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치즈코의 죽음에 대한 통찰을 배우다 1
나는 한동안 떠벌이고 다녔다. 인간은 삶의 자기결정권이 있으므로 죽음에도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얼마 전에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진행한 영화토론 시간에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영화 토론은 일본 영화 <플랜 75>에 대한 것이었다. 75세 이상인 노인들에게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다고 국가가 홍보하고 선택한 노인들을 안락사시킨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나는 영화에서 감독의 메시지를 읽었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국가가 교묘한 술책으로 죽음을 선택하게 하지만 그것은 안락사를 빙자한 학살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죽음을 선택하는 노인들은 모두 막다른 삶의 골목에 몰린 사람들이고 죽음 외에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자들인 것이다.
감독의 메시지와는 별도로 나는 영화에서 나온 안락사의 방식에 매료되었다. 죽음을 선택한 노인들이 큰 병동에 있는 침대에 안내받아 누운 채로 마스크를 쓰면 가스가 나오고 자는 듯이 죽는다. 자는 듯이 조용하게. 그 죽음이 너무나 깔끔하고 간단해 보여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시체를 쓰레기처럼 다루는 것까지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암투병으로 죽기까지 고통스러웠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마지막이 좀 쉬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토론 중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떠냐고. 나는 죽음의 자기 결정권이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소위 말하는 존엄사도, 연명치료 거부도 죽음의 자기결정권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동안 자기결정권이 인간의 고유한 권리임을 강조하면서 그 연장선인 죽음에는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생의 마지막을 내가 선택한 장소에서 자는 듯이 죽을 수 있다면 삶의 무게가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우에노 치즈코의 책에서 '죽음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당연히 그녀라면 죽음에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라 기대했다. 도쿄대 사회학 교수이자 강성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치즈코. 생의 모든 기간에 걸쳐 '당사자주권'을 주창하는 그녀이니 생의 마지막인 죽음에도 당사자주권이 있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타인에게 맡기는 죽음에서 자신이 결정하는 죽음으로!'라고 부르짖으면서.
아니었다. 놀랍게 그녀는 반대였다. 그녀는 인간이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다고 했다.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선 오만이라고 말했다. 마치 종교인처럼. 그러나 그녀는 종교인이 아니다. 사회학자인 그녀는 내세에 구원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 세상의 일은 이 세상에서 해결하자고 실천의지를 다지는 행동가이다. 그런 그녀가 존엄사협회의 활동에 우려를 표한다. 난치병 전문의 나카지마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
"살 가치가 없는 생명에게 좋은 죽음을 부여한다고 정당화하는 것이 '안락사'이며 존엄사와 안락사는 이어져 있다."
여기서 안락사와 존엄사를 정리하자면, 안락사는 적극적인 의료개입을 말하고 존엄사는 자연사에 방해되는 무의미한 의료개입을 막는다. 그러니까 존엄사는 최대한 자연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나카지마는 안락사와 존엄사가 한 끗 차이라고 말한다.
자기결정이라고 말하지만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혼자서 생각해 결정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나카지마의 말을 빌려서 하는 우에노 치즈코의 우려에 공감을 하면서도 내 마음에는 저항이 남아 있었다. 책의 내용을 반추하면서 왜 죽음의 자기결정권이 안된다는 거지? 계속 생각했다. 그러다가 엊그제 친구모임에서, 한국의 고령화 문제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한 친구가 말한 것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도 안락사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마치 안락사가 해결책인 양 말하는 그의 말에 약간 겁이 났다. 안락사를 너무 쉽게 얘기하고 있었다. 우에노 치즈코가 우려했던 많은 상황이 번뜩이며 이해가 되었다. 존엄사를 빙자한 무책임한 안락사부터 죽음과 관련된 수많은 이해관계들. 함부로 처리되는 소수자들의 삶과 죽음, 쉽게 낙인 되고 방치되는 ‘쓸모없는 삶’ 등등.
그래서 내 결론은, 인간은 삶의 자기결정권이 있으나 죽음의 자기결정권은 없다는 우에노 치즈코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존엄한 죽음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존엄한 생을 운운하자고 하는 그녀. 우에노 치즈코의 죽음에 대한 통찰에 깊은 존경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