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야, 이거 너무 귀엽다! 나는 연보라색 할래. 미도는? ]
[ 그럼 나는 연노랑 할래. 잘 어울리지 않아? ]
[ 좋아, 좋아. 염색하고 스샷 찍자! 광장에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
크리스마스를 겨냥해 새로 출시된 귀여운 겨울 코트를 세트로 맞춰 입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광장으로 향했다. 물론 게임에서! 이런 멋들어진 커다란 트리 아래에서 실제로 N을 만난다면 좋았겠지만, 나의 지갑 사정과 수험생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차마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대신 게임에서라도 만나는 게 어디야. 그렇게 속을 달래며 마우스를 딸각거려 내 캐릭터를 N의 캐릭터와 나란히 서도록 조정했다.
[ 아, *남캐옷은 역시 뭔가 심심해. ] *남자 캐릭터의 옷
여성용 캐릭터 옷은 귀여운 토끼 가방을 메고 있지만, 남성용 캐릭터 옷은 가까이 확대해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토끼 로고가 가슴팍에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 게임은 항상 남성용 캐릭터 옷에 대한 디자인에는 큰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불만 중 하나였다.
[ 그래도 이렇게 나란히 있으니까 잘 어울리는데? ]
N은 애써 나를 위로하는 말을 건네며 캐릭터가 좀 더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도록 이리저리 캐릭터를 움직거리며 자리를 조정했다.
[ 귀여운 모션 아무거나 해봐. 조정은 내가 알아서 할게. ]
평소 게임 내에서 스크린샷을 찍으면 N이 항상 예쁘게 편집한 후 네이버에 개설되어 있는 길드 카페에 올리곤 했다. 내가 오기 전, 몇 시간 동안 N을 독차지하던 사람들에게 커플 스샷으로 한 방 먹일 생각을 하니 웃음이 입가에 비죽비죽 삐져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우연이라고 굉장히 믿고 싶지만, 오늘 N에게 새로 나온 2인용 던전을 가자고 조른 길드원 중 한 명이 최근에 길드 카페에 N과 찍은 스샷을 노골적으로 많이 올렸고, 그 때문에 심기가 많이 불편했었다. 그나마 N이 직접 게시한 글이 없었다는 게 작은 위안이었다.
[ 신난다~ 나는 그럼 그동안 던전 공부 좀 하고 있을게. 나랑도 가! ]
[ 오야~! ]
길드 카페를 조금만 뒤져보면 N이 올린 팬아트를 몇 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 길드원들의 캐릭터를 가볍게 낙서형식으로 그린 것들이 많았고, 정성이 좀 들어간 일러스트 형식의 그림은 딱 두 개. 본인의 캐릭터와 내 캐릭터였다.
게임 내에는 현실처럼 결혼 시스템이 존재했고, 결혼을 하면 캐릭터명 앞에 '○○○의 아내' '○○○의 남편' 같은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아무런 기능도 없는 타이틀이 그다지 탐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N은 ‘미혼’ 상태로 게임을 플레이해왔다.
하지만 어느 날, 배우자에게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자 N이 먼저 결혼하자고 메시지를 우다다 보냈었다. 그때는 나도 매일 게임에 접속해서 N과 함께 노는 시간이 많았기도 했고, '결혼한' 타이틀을 달면 N을 독차지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 그런 제안을 했을 당시에 N은 순간이동 기능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만이 새까만 속내를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담배 케이스 예쁘네."
케이크를 다 먹고 난 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던 도중, J가 주머니에서 소지품을 주섬주섬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화장실에 가겠다는 뜻이었다. 라이터, 담배 케이스, 휴대폰. J는 평소 짐을 많이 들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주머니가 커다란 재킷을 걸치고 다녔다.
"응, 선물 받았다."
물론 담배 케이스를 선물한 것은 미도였지만, 모르는 척 질문을 한다. 약 이주 전, 연보라색 파우치에 담아서 건네주었던 광택이 나는 검은색 슬림형 담배 케이스였다. 매끈한 표면에는 J가 좋아하는 밴드에서 공식적으로 판매했던 스티커가 멋들어지게 붙여져 있다. 선물을 주었을 당시에 제법 심통이 났었던 모양인지 이주일 지나서야 잘 쓰고 있다는 티를 낸다. 하여튼, 귀여워. 실실거리며 미도는 누가 선물해 줬는지 몰라도 센스가 좋아‑ 하고 중얼거렸다.
"너희들 그런 대화 내 앞에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정아는 공기 같은 존재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J는 화장실에 들어갔고 미도는 케이크를 한 조각 더 먹을까 고민하며 정아를 달랬다.
"신경도 안 쓰시겠다."
불퉁한 소리를 내며 정아가 팔짱을 끼었다.
"공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잖아."
서운해하지 마. 거짓으로 우는 소리를 내며 미도가 팔을 뻗어 정아를 잡으려는 듯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나저나 J한테 요새 신경 좀 써줘. 나한테 하소연하던데."
왼손을 뺨에 대고 한껏 목소리를 낮춰 정아가 미도에게 조곤조곤 말한다. 그 말에 미도는 손에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올 것이 왔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뭔 얘기를 하길래 둘 다 표정이 그러나."
"네 험담 했어. 담배나 피우러 나가."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집어 J에게 건네며 정아가 훠이 훠이, 축객을 쫓아내듯 손짓을 한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J는 미도의 옆자리에 앉았다. 정아의 손에서 제 물건을 뺏어오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도가 자신에게 소홀해진다 싶으면 정아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에 가서 술을 마시는 게 J의 버릇 중 하나였다. 꼭 정아가 아르바이트하는 날에 가서 아무 말 없이 연달아 술잔을 비워내고는 울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것이 J가 하소연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면 정아는 미도에게 현재 너의 애인이 상태가 좋지 않다, 하고 일러주는 수밖에 없었고, 정아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낼 정도면 풀어내야 할 감정의 실타래가 상당히 많이 얽혔다는 뜻이었다.
감정의 동요를 겉으로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 J의 매력이었고, 약 2년 간의 연애기간 동안 미도 또한 그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미도는 '왜 하필, 지금?' 이런 생각이 먼저 떠오르면서 이 상황이 약간 성가시게 느껴졌다.
잠깐, 성가시다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라 미도는 저도 모르게 도리질을 했다. J의 휴대폰을 등 뒤에 숨기고 주느니 마느니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정아가 '왜 그래?'하고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그나저나 나 오늘 약속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해. 둘이 점심 챙겨 먹어."
약속 없으면서.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넣고 거의 텅 빈 냉장고에 가져다 넣는 정아를 보며 미도는 '이제 어떻게 하지' 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담배 케이스를 드디어 사용하는 거로 보아 그래도 아주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겠지? 야속하게 집을 떠나는 정아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배웅을 하고 미도는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J를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점심 뭐 먹고 싶어?"
침묵을 깬 것은 미도였다. 정아 한 명이 사라졌다고 이렇게 공기의 흐름이 꽉 막혀버릴 수가 있나. 아니, 그럴 수 있다. 정아는 이제껏 미도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분위기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있는 공간에 어색함 따위는 끼어들 곳이 없었다.
처음 정아를 만난 곳은 취미로 등록한 소묘 기초반이었다. 그때 미도는 어떤 종류가 되었든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우연히 집 근처에 있는 평생교육센터에서 소묘 기초반이 열린다는 공고를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아침 일찍 줄을 서 수업에 등록했다.
선착순 경쟁이 치열하다는 소식에 아예 밤을 꼴딱 지새우고 접수 시간보다 3시간 일찍 가서 세 번째로 등록을 마쳤었다. 그래서였는지 그날에는 정아를 미처 보지 못했다. 그저 나이 지긋한 중년 여성들 사이에 젊은이가 하나 끼여버렸네. 그따위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와 쓰러져 저녁까지 잠을 잤다.
"배 안 고픈데..."
말꼬리를 흐리며 J가 미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곁눈질하지 말고 사람을 똑디 봐라, 그렇게 덧붙이면서.
"그럼 난 케이크나 좀 더 먹을까."
시선이 마주치자 미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삐걱삐걱 고장 난 로봇처럼 부엌으로 걸어가 부자연스럽게 냉장고를 열고 케이크를 꺼낸다.
"그만 좀 피해 다니라."
J가 한숨을 쉬며 뒤에서 미도를 끌어안았다. J와 미도의 키 차이는 5센티. 시선의 높이가 그리 차이 나지 않아 조금만 고개를 들어 입술을 부딪치기 좋은 키 차이. 과거 N과 나란히 섰을 때를 상기시키는 이 5센티의 키 차이는 J에게 매력을 느끼는 점 중 하나였다.
"낮잠이라도 좀 잘까?"
그런데 J를 성가시다고 생각하다니. 미도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왜 갑자기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온 J의 면모 중 하나를 성가시다고 느꼈는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갔을 때 미리 양치했는지 미도의 뒤통수에 닿는 J의 숨결에서 민트향이 느껴진다.
미도는 J가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소묘 수업에서 또래라는 단순한 이유로 정아와 급속도로 친해진 이후 J를 소개받았는데, 첫날 미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아에게만 입을 가리고 소곤소곤 말을 전달하는 식으로 대화를 하기에 미도는 J가 자신을 아주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굉장히 과묵한 줄 알았더니 어느 순간을 계기로 말문이 트인 후 생각보다 시시콜콜 잡담을 잘 늘어놓았고, 완전한 도시 사람처럼 보이는데 억센 사투리를 사용해서 놀랐다. 처음 사투리를 들은 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미도에게 정아가 경상도에 있는 어느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시골 출신이라고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나도 양치하고 올게. 가서 누워 있어."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미도는 J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거린 후 J가 침실로 들어가고, 미도는 그런 J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제 손에 들려있던 케이크 상자를 도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문득 괴리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최근에 N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요즘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보면 깊은 무의식 속에서 미도는 자신이 N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그리워해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티가 난 거겠지.
칫솔 위에 치약을 길게 짜고서 미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응시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눈빛이 사납게 타오르다 온화해지고, 거센 폭풍처럼 몰아치다 부드러워지는것을 바라보며 미도는 J에게 온전히 집중하려 애썼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주 작게 사랑한다는 말을 연습하듯 내뱉고, 미도는 칫솔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 낙서! 확인 요망! ]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찍은 스샷이 길드 카페에 올라가자, 한동안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길드원은 더는 어떤 글도 올리지 않았다. 승리감에 도취하여 N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부족한 주중이었음에도 공부가 잘되는 것 같았다. 그날도 자정까지 열심히 머릿속에 온갖 지식을 쑤셔 넣었다는 뿌듯함에 종종걸음으로 집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N에게서 온 문자를 보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가방만 방바닥에 내팽개친 채 컴퓨터를 켰다. 길드 카페에 들어가자 30분 전에 N이 올린 게시글이 가장 윗줄에 "NEW"라는 단어와 함께 걸려있었다. 제일 첫 그림은 N과 내 캐릭터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찍었던 스크린샷을 N의 스타일대로 그린 스케치였다. 선도 다듬고 채색도 해야 하는 스케치일 뿐이었지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은 후 스크롤을 내리며 N이 그린 낙서를 즐겁게 감상했다. 일주일간 어떤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 수 있는 귀여운 낙서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기분이 착 가라앉다 못해 심해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면서 너무 우울해졌다.
[ 아직 못 봤어? ]
문자가 도착했다. 대답을 하지 말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답장을 적었다.
[ 이제 집에 도착해서 씻고 볼게! ]
나만이 가질 수 있었던, 아니 나만이 가질 수 있다고 착각했던 N의 캐릭터가 내 신경을 쿡쿡 찔러대던 길드원의 캐릭터와 다정하게 볼을 맞대고 있었다. 아니, 그런 그림이었다. '선착 리퀘스트'라고 짤막하게 쓰인 글이 이것이 N의 발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짜증 나.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격정적인 분노가 압축되어 입 밖으로 절로 터져 나왔다.
[ 17171771 ㅋㅋ! ]
N에게서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지만 기분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주말까지 아직 이틀이 남았다. 기분 더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