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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와케이크 Nov 07. 2023

약속 좀 지키라고, 제발!

이럴거면 왜 약속을 잡냐.

첫번째


 다소 최근의 일이었다.


 동네 친구가 나와 친구 한명을 더 끼어서 오랜만에 셋이서 밥이나 한 끼 하자며 연락이 왔다. 친구 말 마따나 셋이서 보는게 오랜만이기도 했고 그 친구가 우리를 부르면서 할 말이 있다고도 말했기 때문에, 나는 도대체 어떤 중대발표를 듣게 되는 걸까 싶어 괜스레 긴장하는 마음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약속 당일, 나는 약속 장소인 지하철 역으로 가고 있을 무렵 약속을 잡은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친구는 전화기 너머로도 다급함이 한껏 묻어나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혹시 지금 오고 있나?"
"어, 이미 절반 정도 왔는데"


내 얘기를 들은 친구는 분명 얼굴이 보이지 않는 통화였음에도, 난색을 표하는게 얼굴이 보이는 것 같은 말투로 내게 말했다.


"사실 오늘 다른 사람이랑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하고 있었어, 걔(다른 친구)랑 둘이서 보면 안될까?"


 약속시간 대략 20-30분 전에 들은 이야기였다. 그 친구가 다급히 전화를 건 것도 내가 아직 집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나는 늘 약속시간에 이르게 도착하려고 했어서 친구도 그걸 알고 내게 먼저 전화를 했다고 했다.


 그 친구가 가까운 친구 중 한명이기도 했고 그리 큰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그 친구가 되게 미안해해서 별로 화가 나질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날 이유를 많이 갖다대도, 내가 화가 안난다고 하면 무슨 이유가 타당하겠는가? 나는 오히려 친구가 우리에게 말할 수 도 있었던 그 중대발표(?) 듣지 못한 것을 아쉬워 했다.


그 친구가 말하려했던게 사실 별 거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좀 뒤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두번째


올해 가장 길었던 추석 연휴를 앞둔 날이었다.같이 밴드를 하던 동생이 밴드 팀원들에게 이번 연휴 토요일에 같이 찜질방에나 가자며 들뜬채로 말했다.


 나는 뜬금없이 무슨 찜질방 타령일까, 하면서도 나도 찜질방이 오랜만이라 궁금하기도 했고 그 친구가 마치 처음 소풍가는 꼬꼬마 마냥 몹시 설레어하고 기대하고 있는 듯이 말을 해서, 나는 마땅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토요일 시간을 빼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 당일 날이 올때까지도 누구하나 약속시간이나 약속 장소에 대한 말을 하나도 꺼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이상해서 '그래서 찜질방 가는 건 어떻게 된건데.' 하고 단톡방에 물었더니 찜질방가자고 했던 친구에게서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글쎄요'


 난 이 말을 해석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대체 이 글쎄요, 라는 말은 무슨 뜻으로 한 것이었을까? 일단 저 말 그대로 정말 몰라서 한 은 아니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찜질방에 가자고 했던 장본인이 약속시간과 약속 장소 몰라서 저런 말을 할리는 없을 테니까. 그러면 저건 일종의 도발이나 선전포고 같은 것으로 해석해야할까, 나로썬 도저히 저 말의 진의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다음 합주때가 오면 그 친구에게 따져 묻기로 했었다.


 그 날 가족들은 분명 토요일 날 약속이 있어서 나갈거라고 했던 내가 안 나가고 집에 있으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약속을 잡은 얘가 약속 시간과 장소를 몰라서 갈 수가 없었다는 얘기를 내 입으로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약속이 파토가 났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나도 이게 뭔 얘기인지 모르겠는데 가족들이라고 알까.


합주 날, 나는 그 친구에게 그 날 파토낸 약속과, 그 논란의 '글쎄요' 라는 답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 저는 아무도 약속 시간하고 약속 장소를 이야기를 안하시길래, 그냥 안가는가보다 하고.."


나는 그 얘기를 듣자,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착잡하고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여러 질문과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문이 막힌 지경이었다.


그때 나의 심정(만화:귀멸의 칼날 중)

나는 심한 말이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그 친구에게 반문했다.


"그.. 약속을 잡은 사람이 누구지?"
"저요."
"찜질방에 가고 싶어서 같이 가자고 했던 사람은 누구고?"
"저요"
"그럼 누가 약속시간 하고 장소를 정해야 할까?"
"아하!"



 그 친구는 내 산파법식 문답에서 깨달음은 얻은 듯, 손뼉을 짝하고 치며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 낼 의지를 모두 잃고 그저 따라 웃었다. 첫번째 이야기때보다 더 심한 일이었지만, 뭐 그때도 그랬듯이, 화가 안나면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 이런 일에도 화가 별로 안나는거 보니, 아무래도 내 머리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세번째


가장 최근의 일이었다. 나는 알고 지내던 누나에게 언제 한번 볼 수 있겠냐고 물었고 누나가 흔쾌히 수락하면서 우리는 9월 초에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 당일 날, 약속 시간 2시간 전을 앞둔 시각,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몸이 너무 안좋아서 오늘 약속을 못갈 것 같다고 말이다. 더불어 바로 다음 주가 면접이라 몸 관리를 해야할 것 같다는 첨언까지 덧붙였다. 나는 최근 앞선 사례들로 약속이 파토나는 것에 단련(?)이 되어있었어서 신경쓰지 말고 몸조심하라며, 면접 잘보라고 좋은 말로 넘겨주었다. 누나는 고맙다며, 다음 주 면접이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누나와의 약속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친구들과 회사 이야기를 하던 중, 면접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나는 대화를 복기하다가 면접이라는 단어에서 누나와의 약속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면접 날짜가 지나고도 연락이 없어서, 무슨일 있는 것 같은데 아마 알아서 연락하겠지, 하고 넘겼다가 나조차도 그 약속을 잊고 있던 것이었다.


 약속이 있었다는 걸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 나빠지긴 했다. 약속 날짜를 정한 것도 그 누나고, 약속 당일날 약속을 파토낸 것도 그 누나고, 다시 연락하겠다는 것도 말한 것도 그 누나였지만 이 약속이 한 달이나 밀렸다는 사실이 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조금 고민하긴 했다. 내가 무작정 아, 아 사람 나랑 약속 잡기 싫어서 잠수 탔구나. 라는 말을 하기 앞서, 혹시 연락도 못할 만큼 바쁜 일이 있었던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물론 내가 전에 썼던 브런치 글 중에서는, 인간관계에서 '바빴다'라는 말은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라는 요지의 글을 쓴 적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일단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 각자에게 자질구레한 사연이 있는 것과, 기억력이 안 좋은 것에 일일이 화를 내는건 너무 피곤한 일이니까 좋게좋게 연락을 해서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시켜주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가, 나도 이젠 약속이 별로 잡고 싶지 않아졌고 내가 파토낸 것도 아닌 약속에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싶어서 나는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어디 내가 가만히 있으면 언제까지 연락이 안오나,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누나의 연락이 다시 온 것은 내 생일 때였다. 정말 뜬금없다, 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정도로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연락을 너무 늦게 했네, 아무튼 생일 축하해~"


가감없이 딱 저렇게 톡이 왔다.


 난 이때는 정말 화가 났다. 처음 톡을 받고 화가나서 몇마디 쏘아붙일지, 당장에 차단을 박아서 내 눈에서 사라지게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했으니 말이다.


 내가 화가 났던 건, 최소한 사과 한마디 정도는 받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약속이 이렇게나 밀린 시점에서 연락이 다시 왔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의외이긴 했지만 그 사실이 누나를 당당하게 만들어 줄 근거는 절대 못 되었다. 앞서 말했듯, 본인이 정한 약속 날짜도 당일 어긴데다 면접이 끝나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조차 못 지킨 것이 현 상황이다. 사과를 했다한들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을테지만, 사과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였다. 'ㅎㅎ ㅈㅅ!'  정도 되는 사과조차 못 듣는게 이리 기분이 나쁠 줄은 몰랐다. 뭐가 그리 당당해서 그 머릿속에 사과할 생각조차 나질 않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생일 날 연락이 온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내 입장에선 누나의 연락이 본인이 연락하겠다 말했으니 하긴 해야하는데 마침 생일이니 겸사겸사 한번에 처리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던 것이다. 아니면 축하하는 메시지를 앞세워서 내가 화를 내지 못하게 한 것이던가. 하다못해 선물이라도 줬으면..!  나는 이 성의 없는 카톡을 두고 화 낼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그냥 고맙다고 톡 한 다음, 치워버렸다.  그 날 10년지기 친구와 절친한 누나에게서 선물을 받아 기분이 한껏 좋아진 상태가 아니였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심한 말로 따져 물었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냥 그 누나에게서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것으로 끝났고 그 이후론 더 이상 인간적인 교류를 이어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나는 약속시간엔 10~20분 이상 앞서 도착하는 습관이 있는데, 혹시라도 변수가 생겨서 늦을까봐 일찍 출발하기 때문이다. 가는 도중에도 왠만하면 빠르게 걷거나 뛰어가서 약속시간에 도착할때면 땀에 절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혹시라도 약속시간에 늦거나 약속을 못지킨 경우가 있으면 굉장한 불명예로 여겨서 몇 번이고 사과하려고 한다. 이것은 내가 성실하다거나 인격이 성숙해서가 절대 아니다. 그냥 예전부터 약속과 관련해서 데인적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시커먼 남정네들은 약속 시간 개념이 굉장히 뒤틀려 있어서 제 시간에 오는 경우가 잘 없고, 비단 가깝게 지내는 남정네들 뿐만 아니라, 꽤 친한 관계의 몇몇 사람들조차 약속에 대해서는 사소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꽤 있다. 분명 약속 시간과 장소는 있는데 기억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던지, 약속 당일날 잠수를 탄다던지, 늦게 나오거나 안 나와놓고선 되려 뻔뻔하게 나온다던지, 그런 모습들을 보면 정말 사람 꼴보기가 싫어진다는 걸 알게되어서 나는 최소한 일찍 나오려는 습관을 들이고 약속 전날엔 약속을 확인하려고 했다.


약속을 습관적으로 안 지키는 사람에게는 모순점이 있다. 본인이 함부로 못 대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저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단 그 사람들과의 약속은 잘 쓰지도 않는 캘린더까지 써가면서 칼 같이 지키려 하고 혹시나 못 지키는 일이 있으면 바닥에 엎어지면서 사과를 한다. 강약약강인 소인배의 전형이다.


 약속을 잡기 싫으면 거짓말을 하던가, 거짓말을 못하면 거절을 해야하는데 둘 다 못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은 되기 싫은 위선자이면서 거짓말 할 지능도 없는 사람인거고 그렇게 공수표를 던져서 약속을 잡아 놓고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본인이 내뱉은 말도 못지키는 무책임한 인간인 동시에 그런 약속조차 기억 못하는 사람은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이 의심되는 환자이니, 신속히 병원을 찾아가도록 하자.


 이런 얘기를 들으면 발끈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사연이 다 있고 시간이 바쁜데, 어떻게 일일이 기억을 다 하냐고 누구는 한가한 사람이냐고.


호오.. 그만큼 바쁘셨으니 오늘 인스타 릴스나 유튜브 쇼츠는 하나도 못보셨겠죠?


너무 바빠서 오늘 화장실 갈때도 핸드폰도 못 들고가셨겠죠?


대중교통 이용하실때도, 업무보고 하느라 핸드폰 못보셨겠죠?


퇴근하고 씻자마자 바로 주무셨겠죠?


그렇게나 바쁘시면 약속을 잡지 말아야 할텐데.. 그럼에도 모든 약속을 포용하려는 그 도량이 참으로 넓으십니다


그런데 뇌용량이 그 도량을 못따라가는 거 같은데.. 그 현관문 비밀번호하고 메신저 비밀번호는 기억하십니까?


본인 역량에 안 맞는 공수표는 막 던지지 맙시다.


아니면 애초에 약속 잡지를 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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