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대륙의 입구
지하 요새를 빠져나와 마주한 북한의 찬 공기는 폐부를 찌르는 칼날 같았다. 강 박사는 젖은 흙바닥에 몸을 누인 채, 멀리 보이는 북한군 초소의 서치라이트가 밤하늘을 난도질하는 광경을 응시했다. 남쪽에서의 명예와 지위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오직 살아야 한다는 비루한 본능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 본능마저도 함께 선(線)을 넘은 동료들 사이의 갈등(葛藤) 앞에서는 무력했다. 38년 평생을 이성(理性)과 논리로 무장해 온 강 박사였으나, 굶주림과 공포가 지배하는 이 **고립(孤立)**의 들판에서 그가 가진 지식은 아무런 **방패(防牌)**가 되어주지 못했다.
"더는 못 가요... 제발, 조금만 쉬었다 가요. 내 몸이... 내 의지를 **배반(背信)**하고 있단 말이에요!"
서윤의 억눌린 비명이 정적을 찢었다. 그녀의 발목은 이미 심하게 부어올랐고, 공포에 질린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자 최 과장이 서윤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낚아챘다. 그의 눈에는 동료를 향한 연민 대신, 임무 완수를 향한 지독한 **냉혈(冷血)**만이 서려 있었다.
"이보시오, 서윤 씨! 지금 여기서 멈추면 우리 셋 다 개죽음입니다. 당신 하나 때문에 이천 년의 기록을 북한 놈들 손에 넘길 셈입니까?"
"누구보다... 그 기록의 무게를 잘 아는 건 저예요! 하지만 우리가 그 진실의 조각을 보기도 전에 여기서 얼어 죽는다면, 그 기록이 무슨 소용이죠? 죽은 자는 역사를 증언(證言)할 수 없단 말입니다!"
서윤의 절규는 학자로서의 **좌절(挫折)**과 인간으로서의 **한계(限界)**가 뒤섞인 처절한 외침이었다. 두 사람의 **사투(死鬪)**와도 같은 말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강 박사는 그들 사이에서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최 과장의 말이 옳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으나, 육체적 한계에 다다른 서윤의 고통 또한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셋의 의지는 각자의 생존과 신념을 위해 뿔뿔이 **분열(分裂)**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 박사의 오른손바닥, 청동기 인장이 새겨진 낙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으며 강렬한 경고를 보냈다. 최 과장과 서윤의 다툼에 정신이 팔려 있던 순간, 민준은 낯선 한기에 몸을 떨며 뒤를 돌았다. 툭—! 어둠 속에서 솟아난 듯한 누군가와 강 박사의 어깨가 세게 부딪혔다. 빗물에 젖은 낡은 인민복,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였다. 강 박사는 반사적으로 사과하려 입을 열었지만,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숙살(肅殺)**한 기운에 압도되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사과를 받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미동도 없이 깊게 눌러쓴 모자챙 아래, 감정이 거세된 듯한 무심한 눈동자로 강 박사 일행을 훑었을 뿐이다. 그 눈빛은 마치 남쪽에서 **낙오(落伍)**되어 온 짐승들을 다루는 도살자의 그것처럼 서늘했다. 그는 조력자가 아니었다. 이 야만적인 **생존(生存)**의 현장, 그 모든 파멸의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며 당국에 보고할 준비를 마친 북측의 **감시자(監視者)**였다. 강 박사는 흙탕물 섞인 빗물을 삼키며, 자신의 이름이 이제는 탈출 불가능한 거대한 **형틀(刑具)**에 묶여 있음을 직감했다.
어둠 속에서 솟아난 사내와 부딪힌 어깨를 타고 기이한 한기가 전신으로 퍼졌다. 강 박사는 젖은 흙탕물이 튀어 오른 바지를 내려다볼 겨를도 없이, 사내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숨을 멈췄다. 보통의 북한 주민이라면 이 야심한 시각에 낯선 자와 마주쳤을 때 당황하거나 비굴하게 몸을 낮추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사내는 달랐다. 그는 마치 그 자리에 박힌 비석처럼 요동도 하지 않았고, 깊게 눌러쓴 모자챙 아래로 비치는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의 **파문(波紋)**도 일지 않는 거울과 같았다. 강 박사는 찰나의 순간, 사내의 투박한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까딱이며 자신들의 행색을 **관찰(觀察)**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먹잇감을 응시하는 포식자의 **냉정(冷靜)**한 시선이었다.
"이보시오, 동무. 길을 좀 비켜주지 않갔소?"
최 과장이 서윤을 부축한 채 거칠게 한마디를 내뱉으며 사내를 밀치듯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사내는 비켜서는 대신, 최 과장의 소매 끝에 묻은 남쪽 특유의 섬유 유연제 향기라도 맡으려는 듯 코끝을 살짝 움찔거렸다. 그 짧은 대치(對峙) 속에서 강 박사는 깨달았다. 이 사내는 단순히 지나가는 행인이 아니다. 북한이라는 거대한 감옥을 유지하기 위해 곳곳에 배치된 무형의 벽, 즉 **감시자(監視者)**의 살아있는 눈이었다. 그가 당장 소리를 질러 경보를 울리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끝까지 **추적(追跡)**하여 뿌리째 뽑아내기 위한 북한식 보위(保衛) 전술의 시작이었다.
사내가 다시 어둠 속으로 유령처럼 스며들자, 세 사람 사이에는 지독한 **정적(靜寂)**과 함께 날 선 **갈등(葛藤)**이 폭발했다. 서윤은 부어오른 발목을 감싸 쥐며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기록에 대한 집념보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동료들에 대한 **원망(怨望)**이 서려 있었다.
"방금 그 사람... 우리를 보고도 아무 말 안 했어요. 이건 신고하러 간 거잖아요! 최 과장님, 당신의 그 오만한 확신 때문에 우린 여기서 끝장날 거예요!"
"서윤 씨, 입 닥쳐! 지금 그 소리가 보초병들 귀에 들어가면 진짜 끝장이야. 강 박사, 당신도 뭐라 말 좀 해보시오! 이 여자를 업고서라도 가야 할 거 아니요!"
최 과장의 목소리에는 이제 파트너로서의 예우 대신, 생존을 위한 처절한 **강요(强要)**만이 남아 있었다. 강 박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차가운 빗물을 들이켜며 자신의 손바닥 낙인을 내려다보았다. 옥빛 광채는 이제 죽음의 빛깔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머릿속은 지독한 **환각(幻覺)**과 **이성(理性)**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남쪽의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지금 당장 목을 죄어오는 이 **고립(孤立)**의 공포 앞에서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강 박사는 서윤의 떨리는 어깨를 짚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감시받고 있습니다. 저 사내뿐만이 아니에요. 이 마을의 흙과 바람, 심지어 저 어둠조차 우리를 **심판(審判)**하려 들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논리적인 박사가 아닌,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공허한 울림이었다. 세 사람의 신뢰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균열(龜裂)**이 생겼고, 북한의 삭막한 들판은 낙오된 그들을 향해 천천히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고결한 역사의 복원이 아니라, 서로를 짓밟고서라도 어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추악한 **생존(生存)**의 증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