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기록 no.10 - 불안과 청소

by 푸르다


오후 1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 이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했다. 마냥 신이 날 줄 알았는데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순간 죄책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이 위험하다고 하지 말라고 명하신 일 따위를 몰래 시도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심장은 쿵쿵 뛰고 불안함에 마른침을 삼켰다. 당장 교실로 돌아가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교실이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강한 중력에 저항하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으로 향하다 계속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약 일주일. 낯선 하교 시각에 적응하는 데에는 대략 일주일이 걸렸다.

높이 떠오른 태양이 머리 위에 걸려있고, 바람이 불지 않아 온전히 햇빛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화창한 날. 오늘은 목도리를 벗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수능이 끝나면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막상 시간이 텅 비어버리니 방향을 잃은 기분이었다. 무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일단 성적표가 나오기 전까지 N과 게임이나 하며 실컷 놀 생각이었는데, 정작 이번엔 N이 학기 말을 맞아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간간이 보내오는 문자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학교에서 야작을 하느라 자취방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언니. 점심은 먹었어? ]


성적표가 나오기까지 약 일주일이 남았다. 가채점으로 대략적인 결과는 알고 있지만 유명한 대형 학원에서 나온 등급표보다 더 잘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괜스레 한 줄기 희망을 가져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능 결과가 썩 좋지 못했다. 좋지 못하다는 기준은 N이 다니는 대학에 지망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수리 영역이 어쩐지 잘 풀리더라니. 객관식은 모두 맞췄지만, 여느 때처럼 주관식이 문제였다. 점수만 놓고 보면 썩 나쁘지 않았지만 나한테 쉬웠으면 남한테도 쉬운 법. 등급별 커트라인이 예상보다 높았다. 게다가 수학을 포기한 이과생들이 수능에서 문과생들이 치르는 '나형'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아 커트라인은 더 상승할 수밖에 없다.


[ 아직. 커피우유 하나 마시고 공부 중! ]


집에 도착할 즈음, N에게서 답이 왔다. 아, 우울해. 온종일 굶어도 좋으니 N이 다니는 학교에 가고 싶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워 의미 없는 말을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1시 30분. 부모님이 퇴근하시기까지 대략 5시간의 자유시간이 있다. 최소한의 난방만 돌아가는 집의 공기가 싸늘하게 몸을 감싸오지만, 이불을 덮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얼어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동사하는 과정을 살펴보니 종극에는 더위를 느껴서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한다던데.

의미 없는 생각을 늘어놓으며 희미하게 햇빛이 비치는 천장을 바라보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 ㅠㅠ... 언제 종강해? ]


설핏 잠이 들자마자 가위에 눌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물 먹은 듯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미뤄둔 답장을 보내고 나니 뱃속에서 밥을 달라는 요란한 신호가 울려 퍼진다. 수험생활을 하며 얻은 것은 늘어난 위장과 7kg의 체중뿐인 것 같다. 전체적으로 투실투실 살이 올라 약간 헐렁했던 겨울옷들이 지금은 몸에 꽉 끼인다.

벽에 등을 기대어 앉은 채 하염없이 휴대폰만 바라보며, 머리맡에 놓여있는 자명종 시계에서 초침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소리를 듣는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초침 소리가 고요한 방에 울려 퍼지고 있다.


[ 12월 중순쯤..? ]


꾸르륵. 위장에서 시위를 하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다이어트를 명분으로 점심을 굶기로 결정한다. 원래는 점심을 잘 먹고 저녁을 굶어야 한다는데 부모님이 식사는 거르면 안 된다고 난리 치실 게 눈에 훤하다. 아버지는 마냥 살이 쪄도 괜찮다고 건강하기만 하라고 하시는데, 어머니는 이제 대학 가면 살은 빼야 하지 않겠냐고 은근히 눈치를 주신다. 그러면서도 정해진 식사를 거르는 짓은 용납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쩌라는 걸까.


[ 그때면 아마 나는 원서 쓰느라 울고 있겠는데.. ]


수시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원하는 대학교에 지원하기에는 내신 성적이 모자랐기에 차라리 정시로 승부를 보기로 결정했다.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해 왔고, 썩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숫자로 정리된 나의 성적표는 영 흡족하지 못했다. 생활기록을 채울만한 대외활동도 딱히 하지 않았기에 수시 지원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속이 쓰렸다.

지망 대학의 목록을 살펴보시고, 선생님께서는 굳이 그 학교를 가고 싶으면 수능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모의고사 성적이 더 우세한 편이었고, 9월 평가원 모의고사에서는 N의 학교에 지원할 자격이 될 만큼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래서 내심 자신감이 붙어있었다.

그치만 수능이 망했잖아. 아, 짜증 나.


[ 기ㅇ누ㄴㅔ ]


많이 바쁜지 급하게 작성된 문자는 짧았고 자음과 모음을 얼기설기 맞춰 해독해야 했다. 그래, 바쁜 와중에도 나랑 이야기를 해주는 게 어디야. 같은 지역에 있는 학교라도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기적처럼 수리 등급만 조금 올라가 준다면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일명 '희망 회로'를 돌려본다.

이제 더는 위가 꼬이는 느낌을 견딜 수가 없어 부엌으로 달려가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평소에는 먹을 게 없더니, 이럴 때는 꼭 맛난 게 들어있다. 아버지가 선물 받았다고 가져오신 케이크 상자가 시선을 단단히 사로잡는다. 한 조각만 먹을까. 아니, 한 숟가락만 먹을까. 갈등하다 일단 유혹을 차단하고 냉정히 판단하기 위해 문을 닫았다.

냉장고 앞에 서서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는데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반사적으로 재빠르게 문자를 확인한다.


[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취방으로 놀러 올래?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


돌연 부들부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케이크 대신 보리차를 꺼내 한 컵 가득 따라 위에 쏟아부었다. 다이어트를 해야 할 간절한 이유가 생겼기에.








일주일이 넘도록 지안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니, 일방적으로 무참히 무시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안이 그렇게 돌아가고 난 후 이틀 정도 지났을 즘에 용기를 내서 문자를 보냈다. 내용은 심심했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일하고 있지? 상투적 문구로 채워진 안부 인사.

카카오톡은 상대방이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알 수 있으니 일부러 아예 확인할 길이 없는 문자를 택한다. 심하게 다투는 날이면 카카오톡 대신에 문자를 이용하는 것이 미도와 지안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당연하게도 지안이 돌아간 날 이후로 미도의 내내 기분은 시궁창에 처박혀 있었다. 하지만 우울함을 핑계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실의에 빠져 있기에 미도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비록 화, 목, 토 주 3회 연재 중인 에세이의 내용은 다소 침울해졌지만 마감을 어기지 않았고, 이제 중급반으로 옮긴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수요일의 소묘 수업도 빠지지 않았다. 정아는 미도와 같이 소묘 초급반 수업을 1년 채우더니 이제 수채화를 배우고 싶다며 월요일에 있는 수채화 반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우연히라도 만날 수 없었고 J의 소식을 물을 수도 없었다.

따로 연락해 약속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정아는 분명 진지하게 미도의 이야기를 들어주겠지만, 왠지 모르게 겁이 났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가늠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N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고이 묻어둔 기억으로 천천히 바래지기를 바랐기에.

무엇보다도 N과의 관계를 파탄 내버린 것은 미도였고, N에 대한 감정은 미도의 일방통행이었기에 두 사람의 관계 파탄은 미도에게만 지극히 개인적인 실연일 뿐, 표면상 흔한 친구 사이의 절교였다.

토요일에 올려야 할 에세이를 쓰는 것 외에는 아무 계획도 잡지 않은 금요일. 밤새 잠을 설치다 결국 이른 아침에 눈을 떴고, 계속 침대에 누워있기가 싫어 미도는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우중충한 미도의 마음과는 달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푸르게 빛나고, 햇빛이 서늘한 거실을 온기로 채우고 있었다. 지안이 떠나간 날 이후로 기온은 점점 낮아졌고 미도는 어젯밤에 결국 잠옷을 긴팔로 바꾸었다.

화기애애하게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던 테이블 위는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이 담겨있는 플라스틱 용기, 음식물이 묻은 플라스틱 숟가락, 나무젓가락, 콜라를 마신 흔적이 역력한 일회용 종이컵, 커피의 침전물이 남아있는 플라스틱 컵, 크고 작은 하얀색 비닐봉지들, 아무렇게나 뭉쳐져 있는 비닐랩으로 점령당했다. 싱크대에는 집에 있는 모든 컵들이 반상회를 여는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있고, 바닥에는 머리카락, 먼짓덩어리, 플라스틱 숟가락이 들어있었을 게 분명한 비닐 포장지, 나무젓가락을 감싸고 있었던 종이 포장지의 끄트머리 등이 나뒹굴고 있다. 현관 근처에 놓여있는 쓰레기통은 가득 찬 지 오래다. 화장실에는 세면대, 욕조, 변기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언제 다 치우지..."


엉망진창이 된 집안 꼴을 보며 한탄하면서도 몸을 움직일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작업실 책상 위만 제대로 관리를 안 한 것뿐이지, 미도는 구획을 나누어 거의 매일 집 청소를 했다.

본디 청소라는 것은 매일 해도 티가 안 나지만,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지저분해지고 더욱더 하기가 싫어지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미도는 가급적 청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마음이 아무리 지저분해도 집이 깨끗하면 이따금 찾아오는 우울함으로부터 회복하는 속도가 확연히 빨랐다.

그리고 이런 미도의 습관에 영향을 준 것도 N이었다.

도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지안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그 청록색 책만 읽었을 리가 없었다. 그 책의 남색 속지 위에 쓰여 있는 편지는 정말 친구 사이에 주고받을 수 있는 시답지 않은 잡담과 책에 대한 감상 같은 시시콜콜한 내용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미도가 정리해 둔, 포스트잇이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는 노트를 함께 읽었다면 이 책의 주인이 미도에게 더없이 특별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바람피운다고 생각했을 거야. 아니, 스토커처럼 보였으려나. 분명 그럴 거야. 정신적 바람의 정의가 뭐였더라. 전에 포럼에서도 그것 때문에 갑론을박이 심했었는데. 하지만 정확히는 사귄 것도 아니고 짝사랑이었는데. 완전 망사랑. 아니, 애초에 그게 사랑이었을까. 지안이한테 느끼는 감정하고는 뭔가 다른데.

시끄러운 속을 달래고 싶어 냉장고를 열었다. 정아가 가져온 케이크 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후로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넘게 방치되었으니, 저 케이크는 폐기되어야 할 운명이다. 애써 멀리까지 가서 사 왔다고 했는데.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마음이 콕콕 쑤셔온다.

맥주나 마셔야지.

가장 아래 칸의 깊숙한 곳에서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오래된 맥주를 한 캔 발견했다. 탄산이 새어 나오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을 따고, 숨이 허락하는 한 빈속에 맥주를 최대한 많이 들이붓는다. 맛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에 만족한다.

어서 취기가 올랐으면 좋겠다. 그러면 푹 잘 수 있을 텐데.

테이블에서 의자를 꺼내 햇빛이 들이치는 거실 한가운데에 놓고 털썩 앉아 남은 맥주를 다 털어 넣는다.


"하, 죽고 싶다."


입 밖으로 오랜 입버릇이 터져 나왔다. 미도는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푹 자고 일어나서 집 청소를 해야지. 움직여야지. 다시 우울함에 매몰될 수는 없어. 자신을 다그치며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취기가 오르기를 기다린다.

지잉-.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지만, 미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략 1분간 진동하던 휴대폰이 드디어 멈춘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휴대폰의 진동음에 귀가 아프다. 이렇게 끈질기게 전화를 거는 걸 보면 정아의 전화임이 분명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이번에도 받지 않는다. 세 번째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슬슬 짜증이 난다. 이 정도면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결국 머리끝까지 화가 난 미도가 휴대폰을 벽에 집어던질 요량으로 벌떡 일어나 휴대폰에 손을 뻗는다.


쾅쾅쾅!!!!!!!!!!!


곧이어 휴대폰이 손에 닿기도 전, 누군가 거칠게 현관문을 난타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아가 온 것이 틀림없었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미도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현관으로 발을 옮겼다. 정아는 죄가 없다. 정아한테 화내지 말자. 나한테는 화를 낼 자격이 없다. 그렇게 되뇌며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아 힘을 주어 아래로 누른다.

그래.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마음뿐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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