어둠을 가로질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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