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와 파리가 들끓는 지하실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늙은 압축공 햔타. 매일같이 온갖 종이와 책이 쏟아지는 공간에서 귀한 책들을 발견해 집안에 쌓기를 35년쯤 하다 보니, 그는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되어있었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을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_10p
밀려드는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책의 등짝이 빛을 뿜어낼 때도 있다. 공장 지대를 흐르는 혼탁한 강물 속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물고기 같달까. 나는 부신 눈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그 책을 건져 앞치마로 닦는다. _14p
내 손 밑에서,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_12p
반복되는 작업이 권태로울 만도 한데 한탸는 오히려 책을 파괴하는 모순을 즐긴다. 죽는 날까지 함께 할 압축기와의 미래를 상상하며 사색에 잠긴다. 거대한 신식 압축기를 대면하고 한탸의 평화로운 삶은 전환점을 맞는다.
역설적인 제목, 강렬한 첫 문장, 냉소적인 문체. 130페이지 남짓한 얇은 분량이지만 한 호흡에 담기 버거운 작품이다. 주인공 햔타가 찍어 낸 폐지 더미처럼 문장의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재미있고 직관적인 이야기는 완독 하기엔 좋지만 기존 사고방식에 의문점을 제시하지 못한다. 다독이 필요한 이야기일수록 깊은 사유를 요구하기에 페이지를 넘길수록 카테고리가 확장된다.
주어진 일에 묵묵히 시간을 쏟고 나름의 사명감과 행복을 추구하며 타인에게 인정받기보단 내면을 채우는 과정에 만족을 느끼는 햔타. 구식이 되어버린 압축기와 불필요한 책 더미. 변화하는 시대에 편승하지 못한 노동자. 그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_85p
'프라하의 봄'을 겪는 동안 많은 체코의 예술가들이 프랑스로 망명한데 반해 작가 보후밀 흐라발은 자신의 책을 생의 거의 마지막 시기까지 금서로 지정했던 고국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건 시시포스가 받은 영원의 형벌처럼 바위를 굴리는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연민과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비극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일은 보편적 경험일지도 모른다. 뉴스 속 매일 갱신되는 확진자 수와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실존이 위협받는 것은 주인공 햔타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시간은 천천히 죽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간다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현실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살아간다. 책의 제목처럼 역설적인 이야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삽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_9p
햔타의 독백은 책을 찾고 또 찾는 나의 유랑하는 마음과 닮아있었다. 책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책의 물성에 왜 끌리는지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저 읽고 쓰는 일이 좋을 뿐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처럼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마저도 책에 바치는 온전한 '러브 스토리'이지 않은가. 어떤 이유에서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햔타의 마음을 십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너> 와 <변신>도 함께 읽기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