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쉰지가 1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나는 오랜만에 핸드폰으로 브런치 알림을 받게 되었다. 대게 브런치에서 오는 알림은 "님 왜 요즘 글 안씀? 빨리 뭐든 쓰셈." 라고 말하는 매크로성 알림에 불과했기에, 나는 늘 그렇듯 능숙한 한 손 놀림으로 알림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상단 배너를 열자 알림은 누군가 내 글에 라이키와 댓글을 남기고 구독까지 눌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알림을 보고 나는 한참동안 들어가지 않던 브런치를 들어갔으니, 브런치를 쉰지 시간이 좀 흐른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 내 글에 호를 표하고 관심을 주는 것을 기분 좋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먼지 쌓인 책장에 들어온 간만의 손님은, 내가 1년도 더 전에 썼던 인간관계와 관련된 글에 라이키와 댓글을 남겨 주셨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생각이 조금 바뀌기도 했고 현재라는 시점에서 과거를 보면, 늘 과거는 부족하고 미숙하게 보이기 마련이기에, 나는 1년 전에 쓴 그 글에 굉장한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분은 부족한 내 글에도 이런 댓글을 남겨 주셨다.
"제게 꼭 필요한 글이었어요"
나는 내 글을 보면서 '아아- 잊어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분은 이런 글에도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감사를 표해주셨다. 나는 그 댓글을 보고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어 했는지를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옛날부터 공상에 자주 빠져들곤 했다. 수업시간때나 잠들기 전이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나, 생각이 새어나갈 틈이 생기기만 하면, 내 의식은 현실을 떠나 온갖 즐거운 생각과 상상의 세계를 유영하곤 했다.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큰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하는 상상이 남들에게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 뿐. 그 후론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틈틈이 기록하고 다듬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니 글재주가 생겼고 그게 남들 눈에도 괜찮을 정도가 되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무리 떠올리고 포장시켜봐도 저게 전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글쓰기를 하며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글이 막힘없이 써질 때도 아니었고 글 쓸 주제가 생길 때도 아니었고 내가 봐도 유려한 문장이 만들어졌을 때도 아니었다. 그냥, 누군가가 내 글을 즐겁게 봐주었을 때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글을 잘 쓴다 라는 얘기를 들어도 그리 와닿지가 않았다. 글 재주라는 건 말투나 표현방식에 따라 개인차가 크고 각자의 스타일도 너무 달라서 객관적인 지표가 세워질 수 없는 영역이었다. 누군가 알아보는데 문제가 없다면, 글솜씨는 사실상 부가적인 기교다.
나는 그냥 누군가 내 글이 재밌다 라고 말할때가 좋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쓴 일기를 재밌고 보고 다음도 써달라고 했던 특이한 성씨의 군 동기를 기억한다. 독자의 즐거움은 작가의 보람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예술성이니 독창성이니 하는 평가들이 다 무슨소용인가? 전작의 사랑받던 주인공이 후속작에서 등장 한 시간만에 골프채에 맞아 죽어, 팬들이 크게 상심한다면 어떻게 그 작품이 예술적이라고 평가 받을 수 있는 건가? 예술성과 대중성은 결코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예술성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백성이 없는 나라에서 혼자 왕 노릇하는 망상병 환자일 뿐이다. 애정하는 사람이 생길때 창작자는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나는 주인장의 손길이 닿지 않아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내 브런치에도 찾아와주어 온기를 주고간 그 독자분을 보고, 왜 요즘엔 연재를 하지 않냐고, 나는 네 글말곤 다른 활자를 보지 않는다고 말한 친구의 타박을 듣고나서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 다시금 떠올렸고, 창작할 이유를 되찾았다.
관객이 아무리 적어도 단 한사람이라도 즐거워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광대는 마지막까지 춤을 추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