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문단 : 고립(孤立)의 들판과 잊힌 제국의 심장]
지상에서 들려오던 북한군 보초병들의 거친 함경도 사투리가 먼지 섞인 환풍구 너머로 희미해질 때쯤, 민준 일행은 비로소 고구려 지하 요새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천장은 거대한 현무암을 깎아 만든 궁륭(穹窿) 형태로 솟아 있었고, 벽면에는 2,000년의 세월을 견딘 **청룡(靑龍)**과 **주작(朱雀)**의 벽화가 민준의 낙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옥빛에 반응하며 기이하게 일렁였다. 38세의 고고학자 강민준에게 이곳은 평생 꿈꿔온 학문적 **귀결(歸結)**의 장소였으나, 동시에 단 한 걸음도 마음대로 뗄 수 없는 지독한 **감옥(監獄)**이기도 했다. 남쪽에서는 범죄자로 몰려 지워졌고, 북쪽에서는 존재 자체가 불법인 그는 지금 인류 문명에서 완벽히 **낙오(落伍)**된 유령이었다.
"이곳의 공기는 지상과는 다릅니다. 이념(理念)도, 체제(體制)도 닿지 않는 태고의 숨결이 느껴지는군요."
민준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벽면을 짚었다. 차가운 돌벽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은 《한단고기》의 '북부여기'에 기록된 단군 세대의 위엄을 증명하듯 묵직했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 천장 너머 지상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군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북한군 수색대가 지하 통로의 이상을 감지한 듯했다. 민준은 숨을 죽이고 서윤의 손을 꼭 잡았다. 북한이라는 거대한 감시 사회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망각(忘却)**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38년 동안 쌓아 올린 이성적인 판단력은 이제 오직 본능적인 **생존(生存)**의 감각으로 치환되어 민준의 전신을 꼿꼿이 세웠다.
민준은 품속에서 양가죽 지도를 꺼내 최 과장과 머리를 맞댔다. 지도는 이제 고구려 요새의 혈맥을 따라 북한의 일반 민가(民家)로 이어지는 은밀한 배수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은 굶주림과 감시가 일상이 된 북한 주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비극(悲劇)**의 현장일 터였다. 민준은 자신의 손바닥 낙인이 가리키는 그 어둡고 좁은 길을 응시했다. 이제 이 요새를 나가는 순간,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오직 이천 년 전의 기록만을 이정표 삼아 사선(死線)을 넘어야 했다. 민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을 넘어선 **명징(明澄)**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제 그는 역사의 관찰자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을 직접 온몸으로 받아내는 **당사자(當事者)**가 되어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좁고 축축한 배수로를 기어 나와 마침내 북한의 거친 대지 위로 몸을 숨겼을 때, 민준을 맞이한 것은 환영의 함성이 아니라 지독한 **정적(靜寂)**과 비릿한 흙내음이었다. 38세의 고고학자 강민준.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학문적 성과와 사회적 지위는 이제 휴전선 이남의 서류 뭉치 속에서 '반국가적 범죄'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채 소각되고 있었다. 민준은 진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가슴팍을 더듬었다. 그곳에는 80년 전 증조부가 목숨과 맞바꾼 양가죽 지도가 묵직한 **실체(實體)**로 존재하고 있었다. 남쪽의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음에도, 오직 이천 년 전의 기록만이 민준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준거(準據)**였다.
"강 박사님,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연구했는지 이곳에선 아무도 몰라야 합니다.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당신의 유일한 과업입니다."
최 과장의 나직한 목소리가 민준의 귓가를 때렸다. 최 과장은 민준의 어깨를 꽉 쥐며 그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강 박사'. 남쪽에서는 존경과 시기의 대상이었던 그 호칭이, 이곳 북한의 서슬 퍼런 감시망 아래에서는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표적(標的)**이 되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는 세련된 강단의 교수가 아니라, 이름 없는 도망자가 되어 이 삭막한 북방의 대지를 가로질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과장이 여전히 자신을 '박사'라 불러주는 것에서, 민준은 무너진 자존심의 마지막 조각을 간신히 붙들 수 있었다.
민준의 뇌리에는 남쪽 연구실에 남겨두고 온 동료들의 얼굴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갔다. 평생을 형처럼 따랐던 박 팀장, 그리고 민준의 연구를 뒷바라지하며 밤을 지새우던 이 연구원. 그들은 지금쯤 텔레비전 뉴스 속보를 보며 어떤 **배신감(背信感)**과 **의구심(疑懼心)**에 휩싸여 있을까. 천룡회의 압력에 굴복한 학계가 민준을 '정신 착란에 빠진 유물 도둑'으로 몰아세울 때, 누군가는 그를 위해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그의 흔적을 지우고 있을 것이었다.
"남겨진 동료들이 우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남쪽에서 벌이는 싸움은 우리의 탈출만큼이나 **치열(熾烈)**합니다. 그들의 **희생(犧牲)**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최 과장의 말대로, 남쪽 수호국의 동료들은 지금 천룡회의 그림자와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들은 강 박사가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위조된 행적을 뿌리고, 내부의 배신자를 색출하며 스스로를 **소모(消耗)**하고 있었다. 민준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통증(痛症)**을 느꼈다. 38세, 안정된 삶을 누려야 할 나이에 맞이한 이 거대한 **단절(斷絶)**은 그를 끝없는 **고립(孤立)**의 심연으로 밀어 넣었으나, 동시에 그가 반드시 대륙의 성소에 도달해야만 하는 강력한 **동력(動力)**이 되었다.
민준 일행은 서치라이트의 날카로운 궤적을 피해 북한의 민가(民家) 인근 옥수수밭으로 몸을 숨겼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풍경은 지독하리만큼 삭막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북한군 보초병의 투박한 군화 소리만이 이곳이 살아있는 지옥임을 **방증(傍證)**했다. 굶주림과 감시가 일상이 된 이곳 주민들에게, 강 박사와 같은 '낙오된 이방인'은 그 자체로 거대한 위협이자 신고의 대상이었다.
그때였다. 민준의 예리한 감각이 어둠 속의 기척을 잡아냈다. 옥빛 낙인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근처에 같은 혈맥의 기운이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담벼락 아래, 낡은 인민복을 걸친 한 사내가 미동도 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천룡회의 요원도, 북한의 보초병도 아니었다. 대대로 이 땅의 비밀을 지켜온 **'북측의 수호자'**가 보낸 은밀한 파수꾼이었다. 민준은 자신의 손바닥 낙인을 꽉 쥐며, 강 박사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자신의 본질을 철저히 은폐했다. 이제 그는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오직 이천 년 전 선조들이 남긴 **숙명(숙명)**의 길을 걷는 유령이 되어야 했다.
38세의 고고학자 강 박사는 차가운 북한의 흙바닥에 얼굴을 묻고 다짐했다. 남겨진 동료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지독한 분단의 벽 너머에 잠든 대륙의 진실을 위해서라도 절대 멈추지 않겠다고. 안개 낀 북한 마을의 실루엣이 마치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처럼 그들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지만, 민준의 눈동자만은 어느 때보다 **명징(明澄)**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멸망한 제국의 후예가 2,000년 만에 자신의 땅을 밟으며 내뱉는 첫 번째 **포효(咆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