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위 내시경은 2년에 1번씩 받아봤지만,
만 35세 이상부터 5년마다 대장내시경도 한 번은 수검해야 할 것 같았다.
난임 시술부터 임신, 출산까지 꽤 장기간 건강보험에서 지원하는 기초 검사만 받았기에,
겸사겸사 질병 예방 및 조기 발견차 종합적인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전날 저녁부터 물 포함 금식을 해야하는 위장 내시경과 달리,
대장을 촬영하기 위해선 최소 3일 전부터 식단을 조절하며 몸을 준비해야 했다.
남편이 한 번 검진을 받았던 걸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어서 각오는 한 상황이었으나,
실제로 내가 5일간 준비하는 과정은 고역과 같았다.
남편의 잦은 야근으로 평일 기준 12시간 이상 독박 육아를 해야하는 특성상,
정신, 체력 소모가 많아 먹지 않으면 힘든 상황인데,
5일 전부터 맵지 않고 덜 자극적이면서도
조리에 시간이 짧게 걸리는 음식이 많지 않았다.
배달 음식도 선택지가 적어 어려웠다.
더구나 피해야 할 식재료도 많았다.
씨 있는 과일, 깨, 각종 양념 등 색이 있거나 알갱이 있는 조미료 역시 배제 대상이었다.
육아퇴근 후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마시곤 했던 맥주 1캔조차 허용되지 않아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5일간 흰쌀죽만 먹을 순 없는 노릇이고 질릴 수 있으니,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소금을 뿌린 생선구이였다. 그마저도 이틀 전까지만 먹을 수 있었다.
인간은 왜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하고 싶어지는 걸까?
먹지 말아야 하는 피자, 햄버거, 고기, 감자탕, 떡볶이 따위의 자극적인 음식만 자꾸 떠올랐다.
생각만해도 아주 맛있지 않은가!
'끝나기만 해봐라' 라며 속으로 단단히 벼르곤, '파블로프의 개' 마냥 먹을 걸 생각하며 군침을 삼켰다.
마음 속으로 먹킷리스트를 정리하면서!
숙명의 전날 밤, 하제 알약 복용
몇년 전 남편, 친정엄마가 수검 준비를 할 땐 물약을 평소 섭취량 대비 4배 이상에 달할 정도로 마셔야 했는데,
요즘엔 대장내시경 검사용 하제 알약이 개발됐다고 한다.
물론, 신약이라 그런지 물약보다 비싸긴 했지만,
물 먹다가 토하는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된 나머지 알약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역시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절대 얕봐선 안되는 것이었다.
복용법 상 전날 19시 경 14정, 다음날 새벽 14정을 마저 물과 함께 먹어야 하며
탈수 방지를 위해 물, 투명한 이온음료를 충분히 마셔줘야 했다.
작년, 유도 분만 때 '관장'을 해본 경험이 있는 터라 뭐 그것보단 낫겠지! 싶었다.
허나 이는 큰 착각이자 오만이자 편견에 불과했다.
복용으로부터 머지않아 내장이 뒤틀리는 신호와 함께 기나긴 화장실 행군이 시작되고 말았던 것이다.
엄마, 자꾸 어디가는 거야!
장문혈! 장문혈! 장문혈!!!!
미칠듯이 변의가 올라올 때마다 이를 완화해준다는 지압점을 계속 지그시 눌러야만 했다.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했다.
정신 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가 주창한 '항문기' 시기(만1세 반~3세)는 이미 지났건만
알약의 효과로 인한 인위적인 급똥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빈번한 화장실 내방을 요했다.
아기 기저귀 발진에 쓰는 B연고를 내 항문에 발라야 할 정도로 쓰라리기까지 했다.
복잡한 내 사정을 알 길 없는, 우렁찬 목소리의 소유자 생후 7개월 딸아이는
엄마가 자꾸만 자기랑 놀아주다가 말없이 급하게 곁을 비우니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아가, 미안해. 곧 돌아올게. 그러나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어."
워낙 어려 내 설득이 하등 와닿겠냐마는, 그래도 생이별하듯 슬피우는 내 딸이 가여워 말했다.
아직 용변을 가리지 못하는 딸아이의 똥, 오줌도 내가 치워야 하고,
내가 싼 것도 내가 치워야만 하는 실정이다.
늘 '생산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랐건만
약 복용 후 1~3시간 사이의 나는 한 마리의 똥싸는 짐승과 진배 없었다.
대체 난 무엇을 생산하고 있단 말인가.
변기 물 레버를 내리며 또 다시,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에 빠졌다.
그날만큼은 남편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샤워핸들에 아기를 두고 그 옆에서 변의를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크게 곤란할지니.
괄약근 조절 대실패로 바닥에 지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필히, 아빠가 아이를 씻겨줘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약을 먹은 이상, 내 장이 더이상 내가 괄약근으로만 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다행히, 남편이 비교적 늦지 않게 돌아왔고 겨우 나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잘 때까지 복통은 계속됐고, 영혼도 내장도 탈탈~ 털린 채로 지친 몸으로 밤 12시가 넘어 겨우 잠들었다.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춰놓고선.
준비는 길고, 수검은 짧다
전날 저녁에 거의 다 비웠으니, 새벽에는 비교적 용이하게 끝날 것이라고 크게 착각했다.
새벽 5시부터 먹었던 약은 기어이 나를 1시간도 못 자게 만들었다.
내과에 내방해서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할 때까지도 계속 변의가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나올 게 없어 소변처럼 물을 싸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마른 걸레를 짜듯 화장실행은 계속됐다.
빨리 이 검사를 마치고 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을 생각만 가득했다.
드디어 내 차례! 옆으로 누운 자세로 입에 마개를 하고 의사 선생님이 오길 기다렸다.
문진 상 이상이 없었으니 내 몸에도 큰 탈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혈관을 통해 마취제가 주사되었고,
분명 내 심박수 모니터를 보고 있었는데 그새 정신을 잃었고, 다시 깨어나보니 검사는 완료돼 있었다.
육아로 인해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던 기간 탓이었을까.
의외로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 들었다.
삽입된 검사기구의 영향으로 목이 텁텁했고, 빈 공간을 메운 가스가 불쾌하게 배출되었다.
공복 상태라 예민했고 얼른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싶었으나, 수검 결과를 듣고 집에 가야만 했다.
다행히, 스트레스 많은 현대인이라면 있을 수 있는 위장의 미약한 염증 소견을 제외하곤
대장은 용종 없이 깨끗하다고 했다.
5년 뒤에도 부디 건강에 이상 없이, 잘 넘어갈 수 있기를...
그 땐 딸도 성장해서 내가 잠시 화장실행으로 자리 비우더라도 꺼이꺼이 울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