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집과 꽉 찬 무기력, 처음으로 정신과에 가본 날

by 당황하는 고양이

텅 빈 집으로의 귀가는 내면의 고독과 우울을 반긴다.


자취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인지, 우울감과 무기력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 9/29 일기 중

다시 힘들어서 일기장을 폈다.

어제는 뭔지 모를 이유로 3번이나 엉엉 울었다. 감정조절이 힘든 상태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냥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표정이 일그러지고 뚝뚝 눈물을 떨구며 엉엉 운건 어릴 때 이후로 오랜만인 것 같다.


최근 들어 의욕이 없고 무기력함, 멍한 상태가 지속되고 생각과 판단이 멈춘 것이 느껴진다.

불안하고 초조함에 일을 그르치는 것 같다.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불안감에 잠에 들기 어렵거나, 피곤해서 잠들었다가도 생뚱맞은 새벽에 깨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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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나는 꽤나 주기적으로 무기력, 우울감을 느끼는 편이라,

또 왔군, 하며 나만의 처방약들을 시도해 본다.

- 감사일기 쓰기

- 몸 움직이기: 러닝을 시도, 시간적 상황이 여의치 않아 꾸준히 하진 못함

- 명상하기 : 잠이 오지 않을 때 종종 함


음 처방약도 잘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약을 꾸준히 못 먹었다고 해야 할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아래 네 가지 항목을 명확히 느꼈을 때, 결심했다.


- 평소에 흥미 있던 것에도 흥미가 떨어짐 (평소 취미로 즐겨했던 클라이밍을 해도 의욕이 안 생기고 재미가 느껴지지 않음)

- 무기력,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게 한 달이 넘어가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는 일이 많아짐

- 말이 느려지고 행동에 대한 상황파악, 판단을 못하게 돼서 스스로가 너무 답답함.

- 평소에도 좀 자주자주 깜박하고 놓치는 스타일인데 더 심해져서 일상생활하거나 회사 업무에도 지장.



인생에서 처음이지만, 이젠 정말 정신과를 가봐야겠다.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 잘 몰라서,

집 가까운 곳부터 찾다가 예약이 제일 빨리되는 곳으로 했다.

일반 병원처럼 진료 접수하고 대기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 병원이든 보통 초진은 예약이 필수라고 하더라. 몰랐네, 예약 전화하는 것도 좀 두근두근 많이 떨린다.


예약을 잡고 일주일 뒤 병원을 갔다.

병원에 도착하면 진료를 보기 전에 심리 검사 같은 걸 한다. 몇 종류의 문항에 응답했다.


설문조사가 끝나면 의사 선생님이랑 진료를 본다.

어떻게 오셨어요, 언제부터 그러셨나요를 물어보신다. (식욕, 수면 상태 등에 대한 증상도 물어보시고.)


검사 결과, 증상이 나쁜 편은 아니라고 하셨던 것 같다.

감정조절보다 말이 느려지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판단이 흐려지는 순간이 많아진다는 게 가장 답답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무기력하면, 그러니까 뇌가 즐거움이 없으면 원래 인지능력이 저하되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우울과 무기력이 좋아지면 자연스레 나아질 것이니

적은 양부터 약물치료를 시작해 보자 하셨다.


항우울제와 도파민 효능제를 처방받았다.



별 일이 있어야만 우냐.


두어 달 가까이 약을 먹으며 내 감정 상태를 기록해 봤다.


기억에도 안 남는 슬프고 감동적인 쇼츠들을 보면서 하루 종일 줄줄 눈물을 흘려도 보고,

눈물을 다 쏟아내고는 처음 느끼는 묘한 안도감도 마주한다.


눈물이 난다 = 왜 울지 > 나 슬픈가? > 왜 슬프지? > 슬픈 일이 있나? > 나한테 문제가 있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었는데,

그냥 이유 없이 울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굳이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으니 편해졌다.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우는 내 모습을 보니, 불쌍하다.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낀다.


약 먹고는 갑자기 한밤중에 러닝도 해보고, 잠도 설쳐보고 하면서

의사 선생님과 맞는 약을 찾아나갔는데

어느 순간 약을 새로 받으러 가는 귀찮음과 비교해 보니, 내 무기력이 견딜만해졌다.



이제는 견딜만해진 무기력과 동거한다


나는 생각이 엄청 많은 편이라 (특히 반추사고)

자취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생각에 빠지는 시간도, 깊이도 늘어났고

그렇게 한 걸음씩 우울의 나선에 빠지게 된 것 같다.


정신과에서 약의 도움도 받고,

나의 넘치는 생각들을 글쓰기로 의도적으로 해소하다 보니 자연히 나아진 것 같다.

아니면 무기력한 상태가 기본 상태가 되어 심각함을 못 느끼는 걸 수도 있고.


그래, 무기력과 동거하면 뭐 어떠냐.. 그냥 룸메이트 얻었다고 생각하지.

잠을 좀 잘 못 자면 어떠냐, 남들보다 심야 시간 활용해서 책도 읽을 수 있고, 좋은 거지.


(혹여나 정신과 방문을 망설이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감기로 병원에 가는 것처럼 가볍게 가보셔도 좋겠다고 조심스레 (내가 뭐라고) 적어본다.

다만, 초진은 예약 필수이니 미리미리 일정을 확인하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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