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미러를 확인하며 핸들을 꺾어 차선 변경을 시도한 미도는 무사히 끼어들기에 성공하자 오른쪽 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흘끔 쳐다보았다. 청명한 하늘과 햇빛에 반짝이는 한강을 보며 강변대로를 달리는 이 상쾌함이 퍽 마음에 들었다. 어른이 되어서, 그러니까 주민등록증이 효력을 발휘하는 갓 20살짜리 어른이 아닌, 경제력을 갖춘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은 버스나 지하철만이 유일한 이동 수단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날씨 진짜 좋다."
미도는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도로가 꽉 막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렸다.
"신나는 노래 좀 틀어봐. 왜 이렇게 감수성이 충만해?"
"내 선곡에 불만 있나?"
옆자리에 앉은 J가 '담배 피워도 돼?' 하고 물으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안된다고 단호히 거절하며 미도는 신나는 밴드 음악이나 틀어달라고 요구했다. 까다롭기는. 툴툴거리면서도 J가 방금 전까지 틀었던 클래식 음악과는 정 반대되는 시끄러운 노래를 재생시킨다.
"오, 모네스킨 (Måneskin) 이잖아!"
슬슬 정체가 시작된다. 그래도 신나는 노래가 있으니 마냥 지겹지만은 않다.
"나 타투하고 싶은데, 우예 생각하노?"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던 J가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는 미도에게 툭 던지듯 말을 건넸다. 네가 경험자잖아. 그렇게 덧붙이며 J가 선바이저를 다시 위로 올렸다.
"어디에 하고 싶은데?"
"목덜미에. 여짜, 흉 진데."
고개를 들어 J가 자신의 흉터를 가리켰다. 마침 차가 잠시 멈춰 선 터라 미도는 고개를 돌려 J가 가리킨 흉터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턱 밑에 3센티미터 정도의 길쭉한 상흔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실 미도도 몇 번이고 보아 잘 알고 있는 흉터였다.
"나 타투하고 싶어! “
그 말에 N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잠시 세상이 멈춘 것처럼 미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술만 벙긋거려 '어디?'하고 물었다.
"기왕이면 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자신의 왼팔 내밀어 안쪽의 말랑말랑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눌러 보였다. 신이 난 나를 바라보는 N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고, 이를 숨기듯 눈썹을 들어 음- 하는 소리를 내며 N이 신중히 말을 고른다.
N은 아무래도 타투에 조금 부정적인 것 같았다. 잠시간의 정적 끝에 N은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타투를 말리는 모든 사람들이 1순위로 내놓는 진부한 답을 내놓았다.
아, 조금 실망. 그래도 N이니까 괜찮아.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슬그머니 '그런가?' 하고 수긍하는 척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음, 새기고 싶은 게 있어?"
내 기분을 살피며 N이 황급히 덧붙였다. 눈을 또르륵 굴리며 과연 이 질문에 대답을 해도 될지 잠시 고민했다. 나한테 실망하면 어쩌지. 으음, 하고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어본다.
"하고 싶은 건 해야지. 그건 본인의 자유니까."
그렇지만 나는 N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사랑은 지는 게임이라고 했다. 아직 생각해 둔 것은 없다고, 그저 충동적으로 말해본 것뿐이라고 둘러대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사실을 말하지 못한 입이 텁텁했다.
"좋지. 거기에다가 호랑이라도 그려보는 게 어때?"
"무신, 이딴 데다 호랑이고. 도랏나."
미도는 꺄르르 웃으며 핸들을 꺾었다. 오른쪽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셔츠 자락이 흘러내린다. 어깻죽지를 따라 아래로 10센티 정도 늘어진 덩굴이 드러난다. 살짝 번져있는 잉크가 타투를 새긴 지 시간이 꽤 흘렀음을 알게 한다.
"니나 등에 용 문신 새기라."
J가 손을 휘휘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도안이라도 있어?"
앞에서 사고라도 난 건가. 이렇게까지 정체될 시간은 아닌데 차들이 모두 거북이처럼 기어가기 시작한다. 길게 하품하며 J가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휙휙 넘긴다.
"일단 이런 거."
귀여운 자그마한 고래. 미니 드림캐처. 만개한 장미꽃. 종이비행기. 초승달.
"후보군이 너무 많은데?"
브레이크를 가볍게 밟았다 뗐다 하며 미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이 아프나?"
"거긴 살이 얇으니까 좀 아플 수는 있지? 그래도 참을만해."
"니는 마조 아이가. 내는 여려서 아픈 건 잘 못 참는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미도는 콧방귀를 뀌며 J의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전방을 주시했다. 아, 차종이나 구경할까나.
이렇게 차량이 정체될 때면 미도는 도로 위에 어떤 차가 있는지 구경하곤 했다. 답답한 교통정체가 나만의 자동차 박람회가 되는 마법.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그랜저도 그럭저럭 괜찮지만, 역시 적어도 SUV 정도는 끌고 다니고 싶다.
음, 캐스퍼. 귀엽네. 하지만 작아, 탈락. 역시 차는 좀 커야 제맛이지. 오, 신형 산타페. 화이트가 역시 제일 나은 것 같은데. 까만색은 영...앗, 지바겐이다!
"역시 고래가 낫나."
"응, 그래."
"성의를 좀 담아봐라, 성의!"
N은 큰 차가 좋다고 했다. 도로 위에서 느껴지는 위압감, 압도적 존재감. 지프가 좋다고 했던 것 같다. 미도는 자신도 그 영향을 받은 게 아닐지 무심결에 생각하면서 제 옆에서 나란히 기어가는 지바겐을 곁눈질로 훑었다. 역시 저 커다란 바퀴와 각진 디자인은 언제 봐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보는 것으로는 역시 부족하다. 실물이 최고지.
"샵 추천 좀 해도."
고래로 결정했다. 미도에게 J가 화면을 들이댄다.
"같이 갈까? 나도 새로 하나 하고 싶은 게 생겨서."
정체가 슬슬 풀리기 시작한다. 미도는 아주 가볍게 액셀을 밟았다.
"그럼 니가 알아서 예약하고 알려도."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로 자기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J가 말했다.
"예약 시간은 내 맘대로 해?"
"어. 니 시간 맞추면 된다."
그렇다면 평일에 가야겠다. 속으로 혼자 생각하며 미도는 자신을 앞질러 가는 지바겐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지금 N은 어떤 차를 가지고 있을까.
블로그를 전부 뒤져봤지만 거의 아들 사진뿐이었다. 아들이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사진, 아장아장 걸어가다 넘어져 우는 사진, 미키마우스 풍선을 받고 해맑게 웃는 사진, 목욕 중 물을 첨벙첨벙 튀기는 사진, 장난감을 든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진, 입에 귤을 문 채 까무룩 세상모르고 잠든 사진 등등.
그 모든 사진에서 N의 현재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사진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N의 신체 일부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변 사물처럼 부분 부분 찍혀있는 것을 통해 그녀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을 뿐.
쭉 뻗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골목으로 굽이 들어간다. 정말 운전해서 들어가기 힘든 곳에 산다니까. 오르막길은 가히 살인적으로 가파르다. 이러니까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집에 데려다주는 수밖에 없다.
쪼그만 차들은 올라오지도 못하겠네.
한 번은 J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아니, 분명 이사할 만한 여유가 있는데 이런 달동네에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뭐고?"
"택시비는 내고 가야지?"
겁 없이 차를 두고 J의 집에 처음으로 방문한 미도는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한참을 누워 있었다. 그때 J는 그런 미도를 두고 담배를 피우러 옥상에 다녀오겠다며 쌩하니 나가버렸다.
"담배 아직 안 피웠잖아."
"... 노골적으로 구네. 완일이고."
미도는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를 당겨 자신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전벨트를 푼 J가 미도에게 몸을 숙였다. 익숙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을 맞춰온다. 미도는 언제나 이 순간이 좋았다. 아직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이의 간지러운 입맞춤도 좋지만, 서로에게 익숙해져 노련하게 입술을 부딪치고 자연스레 서로의 호흡을 교환하는 진득하고 농후한 키스가 좋았다. 그러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본능이 이끄는 대로 손이 움직이고, 몸이 간질거리고, 익숙하게 손길을 받아들이는, 그런 스킨십이 좋았다.
"이럴 거면 자고 가던가."
"새벽에 집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 말에 J는 별다른 질문을 얹지 않고 수긍했다. 속으로는 짜증이 잔뜩 나 있을 거면서 표정이나 목소리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하지만 그런 점이 J의 매력이었다. 들끓는 속내를 겉으로 티 내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는 점이.
"담배 너무 피우지 말고, 저녁 챙겨 먹는 거 잊지 마."
가끔 담배로 끼니를 대신해 버리는 J에게 미도는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 J는 대꾸도 하지 않고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린다. 쾅, 하고 닫히는 문에 감정이 잔뜩 실려있다.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저녁도 함께 먹지 않는 미도에게.
"이거 가져가."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미도가 크게 소리치자, 집으로 향하던 J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기 뭐꼬."
길죽한 호를 그리며 날아온 작은 연보라색 민무늬 파우치를 낚아챈 J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선물. 집에 가서 열어봐."
흠. 콧방귀를 뀌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좀 풀린 모양이다.
미도는 빙그레 웃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J의 뒷모습을 확인한 뒤 차를 출발시켰다. 저럴 때마다 귀엽다니까.
가파른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가며 미도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47분. 다행히 늦지는 않겠네. 이제 퇴근 시간이라 길이 굉장히 막힐 테니 집에 돌아가면 8시쯤 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에 합류한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추자마자 미도는 제 핸드폰에 저장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한 곡 한 곡 정성스레 고르고 골라 만든 10곡짜리 플레이리스트였다.
모네스킨(Måneskin)의 'I wanna be your slave'를 들으며 미도는 N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J를 생각했다.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린다.
"노래 듣기 좋은 시간이네."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차량 정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