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기록 no.1 - 불안과 환희

by 푸르다

안내 음성과 함께 지하철 문이 열린다. 미도는 일전에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슈크림 도어가 열립니다.'라고 들린다는 게시글을 본 이후로 안내 음성이 들릴 때마다 실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세상에는 참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아. 웃음이 터진 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주먹을 모아 입가에 대고 목을 가다듬어본다.

쿵-.

사람들이 와르르 내려 한산해진 지하철에 탑승한 후,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미도는 불현듯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선이 머문 곳에는 곱슬곱슬한 짙은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앉아 있다. 익숙한 실루엣. 그 여자는 미도가 간신히 잊은 10년 전의 첫사랑을 쏙 빼닮아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 상태이기에 절대로 동일 인물일 리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장이 의지와 상관없이 세차게 뛴다.

옆자리의 단발머리 여자와 함께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가까운 친구 사이이며 함께 놀러 나왔다는 것을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앉은키로 보아서는 꽤 키가 큰 것 같았다.

맞은편 자리가 운 좋게 비어있어 미도는 잽싸게 그곳에 앉아 휴대폰을 보는 척,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힐끗 조심스레 훔쳐보았다. 처음에는 입꼬리가 살짝 아래로 내려가 있는 앳된 얼굴이 보인다. 몰래 엿보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약간의 텀을 두고 다시 시선을 올려 확인한 얼굴에는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화장으로 채 가려지지 않은 주근깨가 있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에는 세미 스모키 메이크업이 되어있어 정성스레 화장을 한 티가 난다. 누가 보아도 대학생인 게 분명할, 그런 싱그러운 나이대의 모습이었다.

아, 역시 그 사람은 아니구나. 다행이다.

그렇게 안도하며 미도는 귀에 무선이어폰을 꽂았다.

그 사람은, N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알기 힘든 사람이었다. 제법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멀어지고,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가까운 그런 사람. 그러한 속성은 그녀를 더없이 멋지고 신비로운 어른으로 보이게 만들었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닿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이 좁은 한국 땅에서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쉽사리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미도는 몇 안 되는 만남에서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 모양을 하고, 어떤 향수를 뿌리고 나갈지, 언제 도착하는 열차를 예약할지, 등등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꼼꼼히 계획했다.


"신이 왜 꼭 아름다워야 해?"


일순간 조용해진 지하철에, 카랑카랑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미도는 마침 플레이리스트를 뒤적거리다 듣고 싶은 노래가 없어 이어폰을 뺀 참이었다.


"나는 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해."


그 목소리의 주인은 미도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것이었다. 이 질문과 대답이 미도에게 과거 자신이 N과 나누었던 대화를 벼락처럼 떠올리게 했다.

저 사람은 N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순간 미도에게는 더없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N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내 눈앞에 과거의 N이 앉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미도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N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 그녀가 창조한 캐릭터들 중 하나인 '잠의 신'이 지금 미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한창 과제에 치여 수면부족에 시달리던 N이 자고 싶다는 말을 연발하며 만든 캐릭터였다. 언제나 졸린 눈을 한, 졸음이 묻어나오는 느릿한 말투를 가진 키가 크고 잘생긴 신. 그런 N에게 미도는 저 여자와 같은 질문을 했다.


왜 사람들이 그리는 신은 꼭 아름답고, 잘생긴 걸까?


툭 튀어나온 질문에 N은 그저 웃으며 답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름답게 창조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구가 아닐까?


미도는 그렇다면 이 경우에는 누가 신(神)인 거야? 하고 묻고 싶었지만, 집중하여 그림을 그리는 N의 모습에 말을 삼켰다.


이번 역은 종로 3가, 종로3가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무릎에 올려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미도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N을 닮은 저 사람은 옆자리의 친구와 여전히 신에 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주위를 의식했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소곤 이야기하려 노력하는 것 같지만, 미도에게는 아주 또렷하게 잘 들렸다. 더 귀 기울여 듣고 싶은 욕구가 일었지만, '슈크림 도어가 열립니다.'라는 음성과 함께 문이 열렸고, 미도는 종각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었기에 인파를 따라 바쁘게 발을 옮겼다.

신에 관한 열띤 대화를 하던, N을 닮은 그 여자의 이름이 문득 궁금해졌다. 이 세상, 어떤 우연으로 나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닮은 사람을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걸까. 운명적 만남의 실존을 목격한 것 같아 가슴이 울렁거려 주저앉고 싶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N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미도를 덮쳤다.

아, 그녀는 이제 나 따위는 완전히 잊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던 그 시절의 감정이 밀려오는 것은 자연재해와도 같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미도는 그저 이 감정이 자신을 침몰시키지만 않기를 바랐다.


10년 전, 갓 스무 살이 되어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는 환희도 잠시. 부모님의 보호 아래 모르는 게 있어도 아직 어리니까 괜찮다고 차치할 수 있었던 어리숙한 학생의 티를 벗지 못한 미도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차가웠다.

자신이 얼마나 세상을 모르고 살았는지 뼈저리게 절감하는 순간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다가왔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어떤 첫인사를 건네야 하는지, 어떻게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완곡히 거절할 수 있는지, 메뉴가 복잡한 식당에서는 종업원에게 어떤 도움을 구해야 하는지, 자신의 무지를 솔직히 인정하는 방법과 어떻게 양해를 요구하는 것이 좋은지 등등.

미도. 단 게 먹고 싶어, 쓴 게 먹고 싶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고등학교 4학년이 된 기분을 느끼고 있던 미도에게 N은 성숙한 어른이었다. 그녀는 미도 보다 3살 많았고, 배려를 잘해주는 사람이었다. 가끔 미도는 철없던 자신이 저지른, 부끄러움에 밤잠을 설치게 할 성숙하지 못한 행동들이 떠오르는 밤이면 N에게 뜬금없이 사과 문자를 보내곤 했지만, N은 그것을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일부러 미도에게 눈높이 설명을 해주었고, 미도는 그런 N을 잘 따랐다.

그러니 속절없이 빠져들 수밖에.


"미도, 점심 뭐 먹을까?"

"아무거나."


그 말에 친구가 미도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대답이 그게 무엇이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식욕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기에 친구의 타박에도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발을 옮기다 보면 줄지어 있는 식당 중에 먹고 싶은 메뉴가 눈에 띄지 않을까. 운명처럼.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미도는 이제 N에 대한 생각을 접고 친구와의 대화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장마철이라 장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비가 전혀 오지 않아 괜히 짐만 생겼다, 우리나라는 이제 사계절이 아니라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야 한다, 그따위의 불평을 투덜투덜 늘어놓으며 걷다가 두 사람은 어느 식당의 입간판 앞에 멈추어 섰다. 1미터 정도 크기의 샛노란 색 입간판에는 파스타, 스튜, 샐러드 그림이 먹음직스럽게 그려져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한 번씩은 꼭 사로잡고 있었다.


"여기서 간단히 먹을까?"

"좋아. 샐러드랑 파스타 맛있겠다."


그렇게 번듯한 식당에 들어가 몇 명이냐고 묻는 직원에게 두 명이요, 하고 능숙하게 대답한 뒤 안내받은 자리에 앉는다. 메뉴판을 받아 주문 방법에 대한 설명도 듣는다.


"저희는 선결제 매장입니다. 메뉴를 고르신 후 태블릿을 가지고 카운터로 와 주세요."


속사포로 설명을 쏟아낸 직원은 설명을 알아들었다는 몸짓을 보자마자 총총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떠나간다. 태블릿을 테이블 한가운데에 두고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었다. 능수능란하게 화면을 누르는 거침없는 손길. 메뉴를 고르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어린 시절, 미도는 자신이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조차 몰라서 먹고 싶은 게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재료와 조리 방법이 친절히 적혀 있어도 어떤 맛일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아 앞사람이 선택한 메뉴를 자신도 좋아한다고 말하며 태연한 척 따라 주문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내비치는 것이 괜히 부끄러웠다.


"난 크림 파스타는 별로인데."


미도는 자신이 느끼한 음식을 잘 못 먹는다는 사실을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처음 까르보나라를 먹었을 때, 다들 맛있다고 극찬하는 음식이 미도에게는 그저 느끼하기만 했으며 어떤 맛을 좋다고 느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뿐이었지만, 촌스러워 보일까 봐 부러 맛있는 척을 했다.


"그럼 로제로 시키자."

"좋아."


두 사람 사이에 절충안이 나왔다. 미도는 이제는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도 좋다는 것을 안다. 무조건적인 순종보다는. 그것이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두 N 덕분이었다. 미도의 부족한 점, 결핍을 모두 알아차리고 채워준 유일한 사람.

그러나 N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 버렸다. 결혼을 하면서, 이민을 가 버렸다. 미도는 그 사실을 최근에 우연히 그녀의 블로그를 보고 알았다. 아들이 있더라. 5살짜리 아들이. 오랫동안 방치하던 네이버 블로그에 접속한 것은, 그리고 불과 3시간 전에 등록된 포스트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N의 입매를 닮은 아들의 사진을 보며, 미도는 웃음이 나오면서도 마음 한쪽이 시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미도는 N에게 고백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짝사랑은 영원한 미도만의 비밀이었다. 미도와 N이 실제로 만난 것은 단 3번뿐. 그들은 주로 온라인 게임에서 만났다. 미도와 N이 열렬히 서로의 삶에 관여한 기간은 4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공유했지만, 그럴수록 미도는 N의 속마음을, 상냥한 외면에 감춰진 내면을 알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알기 힘든 사람이었다.


"오, 여기 괜찮다. 다음에도 오자."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친구의 입가에 파스타 소스가 묻어있다. 그러자고 답하며 냅킨을 건네주었다. 건네받은 냅킨으로 입가를 자연스레 닦는 친구를 보며, 미도는 속에서 폭발하듯 커지는 감정을 억눌렀다.

집중하자.

열심히 음식을 입에 넣고 평소보다 더 많이 꼭꼭 씹어 삼킨다. 이 그리움과 후회와, □□도 잘게 부숴버리는 것처럼.


그래. 나는 이제 당신을 기록하려 한다. 내가 바라본 당신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리가 함께하던 그때의 기억과 감정과, □□을.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