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기록 no.6 - 불안과 낮잠

by 푸르다

"나 사랑해?"


나란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먼저 침묵을 깬 J의 질문에 미도는 고개만 돌려 얼굴을 마주 보았다. 손을 뻗어 여러 번 탈색해 부스스한 금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자, 쌍꺼풀 없이 가느다랗게 휘어진 눈매와 매일 정성스럽게 다듬고 다니는 가느다란 눈썹이 드러난다.

사람을 볼 땐 눈을 가장 먼저 보게 된다고 했다. 처음으로 J가 미도에게 직접 소리 내 말을 걸었을 때야 비로소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던 눈. 눈을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란 앞머리를 제대로 넘기고 다니지 않아 늘 실루엣만 볼 수 있었던 그 눈을 직접 마주하고 나서, 미도는 J와 연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대답하는 순간, 미도는 문득 J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속으로 의문을 삼키면서 미도는 J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그리듯 찬찬히 더듬어보았다. 사랑하냐고 물을 때마다 미도가 J에게 해주는 애정 표현이었다.

부드럽고 동그란 이마. 이마가 남들에 비해 넓은 편인 것이 콤플렉스라며, J는 늘 앞머리를 내리고 다녔다. 엄지손가락을 눈썹결대로 쓱 훑어내고, 뺨으로 손을 옮기며 눈꼬리를 잡아당기자 J가 불만이 있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J는 볼살이 거의 없어 갸름한 얼굴형을 가졌다. 미도는 볼살이 통통한 자신과 반대인 J의 얼굴형이 좋았다. 적당히 도톰한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니 J가 그제야 코로 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타투는 다음 주에 하러 갈까?"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으로 불어 들어온 강한 바람이 방을 크게 한 바퀴 돌고서 거실로 연결된 문으로 빠져나간다. 조만간 조금 두꺼운 환절기용 이불로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미도는 까슬까슬한 시어서커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었다.


"생각해 보고."


J를 만났던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점점 짧아져 가는, 곧 기상이변으로 인해 아예 사라질 것 같은 그 계절이. 미도는 가을이 좋았다. N의 생일도 가을 단풍이 절정일 무렵이었다.


"여름에는 덧나기 쉬워서 일부러 미룬 거야."


덥고 습한 여름은 타투를 하기에 좋은 계절이 아니다. 사실은 N을 생각하느라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진실이지만, J를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한다. 죄책감이 콕콕 가슴을 찌르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미도는 이를 무시하며 이불속에서 J의 손을 잡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마라탕 시켜 먹을까? 좋아하잖아."


대답 대신 J가 맞잡은 미도의 손에 힘을 꾹 주고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다. 금세 잠에 빠져든 J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고, 미도는 곤히 잠이 든 연인의 모습을 절로 눈이 감길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의외로 고백을 한 것은 J였다. 2년 전 크리스마스이브날. 정아가 거실에 평생의 소원이던 커다란 트리를 설치했으니 괜히 사람들 많은 복잡한 곳에 가지 말고 자신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자고 했다. 정아는 부모님에게 누가 들어도 헉, 소리가 나는 고급 아파트를 선물로 받은, 이른바 있는 집 자식이었다.

'저녁 7시까지 내 집으로 집합!'

문자와 함께 주소가 도착했을 때는 정말 만화적 표현처럼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평소 생활 스타일은 상당히 소탈해도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귀티는 숨겨지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괜한 자격지심에 자신의 구형 그랜저를 끌고 가기에 창피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을까-하는 마음이 샘솟았지만, 놀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한 버스에 끼어 있는 것보다 노래를 들으며 정체된 도로에 갇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차를 끌고 가는 것을 택했다.

출발하기 전, 정아의 집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며 동과 호수를 소리 내 중얼거리면서 외웠다. 방문객 등록을 할 때 버벅거리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값비싼 신형 차가 가득할 것이 분명한 주차장으로 입성할 때, 적어도 어리숙한 가난뱅이처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차를 끌고 가기로 결심한 미도의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의 마지노선이었다.


"사랑해."


정자세로 죽은 듯이 잠든 J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도는 두 사람의 '사랑한다'는 말의 역사를 회상하고 있다. 단 한 번도, 미도는 J가 깨어있을 때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가 미도에게는 너무 크게 다가왔기에, 쉽게 이 말을 해도 되는지 늘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 말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그래서 늘 담백하게 '나도'하고 대답하는 미도에게 J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운한 티를 폴폴 내곤 했지만, 이제는 대답 대신 두 사람 사이의 관례가 된 애정 표현으로 어느 정도 납득한 것 같았다.

고백을 받은 그날도 J는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미도는 그것이 참 신기했다.

정아의 집에 도착하자 거실 한구석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누워있던 J가 가장 먼저 미도를 맞이해 주었다.

백화점이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아주 고급스러운 오너먼트로 가득 채워진 커다란 트리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비싼, 밀도가 높은 나무는 전구만 둘러놓았어도 충분히 예쁠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장식용 벽난로가 있고, 예쁜 포장지와 리본으로 한껏 꾸며진 선물 상자가 가득 놓여있었다.

이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미도에게 J가 구수한 사투리로 '일로 와서 앉아라.' 하고 말을 건넸다. 그제야 미도는 자신이 선물로 백화점에서 고르고 고른 값비싼 와인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고 J의 옆에 가서 앉았다.

은은한 노란빛을 내뿜는 스탠드와 크리스마스트리에 두른 전구의 빛만으로도 미도는 충분히 취한 것 같았다. 정아는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J는 '손님은 일하는 거 아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채 뒹굴뒹굴했다. 이 공간이 굉장히 익숙한 모양새였다.

두 사람, 사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미도는 이제 이야깃거리를 찾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늘 정아가 쉴 새 없이 두 사람 사이에서 말을 쏟아냈기에, 미도는 정아 없이 단둘이 J와 덩그러니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고민만 하다가 도무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아 괜히 연락이 온 척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J도 저 멀리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가져와 똑바로 누운 뒤, 웹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문득 J의 금발이 반짝이는 것이 미도의 시선을 잡아끌었고, 미도는 남몰래 J를 흘끗거리며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휴대폰에 가려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시선을 천천히 목을 따라 아래로 옮겼다.

얇은 목선, 도드라진 쇄골. 말랐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깡마른 체형인 것 같았다. 이크, 시선을 눈치챌까-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이동시킨 후 한동안 그대로 정지. 안심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몰래 시선을 옮긴다.

이윽고 미도는 J의 남색 파자마 상의의 제일 위에 있는 단추가 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와, 위험했어.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 간접조명에 취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연애할래?'

놀란 티를 숨기려고 괜히 정아를 기다리는 척 부엌으로 고개를 돌린 미도의 귀에 J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꽂혔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발견한 걸까. 내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온갖 생각이 휘몰아친다. 정말로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술이라도 마셨으면 얼굴이 붉어진 것에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아도 될 텐데.

'미도. 우리 연애할래?'

사람의 이름은 참 신기한 꼬리표이다. 아무리 작게 말해도, 아무리 멀리 있어도, 자신의 이름이라는 음파는 절대로 그냥 귀를 지나쳐가는 법이 없다. 절로 미도의 고개가 J를 향해 돌아가고, 휴대폰을 제 배 위에 올려놓은 J가 아주 태연하지만,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두 번째 단추가 풀어져 있는 것도.







수험생이라는 꼬리표가 주는 공부 버프가 끝났다. 2월로 접어들자 나는 공부에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11월까지 버티지? 영원히 수능을 보는 그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고요한 야자실에는 점점 이탈자가 늘어가고 있었다.

인간사 다 똑같구만. 다들 공부에 대한 의욕이 불타올라서 종이를 거칠게 넘기는 소리, 졸다가 다리를 쿵 하고 바닥에 구르는 소리, 책상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등등 온갖 소리에 예민하게 굴더니 이젠 담요를 덮고 드러누워 자기에 바쁘다. 그들이 바라던 고요함은 뜻하지 않은 형태로 찾아왔다.

나는 잠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딱히 꾸벅꾸벅 졸거나 엎드려 자지는 않았지만, 겨울 햇살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나른한 오후의 분위기 속에서 집중을 하지 못해 결국 팬을 잡고 연습장에 멍하니 낙서를 끄적거리는 시간이 늘어갔다. 한두 번은 넘어가 주던 선생님께서도 교사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결국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고, 따끔하게 한 소리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집중이 안 될 때는 MP3로 노래를 들으며 수학 문제 풀기를 택했다. 2, 3점짜리 문제 정도는 큰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 미도, 요새 무슨 일 있어? ]


그날 이후로 주말에 게임은 의무적으로 접속하고 있지만, 나답지 않게 말수가 제법 줄었다. 딱히 대화에 끼이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내가 느끼는 이 질투를 주체할 수가 없었기에 그저 침묵하기를 택했다.

일부러 다른 길드원과 개인 메시지로 대화를 더 많이 했다. 제법 친밀한 유대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서로 조심조심 말을 꺼내는, 딱 그 정도의 관계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렇다고 N과 대화를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투정을 최대한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예의주시하는 그 길드원이 접속하면, 나는 공부를 핑계로 잠수를 타거나 게임을 껐다.


[ 그냥 공부가 너무 싫어~ ]


나는 N의 문자에는 수업 시간이 아닌 이상 답장을 하는 데 5분을 넘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1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답을 보낸다. 유치한 질투의 표시였다.


[ 그런 것 치고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답이 늦잖아! ]

[ 우우우. 선생님한테 혼나서 그래. ]


N이 내가 답을 보내는 간격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불길이 꺼져버린 줄 알았던 마음에 괜히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른다.


[ 오늘은 언제 퇴근해? ]


우리는 학교를 가는 것을 출근,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는 것을 퇴근이라고 불렀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는 시각은 10시. 내가 신청한 특별 야자실에서 공부를 하면 밤 12시. 1월 중순까지는 자정까지 꼬박꼬박 공부했는데 말이지. 요새는 나태해져서 슬쩍 10시에 집에 오고 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집에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마지막 양심으로 차마 게임은 접속하지 못하고 길드 카페에 올라온 새로운 글을 훑어보는 것이 다였지만, 내가 없는 시간에 생겨난 N의 소식에 나는 온 신경이 바짝 서 있었다.


[ 12시. 요새 너무 자습을 많이 째서 양심통이...! ]


퇴근 시간을 묻는 N의 질문에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10시에 집에 가버리고 싶었지만, 불퉁한 마음이 일부러 반대의 대답을 하게 했다.


[ 오케이. 기대하고 있으라구. ]


무엇을 기대하라는 걸까. 그 말 한마디에 내 마음에 폭풍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상처받기 싫어서 일부러 마음에 바리케이드를 켜켜이 쌓아두었는데, 또 속절없이 N의 말 한마디에 내가 견고히 쌓아온 바리케이드가 태풍에 무너져 날아간다.

N과 알고 지내는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것을 진정시키려 일부러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고 눈을 꾹 감았다. 선생님도 엎드리고 있는 나를 보고 그냥 지나쳐 주실 것이라 믿으며. 거의 잠을 안 자는 애가 도대체 웬일이지‒ 하면서 말이다. 나를 뒤흔드는 이 태풍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담요라는 동굴 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 ㅇㅋ! ]


나는 N을 좋아하는 걸까. 사랑하는 걸까. 사모하는 걸까. 연모하는 걸까. 문학을 공부하며 배운 감정 단어들을 늘여놓으며 내 안에 소용돌이치는 이 감정을 정의하려 노력해 보지만 나는 도무지 그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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