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기록 no.2 - 불안과 학생증

by 푸르다

N과의 첫 만남은 지극히 나의 욕심이었다. 사적으로 대면할 생각이 거의 없어 보이는 N에게 철없는 나는 내가 직접 당신이 사는 곳까지 가겠노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렇다고 마냥 생떼를 부린 것은 아니었다. 나의 성격을 고려해 보자면 어린아이처럼 떼를 쓴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N은 한 달을 고민하다 결국 나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와, 정말? 속으로 환호했지만 그래도 짐짓 태연한 척 '좋아요!' 정도로 답을 마무리했다.


키가 좀 큰 편이야. 172.

이번에 머리 잘랐어, 숏컷으로. ooo처럼.

피부가 까무잡잡한 게 콤플렉스야.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아, 쌍꺼풀이 없어? 나랑 바꾸자. 난 눈매가 너무 진해서 싫어. 동남아 사람으로 오해받은 적이 많아.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통해 내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당신의 모습을, 그 실체를 드디어 확인할 수 있다니! 약속 날짜와 시각을 정하고, 기차표를 예매한 그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들락 하면 심장이 쿵쿵 뛰며 나를 깨웠고, 그때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내가 결제한 기차표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니까, 표 예매가 잘 되었다는 확인 문구와 기차의 출발지, 도착지, 출발시간, 좌석번호가 정갈하게 적힌 그 문자가 잘 저장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기차표라는 실체가 손에 쥐어졌다면, 아마 그것을 지갑 한쪽에 넣어두고 절대로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맞아, 그런 습관이 있었지.

미도는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불 꺼진 LED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LED등의 열기가 방을 한층 더 후끈 달아오르게 한다는 것을 발견한 후로 안 그래도 잘 켜지 않던 전등을 더 켜지 않게 되었다. 동향의 집인지라 오후가 되면 큰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기에 블라인드도 설치해 두었다. 그래서 블라인드가 미처 가리지 못한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직사광선만이 현재 미도가 있는 방의 유일한 빛이다.

아, 컴퓨터 화면도 광원이지. 미도는 본인의 생각을 수정하며 왼손을 무의식적으로 바지의 왼쪽 주머니가 위치한 곳으로 옮겼다.

하하. 진짜 안 고쳐지는구나.

잠옷 바지에 주머니 따위는 없다. 하지만 미도는 왼쪽 주머니에서 큼직한 네모 모양의 딱딱한 플라스틱 명찰을 느낄 수 있었다.

중학생이 된 첫날, 미도는 주민등록번호가 뒷자리까지 인쇄된 명찰을 받았을 때 1차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3년 내내 목에 걸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2차 충격을 받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민등록번호는 절대로 남에게 함부로 알려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미도는 3년 내내 명찰에 작은 종이를 끼워 그 숫자를 가리고 다녔고, 혹여나 나쁜 마음을 품은 누군가가 훔쳐보고 악용할까, 두려운 나머지 하교 이후에는 왼 주머니에 명찰을 꼭 넣어 다녔다. 지나친 강박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날 떠난 걸까.








직접 마주한 N은 상상한 것보다 더 멋있는 사람이었다. 숏컷에 까무잡잡한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 잘 생겼고, 보이시한 옷차림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쑥스러워 제대로 말도 못 꺼내는 나에게 점심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아무거나 좋다는 다소 성의 없는 나의 대답에 그러면 자신이 좋아하는 라멘 가게로 가자고 했다.

나란히 걸으며 N을 살짝 올려다보는 것이 좋았다. 4센티미터의 키 차이가 상당히 좋은 느낌을 주는구나. 속으로만 생각하며 끊임없이 나에게 스몰토크를 시도하는 N에게 최선을 다해 성의를 담은 답을 내놓으려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병아리처럼 당신을 따라다녔다. 아, 정말 간지러운 순간이었다.


"미도, 단 게 먹고 싶어? 아니면 좀 쓴 것도 괜찮아?"


카페에서 선뜻 메뉴를 고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N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사실 그때의 나는 18살이었고, 당시에 카페는 어른들만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을 때여서, 나는 카페에서 파는 음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커피라고는 자판기에서 500원짜리 동전만 넣으면 쉽게 뽑을 수 있는 레쓰비나 조지아가 다였다.


"단 거…?"

"평소에 학교에서 자판기 커피 많이 마셨을 테니까. 음, 그럼 카푸치노로 마셔볼래?"


시나몬 가루가 뿌려져 있어. 뒤이어 덧붙여진 말이 나에게 큰 혼란을 가져왔지만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무지렁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N은 뭘 시켰더라?

처음 맛본 카푸치노는 달콤했고 —당연하다. 시럽을 듬뿍 넣었으니까— 계피향이 기분 좋게 코끝을 간질였던 기억이 난다. 계피를 시나몬이라 하는구나. 그렇게 지식을 하나 습득하며 카푸치노를 홀짝였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N이 무엇을 시켰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메리카노를 시켰던 것 같기도 하고. 카페라테를 시켰던가? 아니면, 홍차를 시켰던가…



그래도 선명히 기억나는 것은 있다. 음료가 나오고 대화거리가 떨어져 갈 때쯤, N은 구름처럼 보이는 제법 커다란 자신의 숄더백에서 표지가 약간 구겨져 사용감이 역력한 연습장과 10개 정도의 색연필이 들어있는 필통을 꺼냈다. 그리고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이건 이번에 새로 만든 캐릭터야."

"오, 예쁘다. 잘 생겼어."


너무나도 원시적인 감탄사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이기도 했다. N은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흘리며 파란색 색연필로 머리카락을 세세히 묘사하기 시작했다. 졸려 보이는 눈, 사선으로 내려간 눈썹, 참으려 했지만 결국 입술을 벌리고 빠져나오는 하품, 부스스하게 여기저기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칼. 입가에 점을 그려 넣은 후, 몸은 상반신만 대충 그려 넣는다.


"전에 야작 하느라 졸리다고 했던 날 기억해?"


나는 이제 밑그림에 색깔을 채워 넣는 N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날 도저히 집중이 만들어 봤어. '잠'의 신이야."


파란색 머리카락이 일렁거린다. N의 손길에 따라 색이 채워져 갈수록 신의 모습은 점점 구체화되어갔다.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현혹해 졸음을 전염시키고, 모든 사람을 재워버릴 것 같은 '잠'의 신이 하얀 연습장 위에 현신한다.


"왜 신은 항상 아름답게 표현될까?"


어느 매체를 보더라도 초월적 존재들은 아름답게 묘사된다. 아름답다는 말은 즉, 인간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형상이거나 감히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형태를 가져 경탄을 불러일으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어느 인간도 실제로 마주한 적 없는 저 신성한 존재를 감히 인간의 사고를 통해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인간들은 신을 기본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한다.


"글쎄, 내가 만든 창작물을 아름다워 보이게 만들고 싶은 건 기본적인 욕구가 아닐까?"


나는 늘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은 신에게 오롯이 귀속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지금 아름다운 신에게 걸맞은 옷을 그려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당신을 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잠의 신'이라는 설정을 부여받아 세상에 현현된 이것을 신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걸까.


"자, 어때?"

"진짜 멋져. 최고야!"


꾸밀 줄 모르는 나의 짧은 답에도 N은 만족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습장을 조심스레 뜯었다. 그리고 가방 속에서 투명한 파일 폴더를 꺼내 그 안에 그림을 넣었다.


"선물."







그때 받은 그림은 여전히 미도의 방에 장식되어 있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이제껏 받은 그림과 전시회를 보러 갈 때마다 구매한 엽서들과, 좋아하는 가수의 미니 포스터와, 좋아하는 글귀를 적은 캘리그래피가 언뜻 마구잡이로 붙어있는 것처럼 보여도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벽 전체에 자리하고 있다.







그날의 만남 이후, 나에게 N은 중학교 명찰과 같은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다. 카페에서 음료를 다 마신 이후, N의 학창 시절의 기억이 깃든 장소들 —N이 자주 들르던 문구점, 만화책방, 오락실, 분식점, 디저트 가게—을 차례대로 방문하며, N은 추억에 젖어들었고 나는 N에게 더욱더 깊이 빠져들었다.

마음속에서 N에 대한 감상을 입체적으로 만들어가며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과 희열을 느꼈다. 이따금 너무 신이 나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주체할 수 없을 때면, 나는 재채기를 하려는 척 입을 손으로 가렸다.


"조심해서 가."


우리는 저녁으로 맥주를 곁들여 텐동을 먹었다. 주민등록증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고 굉장히 죄송하다는 제스처와 함께 곤란한 표정을 짓자, N의 주민등록증을 확인한 종업원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그날이 내 생에 처음으로 술을 마신 날이었다.

기차에 올라타기 전,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자 도착하면 꼭 문자 보내라는 말과 함께 N이 그 손을 꼭 잡아주었다. 택시를 타면 꼭 번호를 찍어서 보내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나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헤실헤실 웃어 보이며 기차에 올라탔었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응시한다. 하지만 바깥 풍경이 보이기보다는 술에 취한 내 얼굴이 보인다.

나 오늘 실수한 것 없겠지?

오늘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꼭꼭 곱씹어본다. 어떻게 행동했었는지,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혹시나 N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없었는지, 하나하나 세세히 곱씹으며 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막차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객실은 한산해 다행이었다. 옆자리에 사람이 있었다면 계속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 벌써 보고 싶어.

왼쪽 주머니에 나도 모르게 손을 넣으며, 오른손으로 폴더폰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초조함을 달랬던 기억이 난다.


징-.


반가운 진동음에 퍼뜩 휴대폰을 열어보니, N에게서 온 문자가 화면에 덩그러니 떴다.


[ 난 집에 도착했어. 길드원들이랑 레이드 갈 거야. ㅋㅋ!!]


허전함이 마음을 덮친다. 갈증이 나는데, 술을 마셔서 그런가.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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