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칸소 - Hot Springs National Park
나는 무언가에 빠지면 그것에 아주 심취하는 스타일이다. 한평생 시티걸만이 해답이라 생각했던 나였는데, 조지아와 알래스카 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나서는 무척이나 자연에 심취하게 되었다. 특히 7월, 알래스카 Denali National Park에서 일주일간의 하이킹은 정말로 감동적이었다. 그 경험을 통해 혼자 등산을 해보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행의 목표는 웨스트버지니아에 사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었지만, 여정 중 4개의 국립공원을 방문하는 것도 내 계획 중 하나였다.
등산은 꼭두새벽부터 가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이기는 하다. 일찍 출발하면 덜 덥고, 덜 타니까. 나는 휴스턴에서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와 몇 번 다녀온 적이 있는데, 항상 아침 5시에 출발했다. 친구가 아침 5시에 나를 픽업하면, 나는 그 시간까지 작업을 하다가 차에 탑승하자마자 딥슬립 모드로 직행하곤 했다. 등산로에 도착할 때까지 자는 그런 민폐 조수 역할이었다. (미안하다…) 그 경험을 통해 배운 건 있었기에 전날 밤, 큰 꿈을 갖고 아침 7시로 알람 설정을 했다. 밤에 알람 설정을 하며 큰 꿈을 품는 나와, 아침의 알람 소리에 깨어 나는 나는 마치 '지킬과 하이드'처럼 완전히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7시의 알람소리에 든 생각은 오로지 하나, ‘지금 일어나서 뭔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알람을 완전히 꺼버린 채 푹 더 잠을 자기로 했다. 전날 밤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지, 9시 반쯤 눈을 떴다. 혼자 하이킹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프로 등산러 친구의 도움을 받아 철저한 준비를 한 상태였다.
등산에 가기 전, 친구의 조언에 따라 AllTrails (https://www.alltrails.com/) 앱을 다운로드했다. 미국의 대부분 등산로는 핸드폰 신호가 잡히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에, 꼭 등산 전에 지도를 미리 다운로드하는 것이 안전하다. 등산로에 도착하기 전에 사슴을 만났는데, '아, 자연으로 돌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인 코스프레) 나의 첫 등산은 Goat Rock Trail이었다. 그다지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고도가 높은 지점이 많아서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혼자 등산을 하다 보면 별 생각이 다 든다. 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 하는 농담 같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전 남자친구는 잘 지내나, 얘는 내가 자기 때문에 자연인 코스프레까지 하게 된 걸 아나 하다가 또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기도 하고. 그래 그런들 뭐가 달라지겠냐, 너라도 행복하길 바란다 하며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다가, '아 나 곡 언제 쓰지?'... 마감일 걱정도 하고.
누군가와 함께 등산을 하게 되면 안 힘들어도 같이 쉬어야 하고, 너무 힘들어도 쉬지 않고 따라 올라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혼자 등산을 하다 보니 내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게 좋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경쟁심이 강했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밤을 새우고 밥을 굶어서라도 남들보다 더 잘 해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왔다. 특히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몸 담고 있는 음악 학교, 음악 세계에서는 지속적으로 남들의 비판, 비교를 받게 되는데, 이런 건강하지 못한 환경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나는 (남들에게는 드러내지 않을 때가 많지만) 스스로에게 극도로 엄격하게 평가하고, 질문하며, 끊임없이 나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 상대를 찾을 때에는 엄격한 기준이 없었다. 특히나 나의 눈물 콧물 다 뺀 전 남자친구는 나의 최측근 모두가 열을 올려 말렸는데 (미안합니다 여러분), 20대 중반에 불같이 만나고 헤어진 후, 언제나 미련이 남았던 그였기 때문에, 눈막 귀 막을 시전, 우리는 둘 다 30대가 되어 (지옥) 불 같은 연애를 시작했다.
스스로에게는 혹독한 나였지만, 그에게는 나 스스로의 상상을 초월한 인내심과 참을성을 준 것 같다. (물론 그에게는 충분하지 않았겠지만.) 우리가 정말 헤어진 올해의 봄, 다시는 연락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맞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시 돌아가면 가족들과 친구들도 나를 더 이상 살려두지 않으리라 말했으니… 한동안 정말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마음대로 안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그렇게 딱 맞을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여서 눈물만 펑펑 날 때에는 아이폰 노트를 켜서 보내지 않을 문자, 편지를 그렇게 써댔다.
초여름, 나와 상담사는 내 핸드폰에 쌓여있던 보내지 않은 문자와 편지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상담사는 내가 전 남자친구에게만이 아닌 나 자신에게 편지를 쓸 때가 언제일지 물어보았다. 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아직도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던 사람에게 온 마음을 쏟아부으며 내가 아는 모든 아름다운 말을 써 왔지만, 내 평생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편지를 써 준 적은 없었다. 이 시점 이후, 나 자신에게 더 따뜻한 말을 건네고 더욱 자신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와 지출 측면에서는 나 자신에게 아주 관대한 편이지만, (맥시멀리스트의 끝, 이건 반성합니다.)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지 못한 때가 많았다. 이번 로드트립 중 등산을 하면서 후회와 자책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관용과 인내심을 늘여가려고 노력했다. 힘들면 쉬고,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 집으로 돌아가도 되고, 더 멀리 가고 싶으면 준비했던 계획에 나를 제한하지 않았다.
등산 후, Hot Springs National Park는 말 그대로 온천국립공원 이기 때문에 온천을 가 보기로 했다. 미국 남부 여행 중에는 노예 해방 전의 역사를 많이 접할 수 있다. 이곳 역시 그때 당시 노예 노동에 의존한 곳 중 하나였다고 한다. 나는 목욕탕, 스파, 온천을 무척이나 좋아하여 (노는 게 제일 좋아) 전 세계의 다양한 온천을 경험해 봤다. 하지만 Hot Springs National Park에서의 경험은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을 가진 온천이었다.
내가 방문 한 곳은 는 Buckstaff Bathhouse였으며, (https://www.buckstaffbaths.com/services) 미네랄 온천뿐만 아니라 까끌까끌한 스펀지 서비스인 "loofah"와 20분의 전통적인 마사지가 포함된 traditional bathing package를 구매했다. 개인 욕조에서의 목욕에서 시작, 뜨거운 핫 타월 랩, 특이한 통에서의 스팀 찜질, 그리고 세숫대야와 같은 곳에서의 엉덩이만 담그는 반(?)신욕까지, 모두 아주 타이트한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안 그래도 더운 아칸소에서 한 시간가량 뜨거운 물과 스팀 속에서 거의 찌는듯한 온천을 즐겼더니, 정말로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20분 동안의 마사지를 받으며 거의 실신 가까이로 낮잠을 잤다. 행복 그 자체. 30대가 되고 나서 좋은 점 중 하나는 가끔씩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아무 생각 없이 살던 20대 초반, 지독하게 힘들었고 열심히 일했던 20대 중후반을 거쳐 나 스스로 벌어 선물하는 이런 호사는 무엇보다도 달콤하다.
어제 Hot Springs National Park로 들어오면서 봤던 호수를 다시 보고 싶었다. 지도 검색을 통해 Lake Catherine State Park를 찾아 출발, 그곳에서 또 두 시간가량 등산을 했다. 2마일이 조금 넘는 구간이었는데, 중간지점에 있는 작은 폭포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을 할 거라고 계획하고 온 건 아니어서 나의 프로등산러 템 (뭐가 됐든 인생은 템빨!)을 착용하지 않고 왔는데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완주할 수 있는 등산로였다. 폭포에는 나 밖에 없었고 너무 풍경이 예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혼자 여행을 하게 되면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많다. 핸드폰을 바위틈에 세워 놓고 타이머를 이용해서 마음에 들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전 남자친구는 풍경사진은 공들여서 작품사진 마냥 잘 찍으면서 내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정말 스스로 현타가 올만큼 사진을 못생기게 찍어줬다. 그럴 때 나는 ‘니 눈에는 내가 이렇게 보이냐’며 묻곤 했는데, 돌 몇 개와 나의 콜라보로 건진 인생샷을 보고 나니 이 모든 연애가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밥, 혼자여행… 우리는 혼자 하는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이보다 더 편할 수가 없다.
특히 내가 하는 작곡가의 일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또 혼자 여행하는 기회가 많은데 가끔 주변에서는 외롭지 않냐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답은 "yes and no". 외로울 때도 있다. 특히 큰 공연을 마치고 호텔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런 순간이 종종 있다. (매번 그런건 아니다.) 공연 전후의 긴장과 초조함, 공연이 끝난 후의 박수와 환호 소리를 떠나 호텔 방에 혼자 남겨져 공허함을 느낄 때는 정말로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힘든 것은 누구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들 때이다.
지난 1월, 세인트루이스에서 아주 큰 공연을 하게 될 기회가 찾아왔다. 서로 스케줄을 조정하여, 1월 둘째 주에는 뉴욕에서 공연이 있던 전 남자친구를 보러 내가 갔고, 그 이후에 함께 세인트루이스로 가는 일정을 마련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의 시간은 무척이나 스트레스가 많았다. 뉴욕에서 보낸 그전 주가 너무 추웠고 힘들었으며,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하여 진행한 첫 리허설은 원활하지 못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응원해 주는 치어리더 같은 존재가 필요한 나인데, 비관주의 레벨 최상치 전 남자친구는 벌써 불붙은 나의 상황에 기름을 콸콸 부어댔다. 그때 생각했다. 아 차라리 그냥 혼자 올걸. 혼자 왔어도 힘들긴 했겠지만, 개인 시간을 통해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리허설 스케줄과 멘털 관리뿐만 아니라 그의 연습 장소 섭외, 스케줄 조정, 기분 맞춰주기 등 나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선 일들에 힘을 쏟고 있었고, 울고 싶어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울면 왜 우냐고 물어볼 테고, 그러면 또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하면 싸울게 뻔하고.
세인트루이스에서 연주된 곡은 2020년 겨울에 작업을 시작하여 2021년 봄에 마감한 현악 사중주였다. 이 현악 사중주는 "Burning" (https://youtu.be/GID9_ehTBps?si=3Y6-4qXxBUdy9AHV)이라는 제목을 가진 곡으로, 2020년 겨울에 그와 함께 보낸 며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우리는 참 말도 안 되는, 설명 불가의 지옥불맛 사랑을 했다. 특히, 2020년의 겨울은 아직까지도 인상 깊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순간으로, 그때의 감정과 경험이 이 곡을 탄생시켰다. 그와의 시간을 배경으로 쓰인 수많은 곡 중에서도 "Burning"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곡 중 하나이다.
그와 다시 만난 겨울 그날, 호텔방 창문을 통해 아주 먼 거리에서 벌어진 거대한 사막의 산불을 목겼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꽃은 너무나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 불꽃이 씨앗이 되어, 이후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에서 느꼈던 다양한 "Burning"의 느낌에 대한 곡을 쓰게 되었다. 우리는 둘 다 장난기가 다분하여 함께 있으면 유치한 짓을 아주 많이 하곤 했다. 타코벨에서 한 주먹 가득한 핫소스를 갖고 장난치다 받은 "Burning"의 느낌, 다시 언제 볼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작별의 순간에서 느낀 "burning",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burning"을 담아 이 곡을 작곡했다.
그런 곡을 그에게 이렇게 큰 콘서트에서 들려주게 된 것이 나에게는 아주 상징적이었다. 연주가 끝난 후 그의 반응은 언제 와 다를 바 없이 미지근했다. 리허설 후 내가 불평했던 것처럼 연주자들이 잘 못한 것 같다는 씁쓸한 코멘트를 받았는데, 원래도 큰 공연 후 허무함을 느끼는 나에게 이 코멘트는 정말 지옥과 같았다. 혼자 있으면서 느끼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느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혼자 여행하며 느끼는 외로움은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바쁜 일상에 치이고 사람들에 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외로움이 뭔지도 느낄 새가 없는 순간이 오곤 한다. 이렇게 혼자 있어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드문지 모른다. 버킨스톡 슬리퍼를 신고 한 2시간의 등산 후 (엄마한테 말하면 등짝 스매싱 각) 다시 Hot Springs National Park 동네로 돌아가서 온천수로 만든 맥주가 유명한 브루어리에 들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친구 삼아 엄청 시원한 맥주와 햄버거를 저녁으로 먹었다. 저녁을 먹고는 예쁜 석양을 쫓아 오전에 하이킹했던 산의 반대편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잔디 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이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나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달았다. 너무 깜깜해지기 전에 에어비엔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