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기록 no.8 - 불안과 참새

by 푸르다

목요일 새벽 3시. N의 블로그에는 결국 아무런 업데이트가 없었다. 돌아오는 화요일을 기다려야 하나. 등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에 모니터에서만 하얀빛이 뿜어져 나온다. 눈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도는 밤에도 보통 작업실 방의 불을 켜지 않았다. 낮에는 LED등의 불빛이 더워서, 밤에는 단순히 어두운 게 좋아서, 그런 이유를 갖다 붙여 웬만해선 전등을 켜지 않았다. 크게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블루스크린 차단 안경을 이따금 끼는 것이 혹사당하는 눈에 대한 마지막 양심이었다.


"안 자고 뭐 하나."


의자를 반쯤 빙글 돌려 뒤를 보자 작업실 방의 문틀에 기댄 J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하품을 하고 있었다. 작업실은 침실과 마주 보고 있는 구조여서 작업을 하다 지칠 때 몇 걸음만 걸으면 침대에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래서 미도는 J의 인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무방비하게 습격당한 소동물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가까스로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갑자기 좋은 문장이 생각나서 글 쓰는 중이었어."


J가 눈을 비비는 사이, 미도는 태연하게 블로그가 켜져 있는 탭을 끄고 괜한 의심을 받지 않으려 한창 에세이 원고가 작성되고 있는 한글 파일을 화면에 띄웠다. 아직 빛에 적응하지 못해 인상을 찌푸린 J가 비척비척 걸어와 미도의 옆에 놓여있는 간이의자에 앉았다.


"불 좀 키고 하지. 눈 상한다 안켓나."

대신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끼고 있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J는 콧방귀만 뀔 뿐이다. 미도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해 오른손을 내밀자, J가 그 손위에 고개를 올린다. 강아지 같아. 왼손으로 부드럽게 J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도가 입을 열었다.


"다시 자러 가. 난 아마 해 뜰 때까지 작업할 것 같은데."


사실 포스트잇에 기록해 둔 N의 블로그에 대한 정보를 어서 정리하고 싶은 속내가 숨겨진 말이었다. 창고방에서 발견한 노트는 기억 속의 디자인과 약간 달랐지만, 까만 배경에 사실적인 보름달 그림이 금박으로 처리되어 있는 아름다운 표지는 처음 선물 받았을 때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J가 잠을 자는 사이 미도는 노트 안에 페이지마다 날짜순으로 포스트잇을 하나씩 붙여놓았다. 이제는 내용을 하나하나 노트로 옮기고 포스트가 업데이트된 시각을 추가로 적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미처 보지 못한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설레고 있었는데, 하필 타이밍 좋지 않게 J가 잠에서 깨어버렸다.


"잠 다 깼다. 만화책이나 읽을래."


작업실에는 180센티미터의 길쭉한 사무용 책상이 문을 등지도록 배치되어 있고, 방을 두 구역으로 나누도록 의도적으로 방의 가운데쯤에 위치되어 있다. 거기에 책상과 가로길이가 얼추 비슷하지만 40센티미터 더 높은 책장을 맞붙여서 반은 작업공간으로, 반은 작은 서재로 꾸며두었다. 작업실은 침실의 3분의 2 정도 크기였기에 서재가 되는 공간은 상당히 협소했지만, 작은 베란다가 딸려있어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베란다에 꾸며둔 작은 화단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오히려 운치가 있었다. 자주 열지 않는 베란다 문의 반은 베이지색의 콤비 블라인드가 쳐져 있고, 그렇게 완성된 좁다란 공간 안쪽에 아주 푹신한 빈백이 놓여있다.


"그래, 그래."


책장의 가장 아래쪽에 꽂혀있는 만화책을 한가득 꺼내는 소리가 들리고, J가 빈백에 풀썩 기대어 앉아 독서등을 켜는 소리가 연이었다. 오늘은 글렀네, 그렇게 체념하며 미도는 정말로 에세이 작업을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름 장마 기간은 참 견디기 힘들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아직도 구식 스탠드형 에어컨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에어컨 바로 앞, 그러니까 교실에서 가장 뒷자리에 앉는 아이들은 춥다고 담요를 덮고 덜덜 떠는데, 에어컨에서 가장 멀리 있는 자리는 미적지근한 공기가 시원해지기까지 한참이 걸려 에어컨 온도를 놓고 언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도 차라리 담요를 덮고 추위에 떠는 것이 나았기에, 한 달에 한 번 자리를 바꾸는 날이 되면 다들 에어컨에서 가장 먼 자리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제비를 뽑고는 했다.

설상가상으로 요즘은 장마 기간이라 허구한 날 비가 내리니 에어컨을 트느라 환기도 제대로 시키지 않는 교실에는 늘 걸레 썩는 냄새가 났다. 물론, 그 냄새에 가장 고통받는 것은 매번 수업을 하러 들어오는 선생님들이셨다. 참다못한 담임 선생님께서 뿌리는 방향제를 가져다 놓으셨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처음으로 여고에 부임한 남자 선생님께서는 여고생에 대한 환상이 박살 났다며 푸념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선생님의 심경을 헤아리기보다는 여고에 온 것을 환영하신다고 말하며 그저 웃기 바빴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여름방학이 시작된 날, 우중충한 날씨와 더불어 마음도 꿉꿉해져서인지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기말고사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은 탓이 컸다. 모의고사 성적도 불안 불안하다.

이 와중에 N은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르고 '공부가 전부는 아니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원래부터 N이 다니는 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는 성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지난겨울방학부터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을 더 늘렸는데도 성적은 신통하게 오를 생각이 없었다.

속상한 마음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 연습장에 아무렇게나 낙서하며 심란한 마음을 달랬다. 까만 볼펜으로 연습장에 날카로운 선과 삐뚤빼뚤한 곡선을 가득 채우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까지 5분이 남아있다.

N의 문자에는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 불퉁한 답을 보낼 것이 뻔했기에. 사실 최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학업 관련 이야기로 N에게 투정을 많이 부리기도 했고, 모난 말을 많이 했다.

언니는 원래 공부를 잘하잖아. 나는 돌머리야.

그런 흔해 빠진 뾰족한 말로 열심히 나를 위로하는 N의 말문을 막히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오전 자습 시간을 훨훨 날려 먹고 점심을 먹으니 당연하다는 듯 소화가 되지 않는다. 마침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해가 내리쬐기 시작해 오랜만에 노래를 들으며 20분 정도 운동장을 돌았다.

노래 목록은 온통 N이 추천해 준 것들로 가득 차 있고, 나는 결국 나의 일상 곳곳에서 N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걷는 속도를 늦췄다.

어떻게 답을 할지 예쁘고 고운 말을 고르고 고르며, 운동장 한쪽에 있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5월에 연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달리는 등나무를 중심으로 사방에 네모나게 벤치가 놓여있는 이 장소는 모든 학생들이 좋아하는 휴식 장소였다. 하지만 날이 더운 탓에 벤치에 앉은 것은 나밖에 없었고, 나는 그 사실이 좋았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하게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 오늘 집중이 너무 안 되어서 낙서만 했어. ]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고 삭제하기를 눌렀다.


[ 위로해 줘서 고마워. ]


또 삭제 버튼을 눌렀다.


[ 언니랑 같은 학교에 가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 너무 속상해. ]


잠시 머뭇거리다 역시 삭제 버튼을 눌렀다. 어떤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한 속내를 내비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 가지만, 역시 혼자서 속으로 간직하다가 혹시라도 N의 학교에 합격하면 그때 자랑스레 말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이대로 점심시간에도 답을 하지 않는다면 괜한 오해를 사지는 않을까 더럭 겁이 나기 시작한다. 괜스레 멀어지는 게 아닐까. 서먹해지지는 않을까. 나에게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느끼는 게 되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떠오르며 불안감에 속이 메스꺼워진다.

짹-!

그 순간, 별안간 참새 한 마리가 내 앞에 떨어졌다. 어디에 부딪친 건지 일어나지 못하고 날개만 푸드덕거린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참새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잠시 몸부림치던 참새가 손 안에서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보건 선생님께 데려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학생다운 발상이 떠올라 나는 종종걸음으로 보건실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온통 어떤 답장을 할지 그 생각뿐이었다. 사실, 죽을지도 모르는 참새에 대한 걱정은 추호도 없었다. 나의 이 행동은 오롯이 생명을 경시하면 안 된다는 주입식 교육으로 배운 윤리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뿐이었다.


[ 산책 중에 다친 참새를 주워서 보건실에 데려가고 있었는데, 수학 선생님께서 보시더니 그냥 두면 알아서 산다고 가져가셨어. ]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르자 오후 자습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내에 울려 퍼진다. 참새는 아마 죽을 것이다. 내게서 참새를 건네받은 선생님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다 교실로 가는 복도로 접어드는 모퉁이를 돌 때, 나는 선생님께서 참새에게 어떤 처분을 내리시는지 곁눈질로 보았다.

키가 큰 수학 선생님께서는 참새를 높은 담장 너머의 수풀 속에 톡, 던지셨다. 나는 그것이 사형 선고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아주 운이 좋으면 살아날 수 있겠지만, 아마도 학교 근처를 배회하는 길고양이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저 N에게 할 이야깃거리가 생겼음을 기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로 향했다.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멈추었다. 난 왜 이렇게 진부한 표현만 골라 쓸까. 다시, 다시. 자신을 힐난하며 미도는 모니터 왼쪽에 책을 나란히 세워 만든 간이 책꽂이로 손을 뻗어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해 둔 노트를 꺼냈다. 팔락 팔락 종잇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 떠오른 흐릿한 문장을 필사적으로 찾는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 다니엘 글라타우어 소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


순식간에 넘어간 페이지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원래 찾던 문장은 아니었지만, 미도의 시선을 머무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입술만 움직여 문장을 음미하듯 읽어본다. 꼭꼭 마음에 새기려 반복해서 여러 번 읽는다. 알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세상을 알게 된 새처럼 가슴이 울렁거린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정말,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저도 모르게 맺힌 눈물이 종이 위에 떨어졌다. 미도는 숨죽여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강렬한 그리움에 소리 내 울고 싶었지만, 지금 책장 너머에는 J가 있다.

고요한 밤이면 작은 소리도 귓가에 내리치는 천둥처럼 참 잘 들린다. 혹시라도 훌쩍이는 소리에 J가 깰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도는 눈물이 마를 때까지 미동도 않고 이 문장을 계속해서 바라만 보았다. 처음 필사를 할 때에는 누구를 떠올렸더라. J와 사귀기 이전에 쓴 문장이었다. 그때에도 참으로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었다.

그리운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 '항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렇게 풀어냈을까. 그렇게 경탄하며 옮겨 적었던 기억이 난다. 눈물이 종이 위에 떨어질 때마다 잉크가 번져나간다. 다시 옮겨 적어야겠다. 차분한 이성이 마음 한쪽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미도는 감정이 격렬한 순간에 자신의 감정과 이성이 분리되어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지금 이 순간, N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풋내 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로 감정은 격렬히 요동치며 자신을 뒤흔드는데, 이성은 책장 너머에 있는 J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며 행동을 하나하나 통제한다.

그런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미도는 돌연 자신이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더불어 이것이 사랑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성과 감정 사이, 죄책감이라는 혼돈의 폭풍 한가운데에 미도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그때 지하철에서 그 여자를, N을 쏙 빼닮은 그 여자를 만나서는 안 되었다. 지하철에서 그 여자를 만난 순간, N에게 받은 택배 상자 안에 꽉꽉 눌러 담은 모든 감정과 기억이 판도라의 상자를 빠져나온 만악의 근원들처럼 순식간에 퍼져와 미도를 잠식했다.

아, 위험해.

드디어 눈물이 멈추고, 젖은 눈가가 말라감을 느끼며 미도는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았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지 않은 베란다 창을 통해 새카만 구름이 가득 낀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시절, 야간 자습이 끝나고 집에 올 때마다 지겹게 보았던 밤하늘의 느낌을 닮아있다. 분명 구름 한 점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별만 가득한 밤하늘도 많이 보았을 텐데, 엉뚱하게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이 먹구름 낀 밤하늘이다.

적막함이 조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차츰 가라앉게 한다. 심장 소리가 잦아들고, 어디서 나는지 모를 삐그덕 소리가 귀에 날아든다. 뒤이어 집 안에 있는 가전제품이 작동하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미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J가 책을 넘기는 소리가 한참 전에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자?"


울음을 너무 삼킨 탓일까. 목에 가시가 박힌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진다. 속에서 올라오던 긴 문장이 도로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미도는 한 글자만 겨우 입 밖으로 토해낼 수 있었다. 또렷하게 울려 퍼진 질문에 대한 답이 책장을 넘어오지 않는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게, 그냥 가서 자라니까."


빈백에 기댄 자세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져 곤히 잠든 J를 보며, 미도는 잠시 J를 깨울까 말까 고민했다. 욕심내서 잔뜩 꺼낸 만화책은 결국 한 권도 제대로 못 읽은 모양인지 그대로 가지런히 쌓여있고, 배 위에는 거의 앞장만 넘겨진 만화책이 올려져 있었다.

미도는 자기 싫어서 떼쓰다가 결국 기절하듯 잠든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아서 살포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만화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놓고, 미도는 책장과 J 사이의 협소한 공간에 끼어들어 앉아서 J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천천히, 애정을 담아 쓰다듬어주었다. 조심스럽게 살살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주면서, 좋은 헤어 팩을 하나 사서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마라탕 데이뿐만 아니라 J가 좋아하는 것들을 좀 더 챙겨주자고 다짐하면서.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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