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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와케이크 Nov 29. 2021

증오의 시대

  혹자는 지금 이 시대를 '증오의 시대'라고 불렀다, 매체의 발달로 인해 정보의 밀물이 밀어닥치는 이 시대에선 인터넷을 조금만 탐방하고 다녀도, 금세 증오를 부추기는 자극적인 글과 영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가히 통찰력 있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쩌다가 사람들이 이렇게 조금의 트리거만 당겨줘도 끝없이 분노하는 광전사들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빌어먹을 코로나

 불과 1년전만 해도 우리는 회복이라는 단어를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TV에서는 연신 코로나로 인한 비보만을 전해왔고, 도로는 핵폭격후의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킬만큼 한산했었으며, 마스크 위로 떠오른 사람들의 눈가 전반에는 우울감만이 다크서클처럼 깊게 깔려 있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절제된 시민의식을 발휘하여 최악의 사태를 막아내면서 이 모든 아픔들을 상처위의 딱지처럼 그저 가려운 것으로 가라앉혔지만, 그 당시의 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입힌 상처는 그 아픔과 내상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통렬했었다.

 코로나로 인한 생활고와, 그 아픔조차 공유하지 못하게 하는 거리두기의 고립감은 지난 1년간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공격하며 그 상처의 균열을 벌려놓았다. 사람의 회복력이란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었지만, 코로나 블루(코로나 우울증)라는 신조어는 그 회복력이 상처로 남은 흉터까지 아물게 할 만큼 기적적이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반증과도 같았다. 누군가는 회복하지 못했고, 누군가는 위드 코로나라는 종전 선언이 우스울 정도로 많은 것을 잃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학, 부양해야될 가족에 대한 죄책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 등으로 인해 심리가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은 두개. 합리화하거나 아니면 이 모든 분노를 받아낼 대속자를 찾는 것이었다.


계산하는 사람들

 이 세상에 수포자는 많지만, 이익 계산을 못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가 특별히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모두들 주판 굴리며 계산하는 솜씨는 배운듯 능숙하게 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이번처럼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될까, 주판을 굴리는 손이 바빠질 것이다. 행복의 최솟값을 위해, 인생에서 '굳이' 필요해보이지 않는 것들은 하나씩 과감하게 버려나갈 것이다. 

 처음엔 아이를 포기했다. 들어가는 지출도 만만치 않거니와, 가정을 이루는 최소단위에 아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두 명이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이젠 결혼도 포기한다. 결혼이 꼭 필요하다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결혼으로 인한 자유의 구속이 난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난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결혼도 포기한다. 그러다 이제는 연애마저도 포기한다. 연애에 들어가는 돈과 감정 노동이 얼마나 심한데, 이익 계산엔 연애조차 심각한 지출이라고 판단되어 연애도 포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판을 굴리는 손을 멈출 수 없다, 바깥상황이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직도 행복의 최솟값을 위해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눈물을 머금고 하나씩 하나씩 버려나간다. 내 집 마련도 포기하고, 인간관계 마저 좌절되며, 꿈이라는 단어는 이젠 새삼스럽다 못해 우스울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인 취업마저 좌절되면 주판을 굴리는 손은 마침내 과부화 된다. 다 버리고 다 포기했는데도, 최소한조차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계산을 마치지 못한 주판만이 덩그러니 놓였을 때 자신이 버린 것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자신과 배우자를 닮은 귀여운 아기를 낳아서 오순도순 사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 단어와 장소에 깃든 오랜 친구와의 인연, 술을 그렇게 퍼마셔도 멀쩡했던 튼튼한 내 몸. 이 사람들은 너무 똑똑했기 때문에, 계산에 너무 능숙했기 때문에, 계산을 통하지 않으면 절대로 행복을 도출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풀 수 없는 정답을 남기고 실패자라는 낙인을 붙이는 대신, 합리화를 선택했다. 난 그런건 원래 원치 않았다고, 그런건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고 스스로를 보호한다.

"난 결혼 같은 건 질색이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 연애같은건 원한 적 없다. 인간관계 같은건 다 똑같다. 잘 보일 사람이 없으니, 꾸미지도 않겠다, 건강관리도 안하고 그냥 일찍 죽어버리겠다."

그러다 합리화 과정중에 감정이 너무 크게 실렸다, 닿지 않는 포도를 향해 시었다, 부패했다고 말하다보니 마음속에서 없던 미움마저 생겼다. 그렇게 남녀 갈등, 세대 갈등이 생겼다.


 사실은 갖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데, 어차피 손에 들어오지 않는 거라면, 그걸 싫어할 구실이 필요했던 것뿐이야.

-내 마음의 위험한 녀석 중-



불신을 파는 사람들

  유명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선 독재 사회가 시민들을 어떻게 통제하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선 발전된 기술속에서 독재자가 '텔레스크린'이라 불리는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텔레비전을 길가의 도로와 가정 곳곳에 설치해놓고, 시민들을 철저히 감시하면서 반동분자와 반동의 싹이 보이는 이들을 모두 쥐도새도 모르게 납치하여 제거하거나, 끔찍한 고문을 통해 철저히 세뇌시켰다. 

 이렇게 생각과 표현이 모두 통제당해, 감정이 억압당해있는 시민들은 국가에서 하루에 딱 2분간 허용하는 '증오시간'을 통해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낼수 있었다. 당의 반역자인 골드스타인을 향해 강제로 욕지거리를 하는 다소 이상한 행사를 치르면서 당원들은 억눌려 있던 부정적인 감정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당의 적과 반대 세력에 대한 증오를 자연스레 학습할 수 있었다. 증오가 사람들의 통제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았다. 너무 큰 상처를 입어서 시간마저도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것 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들 앞에 갑자기 장사꾼이 나타났다. 그 사람들은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거짓 위로, 가짜 공감을 건네며 그들의 아픔을 자극했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르켰다.

"저 녀석이야. 저 녀석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된거야"

"와, 쟤좀 봐 어떻게 저런 말과 행동을 할 수가 있냐, 넌 왜 지금까지 착하게 살았어? 저런 사람도 있는데."

 마침 해소될 길 없어 보이는 좌절을 삭히고 있던 그들에게 장사꾼은 한껏 부추기는 말을 하며 친절하게 분노할 대상을 가르켜주었다. 궁지에 몰려 판단력이 흐트러진 그들의 시선 속에는 장사꾼이 손가락으로 가르킨 대속자의 모습이 어느새 자기 불행의 원인이자 모든 일의 원흉처럼 보였다.

 그들은 인내심있게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렸다. 분노는 파괴적이면서 전염성까지 띄고 있어, 분노하는 사람 주변에게까지 그 열기를 퍼트리곤 했다. 그러면서 이 사태와 아무 관계없던 이들까지 이 광기의 현장에 엮여들어 같이 분노하게 됐다. 분노의 대상은 참으로 다양했다. 정치, 종교, 성별, 세대, 취향, 등등 그룹화 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적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장사꾼들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날 믿어줘"

 장사꾼들은 사람들에게서 모든 형태의 이익(돈, 조회수, 권력)등 을 받아먹었고, 사람들은 그 댓가로 장사꾼에게서 증오거리를 받아서 감정을 해소시켰다. 하지만 분노로 감정을 뜨겁게 불태우고 난 뒤엔, 언제나 공허한 냉각이 찾아왔고, 가슴속엔 타고 남은 부산물들만이 계속해서 쌓여갔다. 정제되지 않는 분노가 마음속에 평화를 줄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거짓위로와 거짓공감으로 인한 상술이 들통나기 전에 장사꾼은들은 발빠르게 새로운 장작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제공하고, 그들은 냉각으로 인한 깨달음과 현자타임을 겪기 전에 또다른 장작으로 인해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분노가 굴레처럼 돌아가는, 참으로 증오의 시대였다.


끝으로

 이 시대를 증오의 시대라 부르며 혀를 차는 사람들도 사실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이 글이 또 다른 형태의 증오를 부추기게 될까, 아니면 결말부분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해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뜬구름 잡는 글이 될까 싶어 많은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이 얘기는 하고 싶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대안 없는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불신을 파는 장사꾼일 확률이 높다. 목소리 높은 사람들이 큰소리 외쳐 떠든다 한들 그들의 의견이 다수를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치 자신의 의견이 다수인듯, 상술을 펼치는 것이다. 그들이 좌클릭을 하지 않고는 못배길 자극적인 썸네일과 헤드라인을 적어도, 우리는 그것에서 눈돌릴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엔 정말 아름다운 것들이 많으니까요." 하는 얘기는 아니고 최소한 그들의 상술에는 당하지 말자는 의미이다. 우리가 증오에 부추김 당하여 사회보편적으로 허용되는 발언의 범위를 넘어서고,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들은 결코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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