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감과 함께 눈을 떴다. 오전 7시 48분. 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야 할 햇빛이 흔적도 없었다. 몸을 일으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밖을 살펴보니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가득 껴있었다. 저녁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어제만 해도 창밖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나뭇잎이 넘치는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는데, 그저 햇빛이 구름에 가려졌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제 창밖은 그저 살풍경할 뿐이었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려나. 그런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면서 미도는 벌러덩 뒤로 다시 누워버렸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절로 눈이 떠지는 것도 오랜만이네.
미도는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둘둘 말아 옆으로 치워버리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옆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먹구름 낀 하늘처럼 흐리멍덩한 머릿속이 쉽게 개이질 않는다. 손바닥으로 눈을 문지르며 미도는 다시 누워서 잘까 고민하다 왠지 이대로 잠들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졸음으로 천근만근 무거운 몸이 중력을 역행하느라 불평을 토하듯 휘청거렸지만, 어쨌거나 일어나는 데에는 성공했다. 휘적휘적 거실로 나가니 테이블에 앉아 J가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 옆에 있어야 할 것이 J였구나. 아주 느린 옛날 컴퓨터가 된 기분이다. 부팅 속도가 영 느리다. 이러다 다운되는 거 아닌가 몰라.
"완일이고. 벌써 인났나?"
미도와는 정반대로 J는 아침잠이 없었다. 제법 늦게 잠들었다 싶어도 일찍 일어나는 사람.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서 어릴 적부터 습관이 든 거라고 J가 설명했지만, 미도는 생체 리듬이라는 건 일정 부분 타고나는 거라고 생각하기에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었다.
"눈이 절로 떠졌어."
아침부터 드립커피를 내리는 수고를 하기가 싫어서 미도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머그잔에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두 개 뜯어 쏟아부었다. 하도 커피를 마셔서 이제는 컵 안쪽에 커피 얼룩이 생겨버린 연노란색 머그잔이 '오늘도 커피냐?'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응, 맞아.' 그렇게 대답하며 팔팔 끓는 물을 붓자, 까만 액체가 머그잔 안에 가득 차오른다.
"무슨 책 읽어?"
맛은 별로지만 향은 그럴싸한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도는 J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J는 어제 새벽에 보던 만화책이 아니라 겉표지가 없어 밋밋한 청록색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런 책이 있었나 하고 미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퍼뜩 책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기억 저 너머에 수납해 두었던 것 같다.
"책상 위에 있길래."
집중해서 읽는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J는 빠르게 종잇장을 팔락 팔락 넘겼다. 약 250쪽 정도 되어 보이는 책이 벌써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책상 위에 있었다고? 책상 위에 있었던 건 다 정리했었는데. 아니, 어제 책상 위에 노트를 뒀었지. 그리고 N과 관련된 물건들 몇 가지. 그래도 크게 눈길을 끄는 건 없을 텐데. 나한테나 특별한 사유가 있는 거지, 그냥 평범한 물건일 뿐이고. 애초에 내 책상 위의 물건에 그렇게 관심 가진 적도 없었잖아.
잠깐, 이 책이 내 책상 위에 있었던 거라고?
"내 취향은 아이다. 영 파이네."
둔탁하게 책을 덮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내려앉았다. 실제로는 아주 찰나의 정적이었지만 미도에게는 J의 미묘한 눈빛, 어딘가 꺼림칙한 손동작, 미도의 반응을 살피는 듯한 시선, 의중을 떠보려는 듯 살짝 앞으로 기울어지는 몸짓, 그 모든 것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로 굉장히 길었다.
"취향이 아닐 수 있지. 세상에 책은 많으니까."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말이 입술 선을 넘었다. 정돈하지 못한 목소리는 딱딱했다. 날카로웠다. 긴장감이 뱃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라 식도로 역류한다. 들키지 않으려 커피를 한 모금 목구멍으로 흘려보낸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은 채 평소에는 알아차릴 수 없는 식도의 위치가 느껴진다. 엄청나게 매운 걸 먹었을 때처럼 머리에서 땀이 나면서 동시에 차갑게 식는 느낌이 난다.
"일해야 하니까 일찍 가보께."
망했다. 미도는 최대한 태연한 척 J를 배웅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J가 미도의 미묘한 태도 변화를, 요동치는 내면의 아우성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본인의 속내는 잘 감추면서 타인의 속은 훤히 들여다볼 줄 아는 것이 J의 특기였다.
어쩌면 미도가 N을 다시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J는 미도가 N의 흔적을 좇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미도에게 N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미도만이 정확한 J의 속마음을 올라왔을 뿐, 진작에 간파당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미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미도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고 J는 전철을 타러 가버렸다. 차마 전철역까지 따라가 기에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도는 아파트 정문까지만 J를 쫄래쫄래 뒤쫓아갔다.
정확히 이건 배웅이 아니었다. 후덥지근한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라탈 때도, 먹구름 낀 하늘에서 곧 비를 쏟아내겠다는 예보처럼 으르릉, 소리가 났을 때도, 아파트 단지 내에서 난폭하게 속도를 높여 운전하던 차량이 옆을 스쳐 지나갔을 때도, 살갑게 인사하며 안면을 터놓은 경비 아저씨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할 때도, 폭우와 돌풍에 대비해 차단기가 미리 제거된 정문을 지날 때도 J는 미도를 보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손만큼은 꼭 붙들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눈을 맞춰주지 않았다.
이건 일방적인 작별 인사였다. 하지만 미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한 마디라도 꺼내는 순간,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고, 어떤 것도 주워 담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평소처럼 J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아무리 일하느라 바빠도 식사는 해야 하니 마라탕이 먹고 싶으면 문자 보내라고 덧붙이는 것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뽀뽀해 줘."
거리에는 등교하는 학생, 출근하는 직장인, 산책을 나온 견주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바삐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J는 미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 정말로? 이따금 밖에서 가볍게 뽀뽀를 해준 적이 있기는 했다. 다만 그 뽀뽀에는 어두운 밤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 서라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지금은 어두운 밤도 아니고, 인적이 드문 곳도 아니었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됐다, 마."
머뭇거린 시간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침의 정적처럼. 하지만 J는 이번에도 역시 미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생각을 읽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툭, 머리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 것이 느껴졌다.
"비 온다. 얼렁 들어가라. 전화하께."
우산 없으면서, 집까지는 어떻게 가려고. 분명 한바탕 쏟아질 텐데. 우산 사는 거 돈 아깝다고 맨날 비 맞고 다니잖아. 내가 태워줄게. 아니, 하루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다 설명해 줄게. 차라리 다 설명하고 차이게 해 줘. 이대로 가지 마. 어차피 버림받을 거면 다 고백하고 버림받는 게 낫지 않나? 나는 뭘 망설이는 거지?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굵어진 빗줄기가 정수리에 낙하하고, 급하게 주워 입고 나온 얇은 후드집업이 젖어든다. 분명 무어라 대답을 하기는 했는데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미도는 J의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서야 J와 함께 걸었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 집으로 되돌아왔다. 정문까지 가는 길은 참 멀었다. 일부러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도는, 이리저리 자주 가지 않는 길을 탐방하면서 걸었던 산책 코스였다. 불과 30분 전까지 J가 그 길을 앞장서서 걸었었다.
할 말이 있지 않느냐고. 지금 실토하면 다 받아주겠다고.
하지만 미도는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미안해."
최단 거리를 뛰다시피 해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도는 현관문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습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공허함이 오랜만에 존재감을 뽐내고 있을 뿐.
심장에 구멍이 뚫린 기분, 오랜만이네. 차게 식은 이성이 미도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제 새벽, 미도는 결국 J를 깨우지 못했다. 대신 얇은 담요를 덮어주고 독서등을 껐다. 아침에 해가 들어오지 않는 방이니 커튼을 모두 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건드리지 않았다.
"지안아, 미안해."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청록색 책을 집어 들고, 미도는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사과하려면 진작 했어야지. 테이블 위에 놓인 미니 턴테이블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J가, 지안이 1주년을 기념해 선물해 준 것이었다. 외관만 아날로그일 뿐, 속은 순 디지털이지만 기분을 내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두꺼운 하드커버 표지를 넘기자 짙은 남색의 속지가 드러난다. 각도를 조정해 빛을 비추면 까만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자가 드러난다. 정확히는 편지가 드러난다. N이 미도에게 쓴 편지가.
이 책은 N이 먼저 읽고 내용이 너무 좋았다며 미도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원래는 겉표지가 있었지만 거추장스러워 빼놓았다가 잃어버렸다고 들었다. 그래서 청록색 하드커버가 그대로 드러난 이 책은 책등에서 그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편지를 읽었다. 정갈하고 오밀조밀하게 쓴 N의 글씨는 참으로 예뻤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미도는 이 책을 사랑했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만을 사랑했다. 원래 흥미가 있어 구매할 예정인 책이었지만 N이 소장한 책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을 짚어가 본다. 지안이 읽었던 것처럼 훌훌 넘겨본다.
그러다 벼락 맞은 것처럼, 미도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10년도 더 전에 선물 받은 이 책에는 페이지마다 N의 지문이 곳곳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찍힌 무수히 많은 지문이 구석구석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발견하고 미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N은 결혼했어. 아이도 있어. 뉴질랜드에 있다고. 블로그에 글은 올라오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마음으로 스토커처럼 굴어봤자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냔 말이야?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그제야 밖에 거세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환기를 위해 샷시를 활짝 열어둔 앞 베란다로 사정없이 비가 들이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분에 물 안 줘도 되겠네. 빗방울에 흠뻑 젖은 화분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에는 보송하게 말랐었을 게 분명한 빨래가 눅눅하게 젖어있다. 저건 좀 귀찮을지도. 미도는 샷시를 닫고 잠금장치를 걸어 돌풍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샷시를 고정했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와 차갑게 식은 커피를 싱크대에 부어버리고 무기력하게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오늘 사랑을 잃었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못했을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