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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박 May 10. 2024

75세 이상이면 선택 가능

영화 <플랜 75>

영화 <플랜 75>

정희진 강좌 <어떤 나이 듦>



어느 날 정부에서 <플랜 75> 정책을 발표한다. 75세 이상이 된 노인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죽음을 원하는 사람에겐 100만 원의 지원금과 상담이 제공된다. 상담의 목적은 불안한 노인의 호소를 들어주되 선택을 철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노인 안락사 사업은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재정흑자가 수조 원에 이르게 된다. 이에 힘입은 정부는 <플랜 65>를 시행할 계획이다.

일본 영화 <플랜 75>의 내용이다. 도입부를 빼고 영화는 시종일관 조용하고 담담하게 진행된다. 그래서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무위키 펌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서 정희진 작가를 초빙해 '나이 듦'이라는 주제로 강좌를 열었다. 그녀는 영화 <플랜 75>를 중심으로 강연을 했다. 청중들에게 영화를 본 소감을 물었다. 끔찍했다. 리얼했다. 불편했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여러 얘기가 나왔는데 정작 나는 말을 못 했다. 정리 안 된 여러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떠돌았다. 정희진은 심플하게 영화를 정리했다. 죽음을 '선택' 했다고 말하지만 '학살'이다. 그 '선택'은 사회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노인만 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나왔던 노인혐오 범죄 가해자가 말했듯이 세금만 축내고 쓸모없는 노인들을 사라지는 게 도와주는 것. 그것을 국가가 피를 안 보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누가 노인이라 불리나. 워렌 버핏, 빌 게이츠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노인이라 말하지 않는다. 능력 있는 투자자, 사업가라고 한다. 노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돈 없고 힘없는 늙은이다. 그래서 노인, 늙은이는 차별을 담은 언어다. <플랜 75>와 같은 정책은 노인이라 불리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풍족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하지 않을 선택이고 열악한 환경의 노인은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이 아닌 '선택의 여지없음'이다. 국가가 앞장서서 말한다. 바로 너! 75세 넘은 쓸모없는 늙은이! 비참하게 사느니 깔끔하게 죽여줄게. 쓸모없는 65세! 쓸모없는 장애인! 쓸모없는 중증환자! 쓸모없는...     


강좌 홍보물



인간이 쓰레기처럼 청소되는 상황을 지켜보는 젊은이들은 어떨까. 그들의  미래는 행복할까. <플랜 75>에 나오는 젊은 여성 상담원은 죽음을 신청한 여성과 정서적 교감을 나눈다. 회사에서 금지된 일이지만 여성과 함께 볼링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그녀는 죽음에 개입하고 싶어 한다. 늦어버렸지만.     

나는 감독의 메시지를 이해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치를 생산력, 자본력에만 방점을 두는 냉혹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을 것이다. 정희진이 말한 것처럼 선택이 아닌 일방적 학살이 맞다.


그런데 내가 영화에 꽂힌 부분은 따로 있다. 안락사를 진행하는 장면이다. 너무나 간단하다. 구토 방지용 알약 하나를 먹고 침대에 누우면 호흡기를 달아주고 연결된 줄에서 가스가 나온다. 잠들면서 죽는다. 죽음이 저렇게나 단순하다는 게 엄청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위험한 생각인가.

존엄한 삶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죽음보다 못한 삶의 고통을 그만 겪고 싶을 때, 스위스까지 돈 들여 날아가지 않고 자신의 익숙한 공간에서 원하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헤어짐을 위한 작은 의식과 함께. 고통 없이 자는 듯 죽는 것. 모두가 기대하는 마지막 모습 아닌가.


대장암이었다가 폐로 전이되어 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집에서 병간호를 받았다. 엄마가 간병을 했고 호스피스 의사와 간호사가 집으로 왔다. 의사는 마약성 진통제 처방전을 내게 주며 어떤 약국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줬다. 갈수록 강력한 진통제가 필요했다. 마지막 진통제는 아버지를 바로 혼수상태에 빠뜨렸다. 새벽에 잠깐 정신이 돌아와 엄마와 눈을 마주치며 몇 마디 했다고 한다. 옆 방에서 자고 있었던 자식들은 임종을 보지 못했다. 나는 고통스러웠고 억울했다. 아버지는 평생 힘들게 살았는데 말년에 상은커녕 질병과 통증으로 괴로워했다. 죽음이라도 좀 쉬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스위스에는 있고 여기에는 없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상념이 계속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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