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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양 Apr 07. 2023

나를 만든 열일곱 시간

학업으로 고통받는 여린 청춘을 위한 작은 위로


“엄마, 나 대학 못 들어가면

엄마 딸 안 할 거야?”



연이어 미끄러지는 성적에 날로 우울감이 심해진 열일곱의 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얘기였는지 엄마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아니~ 무슨 소리야. 그까짓 대학 못 간다고 우리 딸이 왜 딸이 아냐?”


“그치만... 엄마도 공부 잘하는 딸 두고 싶잖아.”


“공부 잘하는 전교 1등 딸보다 난 우리 딸이 내 딸인 게 훨씬 좋은데? 두고 봐. 난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 인지 알고, 넌 틀림없이 멋지게 자라날 거야. 네 가치를 잘 아니까 엄만 항상 자랑스러워.”


“치, 거짓말. 엄마는 고슴도치야.”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어도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나를 위로하려 그저 하는 말일뿐이라 반신반의했지만 그래도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은 숨길 수 없었다. 말하고 나니 부끄러운 것도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봐도 도통 오르지 않고 제자리만 맴도는 등수는 내게 극도의 피로를 안겼다.


함께 앉아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공부하던 친구들이 덥석덥석 좋은 성적표를 받아 들 때면 동경과 부러움, 패배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아무리 오래 앉아 바삐 손을 움직여봤자 하등 쓸모가 없는 듯했다. 당당히 내보일 수 있는 꿈의 점수는 마치 신기루나 다름없었다.


비관적 사고는 언제나 전이가 빨라 낮은 등수는 상상 속에서 곧 암울한 대입 결과로 변했고, 다시 주변인의 괄시와 가족으로부터의 외면으로 바뀌었다. 남들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체했지만 자습실의 칸막이 책상 안에 숨어 왈칵 눈물을 쏟는 날들이 많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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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 나눈 엄마와의 짧은 대화는 기나긴 입시 생활의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내가 당장 시험을 망쳐도, 설사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대도 난 여전히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임을 되뇌자 놀랍게도 태산만 같던 시련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그림자를 약간 걷어내니 전에 없던 시야도 트였다.


‘그래, 인생은 길고 갈래는 많고 대학은 그 여정의 아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데 왜 이렇게까지 좌절해야 해? 나는 그냥 지금의 본분을 다하는 거야. 그러면 돼. 그뿐이야.’


삶은 참 아이러니해서 급급할 땐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다가도 느긋할 땐 안 될 일도 되곤 한다. 전과 달리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채워내니 나아질 기미 없던 성적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물론 본디 성적이라는 게 계단식 그래프가 아니라 오랜 정체기 후에 성과가 나오는 시스템이기에 그간 버텨왔던 시간들이 한몫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절망이란 심연에서 일찍이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아마 바라던 결과를 보기도 전에 모든 걸 놓아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학습 요령을 터득해 조금씩 오름세를 그리던 내신은 진급 후 대략 70등 정도를 단번에 추월해 제대로 상승곡선을 만들어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현실과 닿자 만족감과 더불어 자신감이 솟구쳐 학업에 점차 흥미가 생겼다. 게다가 주변에서의 반응도 뜨거웠고 선생님들 역시 칭찬 일색으로 보듬어주셨는데 덕분에 전보다 즐거이 계속해서 공부에 임해 결국 나는 내 기준에선 꽤나 만족스러운 최종 성적으로 고교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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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0대란 나이가 까마득하고 아련하게 여겨질 정도로 수 해가 흘렀다. 살을 에는 칼바람처럼 매섭게 나를 쳐댔던 당시의 고민들이 더 이상 중하지 않고 그마저도 귀엽고 순수하게 느껴질 만큼 말이다.


그러나 어린 나의 나날이 남긴 ‘성취’라는 내재적 보상과 ‘부분에 치우쳐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으리’란 가치관의 확립은 여전히 날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고, 앞으로도 역시 그럴 거라 장담한다.


저마다의 과업과 근심으로 고난한 순간순간을 버텨내는 모든 이들에게 과거의 내가 받았던 그 위로를 이제는 반대로 전하고 싶다. 일면식도, 사연도 모르는 토닥임이 태평한 오만일까 우려스럽지만 이 마음을 꼭 건네고 싶다.


당신은 넘치는 가치를 지닌 사람이며, 삭풍 몰아치는 계절 속에서도 보란 듯 진득이 싹을 틔워내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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