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자취 허락받기

26살, 첫 자취를 위해 내가 겪은 과정들 / 24년 한여름

by 당황하는 고양이
1724856281967.jpg?type=w966 자취하기 위해 공부한 것들

1. 첫 설득 실패
살면서 한 번도 자취해 본 적이 없었다. 최근 이런저런 이유로 자취를 하고 싶어 져서 왜 자취를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할 건지 PPT를 만들어 부모님께 발표해보려고 했지만 완강히 거부당했다. (PPT를 거실 TV에 띄워뒀는데, 제목만 보시더니 화를 내시며 방에 들어가셨다)

2. 그냥 하지 말까
사실 본가가 회사랑 멀지 않기 때문에, 자취를 꼭 해야만 할 이유가 없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자취는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데 굳이 왜 자취를 하려고 하냐. 10명 중 9명이 하는 말이다. 한번 설득에 실패하고 나니까 역시,, 굳이 해야 하나 반포기 상태였다.
부모님께 자취 설득하기 등의 주제로 유튜브 영상들도 좀 봤다. 독립은 진짜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배우는 것이며, 정서적 독립은 매우 중요하다, 등의 내용. 그중에 가장 내 마음을 끌었던 건 아래 영상이었다.

https://m.blog.naver.com/sanhaa_/223524494531

3. 나는 가진 게 없다.
영상을 보고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내가 평소 약점이라고 생각한 부분들을 아주 파고들었다. 영상에서 말하는 '삶을 책임지는 어른'의 조건 네 개 중에 나는 단 하나도 가진 게 없었다.


현실적으로 집을 구하려면 알아야 할 것이 많았다. 부동산에 대한 기초 지식은 물론, 몇 제곱미터가 몇 평인지 전용면적은 뭔지, 5평이면 대충 얼마큼 작은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무작정 부동산에 집을 보여달라고 찾아갔을 땐

어떤 집에 들어가 보고도 무얼 체크해 봐야 할지 몰라서, 멀뚱히 서있기만 하다가 나온 것 같다.


4. 그냥 하지 말까2
그래도 생각보다 매물을 꽤 많이 보러 다녔다. 유튜브도 많이 봤다. 보다 보니 역시 조금씩 눈이 트이는 듯했다.

계약하고 싶었던 집들이 고민하는 사이에 계약되는 걸 보니 조급해지기도 했고 반대로 그만둘까 싶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계약 따위 하지 않아도) 당장 갈 곳이 없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에겐 아늑한 본가와 내 방이 곁에 있다. 열심히 돌아다니면 뭐 해, 그냥 포기하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옳은 선택이란
그러나 포기할까란 생각을 떠올린 순간부터 다시 자취가 너무 하고 싶어졌다. 정확히는 해야겠다 싶었다.
난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똑같겠구나.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며 쉬운 길을 가려하겠구나.

불필요한 지출이라고 하더라도 나를 새로운 환경에 놓아보고 싶었다.
그 돈을 매달 쓰는 게 맞나, 포기하고 돈 모으는 게 현명한 거 아니냐.

맞다. 아마도 그렇겠지.

언제나 옳은 결정이란 없다. 다만 나는 확신하고 결정하고 실패하고 싶은 것이다.

6. 통보 또한 어찌 보면 회피가 아닐까.
저녁에 퇴근하고 집을 보고 왔다.
역시 집은 좋고 월세는 비쌌다. 보증금-월세 조정도 안된다고 했다.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다면, 바로 계약을 하려고 했지만 조정이 안된다고 해서 보류했다.

또 다른 숙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원래는 집을 먼저 계약하고, 계약 사실을 부모님께 통보하는 불효녀(?) 행동을 할까 싶었는데 그 또한 하나의 회피 같아서 어떻게 되든 직면해 보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랑 진지하게 2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엄마 내가 자취하면 엄마는 어떨 것 같아?
로 시작해서

내 초등학교 시절 성향, 대학교 때 있었던 일, 엄마 옛날 대학시절 얘기까지 한 것 같다.
첫 설득 때 사용했던 표면적이고 그럴듯한 이유(직주근접, 책임지는 어른의 삶)가 아니라 정말 내 진심을 털어둔 것 같다.

나는 내 생각에 확신이 없어 결정을 회피한다는 것과,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나의 약점이라 생각해 온 것,
독립을 해서 집을 구하고, 혼자 살림을 하고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보면서 스스로 확신하고 결단하는 능력을 기르고 싶다는 것,

등등... 의 이유로 자취하고 싶다고 했다.

7. 그래 나가 살아라 를 듣고 싶었던 걸지도
어머니는, 선택과 결정에 관해서는 꼭 자취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레 다른 일들을 겪으며 경험이 쌓일 것이라 하셨다. 모든 것과 별개로 딸이 집을 떠나는 게 섭섭하다고도 하셨고.

과거의 기억부터 현재의 감정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명확한 결론은 없이 대화가 마무리 됐다.

자기 전에 대화를 찬찬히 돌아보고 나니 "그 정도 깊이 생각했으면 그래, 나가 살아라"라는 말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또 허락과 인정 그 사이의 말을 듣고 안심하고 싶었나 보다. 그러나 스스로 확신을 가지는 것이 다시금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자취 허락은 받은 거냐? 한다면
다 큰 성인이 본인 돈으로 독립하는데 허락 같은 것이 필요할까..?라는 생각.

그동안 부모님이 잘 키워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과, 독립은 왜 하고 싶은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건강하게 대화해 본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나만의 결론.


온 마음 다해 키운 자식이 제 발로 둥지를 떠나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떨까. 괜히 마음 어딘가 한구석이 무거워진다.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어야겠다고 다시 굳게 마음을 먹는다.


8. 럭키비키

원래 너무 계약하고 싶었던 매물이, 어제 1시간 차이로 빼앗겼? 었다. 어쩔 수 없이 차선의 매물로의 계약을 90퍼센트 정도 결심을 세워가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입주 날짜 때문에 원래의 계약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중개인의 연락을 받았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을 보러 갔고, 집주인과 금액 조정도 조금 해서 진짜 딱 내 마음에 드는 가격대에 계약하기로 했다.

충동적 결심이 아니라 충분히 조사하고 고민하고 마음을 정리해 둔 덕에,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안전하게 잘 계약한 것 같다. (맞겠지..?)

9. 잊지 않고 싶어서
하루이틀 만에 계약과 이삿날이 잡혔다. 앞으로 해야 할 건 더 많겠지만 그래도 한 고비는 넘은 것 같다.

감정과 생각의 소용돌이가 한참이다가, 이제야 좀 정리된 것 같다. 정말 잊지 않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