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의 형상이 벽면의 부조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지자, 비도(秘道) 내부에는 아까보다 더욱 지독하고 비릿한 **정적(靜寂)**이 내려앉았다. 최 과장은 여전히 권총을 치켜든 채 사내가 서 있던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검지는 방아쇠를 움켜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기를 이뤄 흘러내렸다. 평생을 실전과 전술, 그리고 눈에 보이는 적만을 상대해 온 그에게 방금 전의 상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오욕(汚辱)**이자 **공포(恐怖)**였다.
'귀신 장난인가, 아니면 집단 환각인가.'
최 과장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는 남쪽에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며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었지만, 탄환이 허공에서 꺾이는 광경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강 박사는 보호해야 할 '자산'일뿐이었으나, 이제 그의 눈에 비친 강 박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異質)**적인 괴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강 박사, 당신... 정체가 대체 뭐야? 방금 그놈하고 무슨 대화를 한 거지? 왜 저놈이 당신 앞에서 무릎을 꿇은 거냐고!"
최 과장의 목소리는 이제 협력자의 그것이 아니라, 상대를 거칠게 몰아세우는 **취조자(取調者)**의 음성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총구를 강 박사가 아닌, 바닥의 물웅덩이로 내리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강 박사의 품에 안긴 청동거울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물건만 있으면 인민군 수색대 따위는 한꺼번에 소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탐욕과, 동시에 제어할 수 없는 힘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拒否感)**이 그의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한편, 강 박사의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서윤은 이제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지나온 모든 세월 동안 고고학을 통해 인류의 발자취를 학문적으로 증명해 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지금 이 어두운 지하 통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녀가 쌓아온 지식 체계를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이건 내가 알던 고고학이 아니야. 이건 광기(狂氣)야. 우린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없어.'
서윤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흔들렸다. 그녀에게 강 박사의 변화는 경외심이 아니라 지독한 **배신감(背信感)**으로 다가왔다. 자신과 같은 학자인 줄 알았던 강 박사가 신비로운 힘에 취해 파수꾼과 무언가 은밀한 교감을 나누는 모습은, 그녀를 철저한 외톨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박사님, 제발... 이제 그만해요. 저 거울, 그냥 버리면 안 돼요? 저게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라 잡아먹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최 과장님 말대로 우린 지금 미쳐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북한군에게 잡히는 게 차라리 인간적인 죽음일지도 모른다고요!"
서윤의 절규는 습한 벽면에 부딪혀 공허하게 되돌아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동료에 대한 신뢰 대신, 자신을 이 지옥 같은 **비도(秘道)**로 끌어들인 자들에 대한 원망과 처절한 **자기 방어(自己防禦)**만이 남아 있었다.
강 박사는 두 사람의 날 선 반응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살아온 모든 날 동안 그는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평가에 민감한 지식인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료들의 비난조차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파수꾼이 남긴 "희생"이라는 단어가 거울의 진동을 타고 그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 과장님, 서윤 씨. 우린 이미 이 여정의 **제물(祭物)**이 되기로 서약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거울이 길을 열었다는 건, 이제 우리 중 누구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강 박사의 차가운 대답에 최 과장의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최 과장은 권총을 홀스터에 거칠게 집어넣으며 강 박사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에는 이제 동료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정한 생존 본능만이 번뜩였다.
"희생? 제물? 헛소리하지 마. 난 내 부하들을 사지에 버리고 온 놈이야. 오직 이 임무 완수만이 내 유일한 면죄부지. 당신이 그 거울로 무슨 신이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착각하지 마. 당신이 내 명령을 어기는 순간, 내 총구는 파수꾼이 아니라 당신 머리를 향할 테니까."
최 과장의 비정한 **선언(宣言)**은 서윤의 울음소리와 섞여 기이한 **불협화음(不協和音)**을 만들어냈다. 세 사람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파국(破局)**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거울의 옥빛은 그들의 일그러진 욕망과 공포를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고, 비도의 깊은 어둠은 분열된 그들을 비웃듯 천천히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 공포(恐怖)의 전염과 부서진 연대(連帶)]
최 과장은 거칠게 젖은 숨을 몰아쉬며 권총을 고쳐 쥐었다. 그의 시선은 강 박사가 아닌, 그의 가슴팍에서 기괴한 옥빛을 갈무리하고 있는 청동거울에 박혀 있었다. 최 과장에게 있어 세상은 언제나 명확한 **인과(因果)**와 물리적 법칙으로 돌아가는 전장이었다. 훈련받은 대로 방아쇠를 당기면 탄환은 적의 심장을 뚫어야 했고, 엄폐물 뒤에 숨으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방금 전 파수꾼의 검 앞에서 비상식적으로 휘어버린 탄환의 궤적은, 그가 지나온 모든 세월 동안 쌓아온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단숨에 **난도질(亂刀質)**했다.
'이건 임무가 아니다. 이건... 저주의 소용돌이다.'
최 과장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그는 남쪽의 사령부에서 이 작전의 브리핑을 받을 때만 해도, 북한의 지하 터널에서 고대 유물을 회수하는 평범한(?) 첩보전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눈에 비친 강 박사는 함께 사선(사선(死線))을 넘는 동료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을 불러들이는 **매개체(媒介體)**일 뿐이었다. 그는 강 박사의 뒷모습을 보며 은밀하게 총구를 만지작거렸다. 만약 저 거울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순간이 온다면, 설령 그것이 국가적 자산이라 할지라도 주저 없이 강 박사의 등에 구멍을 내리라는 비정한 **강박(强迫)**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강 박사, 똑바로 말해. 저놈이 말한 '희생'이라는 게 뭐야? 당신,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냐? 우리를 이 어둠 속에 처넣고 혼자만 살아남으려는 속셈이냐고!"
최 과장의 포효가 비도의 천장을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동료를 향한 신뢰 대신, 막다른 길에 몰린 짐승의 **광기(狂氣)**가 서려 있었다.
서윤은 최 과장의 고함에 몸을 들썩이며 흐느꼈다. 그녀는 이제 강 박사의 옷자락조차 잡기 두려운 듯 멀찍이 떨어져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온 모든 날 동안 탐구해 온 유물들은 언제나 박물관의 유리창 너머에서 정물처럼 박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비도 안의 공기는 살아있는 뱀처럼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그녀에게 고고학은 찬란한 역사의 복원이었으나, 현실은 비릿한 피 냄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대의 **집착(執着)**이 소용돌이치는 지옥도였다.
"박사님은... 우리가 알던 그 박사님이 아니에요. 최 과장님 말이 맞아요. 저 눈을 보세요. 저건 진실을 찾는 학자의 눈이 아니라, 무언가에 홀린 **광신도(狂信徒)**의 눈이라고요!"
서윤의 날 선 비난이 비수의 끝처럼 강 박사를 향해 날아와 꽂혔다. 그녀는 자신의 공포를 정당화하기 위해 강 박사를 '타자화'하기 시작했다. 함께 밤을 새우며 유물 도판을 분석하고, 남쪽의 연구실에서 커피를 나누던 따뜻한 동료의 기억은 이미 지독한 환멸(幻滅) 속에 타버리고 없었다.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을 이 사지로 끌어들인 강 박사에 대한 맹목적인 **원망(怨望)**뿐이었다.
"서윤 씨, 진정해. 우린 아직 살아있어. 저 거울이 길을 열어준 거 보잖아."
강 박사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최 과장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강 박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길을 열어? 아니, 저 거울은 우리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유인하고 있는 거야. 강 박사, 똑똑히 들어. 이제부터 이 대열의 지휘권은 내가 갖는다. 당신이 그 거울을 어떻게 주무르든 상관없지만, 한 번만 더 내 허락 없이 저런 기괴한 짓을 벌였다간 그땐 정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내 부하들을 죽이고 여기까지 온 건, 이런 망상(妄想) 속에서 개죽음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최 과장의 눈에는 이제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거울의 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난 그 힘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강 박사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며 앞장섰다. 하지만 그가 내딛는 발걸음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평생을 '보이는 적'과 싸워온 사내에게, 보이지 않는 역사의 **업보(業報)**와 싸우는 이 여정은 영혼을 갉아먹는 **고문(拷問)**이나 다름없었다.
서윤은 비틀거리며 최 과장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강 박사를 지나쳐 가면서도 결코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그 어떤 고함보다도 잔인한 **절교(絶交)**의 선언이었다. 세 사람의 그림자는 거울의 옥빛에 밀려 기이하게 뒤틀린 채 비도의 안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강 박사는 홀로 남겨진 듯한 고립감 속에서 자신의 손바닥 낙인을 내려다보았다. 동료들의 불신과 증오는 이제 거울의 진동보다 더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파수꾼이 예언한 '희생'은 어쩌면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지나온 모든 세월 동안 소중히 여겼던 인간관계의 파멸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말살(抹殺)**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비도는 이제 그들의 대화마저 집어삼킬 듯 깊은 어둠을 토해내고 있었다. 최 과장의 거친 군화 소리와 서윤의 헐떡이는 숨소리, 그리고 강 박사의 고독한 발소리는 이제 하나의 화음이 되지 못한 채 각자의 **지옥(地獄)**을 향해 흩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한 팀이 아니라, 서로의 목을 언제든 물어뜯을 준비가 된 **고립(孤立)**된 수천(囚囚)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